나는 의상 담당의 뒷모습이 멀어진 뒤로도 안마당에서 그녀 생각을 했다. 시든 화분과 수많은 의상들로 둘러싸인 방에서 그녀는 홀로 작업한다. 그녀의 마음속에서만 상연될 연극을 위해 등장인물들이 입을 옷을 짓는다. 내가 배달한 꾸러미에서 레이스 쪼가리 하나를 꺼내 어루만지면, 이루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옷감을 만져온 손가락이 금세 그 속으로 숨어든다. 그녀는 옷감에서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아득히 먼 곳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속삭임을 반지 하나 끼지 않은 늙은 손이 건져 올린다. 그녀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누군지 모를 그 사람을 잠시간 무대에 되살려내기 위한 의상을 생각한다. 이윽고 재봉틀에 실을 꿴다. 소맷부리에, 가슴에, 또는 치맛자락에 레이스를 꿰매 붙인다. 구부정한 등이 재봉틀과 하나로 이어져 구별할 수 없게 된다.
무대의상 한 벌이 완성된다. 빠뜨린 데가 없는지 구석구석 살펴보고, 먼지를 털고, 전체적인 모습을 바라보고 나면 긴 숨을 한 번 내쉬고 행어에 건다. 얼마 남지 않은 공간에 그럭저럭 쑤셔 넣은 의상은 금세 다른 의상들 속에 파묻힌다. 의상 담당은 이런 식으로 죽은 이를 위한 옷을 계속해서 만든다.
- 27~28쪽,「의상 담당」에서
대학 노트가 한 권 한 권 글자로 메워지고, 연필은 몽땅하게 줄어들었다. 등이 쑤시고, 공책은 땀으로 축축하고, 눈도 가물거리지만 신사 아저씨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유도 생각하지 않고, 괜히 무리하지도 않는다. 이 세상을 형성하는 것들을 하나하나 손에 들고 찬찬히 바라보며 감촉을 확인한 뒤 있던 곳에 되돌려놓는다. 그 일을 한없이 반복한다. 과거에 딸이 탐색했던 길을 따라가며 희미한 자취라도 남아 있지 않은지 자세히 살펴보고, 그 애가 그렇게 바랐어도 도달하지 못했던 길을 대신 밟는다.
- 52~53쪽,「백과사전 소녀」에서
그곳은 결코 방이 아니고, 헛방도 아니고, 당연히 의자라든지 전등, 양탄자도 없는, 그저 문손잡이를 위해 존재하는 어둠이었다. 세계의 우묵한 구멍 같은 아케이드에 숨겨진 또 하나의 우묵한 구멍이었다. 그곳에 주저앉아 몸을 둥글게 말고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있으면, 올바른 위치에 쏙 들어간 것처럼 몸이 편안했다. 거리를 걸으면서 옅게 흐릿해졌던 속 알맹이가 다시 응축되는 듯했다. 페페도 꼭 같이 들어와서는 틈새가 없을 듯한 곳에 재주 좋게 파고들어 내 엉덩이와 다리 사이에 몸을 말고 누웠다.
어렸을 때는 관절이 삐걱삐걱 쑤실 지경이었는데, 어느새 좁은 게 신경 쓰이지 않게 되었다. 몸이 자라고 페페까지 있으니 더 좁은 게 당연하건만, 구멍과 몸의 라인이 조화를 이루고 어둠은 우리를 보듬어주었다. 어디에도 무리가 없었다.
-136~137쪽,「손잡이 씨」에서
“이런 식으로 누가 대대적으로 칭송받는 자리에 있을 수 있다니, 그것만으로도 특별한 일 아니냐. 내가 모르는 사람이라도, 나 자신은 평생 칭송받을 일이 없으리란 걸 알고 있어도, 박수를 보내는 일 그 자체만으로도 행운이란 기분이 드는 거야.”
(중략)
“세 선수의 목에 차례대로 메달이 걸려. 특제 받침대에 놓여 있던 메달이 선수의 목에 걸리는 순간 갑자기 생기 넘치게 보이니 참 신기하지. 드디어 영혼을 얻은 거야. 하지만 메달이 선수보다 튀는 일은 결코 없어. 가장 빛나는 건 물론 승자야. 메달은 그 점을 잘 이해하고 있어. 자기는 이 사람이 승자입니다, 하고 가리키기 위한 조그만 표지에 불과하다는 걸 알아.”
- 154~155쪽,「훈장 상점 미망인」에서
내가 태어나기 조금 전, 어느 부잣집 다락방의 여행 가방에서 나온 진기한 레이스를 만난 레이스 상점 주인은 잠시 망설인 끝에 그것을 사들여 액자에 담아 가게 구석에 장식했다. 그게 유발로 뜬 레이스였다. 망설인 것은 값이 비싸서가 아니라 소유자의 마음이 그토록 깊이 스며든 물건을 장사하는 곳에 들이기가 꺼려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레이스는 여행 가방 속에서 짓눌리고 가장자리는 올이 풀려 힘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손을 보지 않으면 조각조각 해체되어 한낱 먼지 묻은 머리털이 될 우려가 있었다. 주인은 그것을 구해내 원래 모습으로 되돌리고 보존하기 위해 구입한 것이었다. 유발 레이스는 자신이 취급하는 물건은 많든 적든 죽은 이의 자취를 지니고 있으니 그들을 공경하는 마음을 잊어선 안 된다는 신념의 상징이었다.
-157~158쪽,「유발 레이스」에서
어디로 돌아가는지 모르는 조교의 뒷모습을 향해 말없이 작별 인사를 한 뒤, 나는 홀로 아케이드로 돌아왔다. 걸으면서 내내 조교 생각을 했다. 인간은 아무도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는 캄캄하고 습한 동굴에 사는 황갈색과일박쥐를 생각하는 인생. 그들이 발하는 초음파의 의미를 알고 싶어 하고, 그것을 알면 어떻게 되는 건지도 모르는 채, 날이면 날마다 그들을 관찰하고 그래프를 만들고 가설을 수립하고 실험을 되풀이하는 인생. 인간이 모르는 방식으로 신호를 주고받는 작은 동물의 현명함에 감명 받는 인생. 그리고 바이올린을 잘 켤 수 있는 인생.
어쩌면 아버지가 살았을 수도 있는 인생은 이렇게나 매력적이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아버지의 불운을 이렇게 누가 보충해준다. 아케이드 관리인으로서의 인생이 얼마나 근사한 것이었는지를 이런 식으로 내게 보여준다.
- 208~209쪽,「유괴범의 시계」에서
의상 담당
백과사전 소녀
토끼 부인
고리 집
종이 상점 시스터
손잡이 씨
훈장 상점 미망인
유발 레이스
유괴범의 시계
포크댄스 발표회
옮긴이의 말
■ 지은이 _ 오가와 요코(小川洋子)
1962년에 태어났다. 와세다 대학 제1문학부 문예과를 졸업하고, 1988년 『상처 입은 호랑나비』로 가이엔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작가로 데뷔했다. 1991년 「임신 캘린더」로 일본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아쿠타가와상을, 2003년 『박사가 사랑한 수식』으로 제55회 요미우리문학상 소설상, 제1회 일본서점대상 등을 수상하며 일본의 대표적인 여성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2004년 『브라흐만의 매장』으로 이즈미교카문학상을, 2006년『미나의 행진』으로 다니자키준이치로상을 받았다. 2012년에는 『작은 새』로 문부과학대신상을 수상했다. 『약지의 표본』『침묵박물관』 『호텔 아이리스』가 프랑스에서, 『박사가 사랑한 수식』이 일본에서 영화로 제작되었고, 『인질의 낭독회』는 일본에서 드라마로 제작되었다. 이 외에 『바다』 『고양이를 안고 코끼리와 헤엄치다』 『완벽한 병실』 『미나의 행진』 『슈거타임』 『안네 프랑크의 기억』 『호텔 아이리스』 『우연한 축복』 『귀부인 A의 소생』 『언제나 그들은 어딘가에』 등의 작품이 있다.
■ 옮긴이 _ 권영주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바다』 『고양이를 안고 코끼리와 헤엄치다』 『인질의 낭독회』 등 오가와 요코의 작품과 『삼월은 붉은 구렁을』 『흑과 다의 환상』 『유지니아』 『한낮의 달을 쫓다』 등 온다 리쿠의 작품들, 요네자와 호노부의 『빙과』를 비롯한 고전부 시리즈, 『나의 미스터리한 일상』 등 와카타케 나나미의 작품들, 『데이먼 러니언』 『다다미 넉 장 반 세계일주』 『아 아이이치로의 낭패』 『아시야 가의 전설』 『잘린 머리처럼 불길한 것』 『오! 파더』 『오자와 세이지 씨와 음악을 이야기하다』 등 다수의 책을 우리말로 옮겼다.
아쿠타가와상, 요미우리문학상, 일본서점대상, 다니자키준이치로상에 이어 2012년에는 문부과학대신상을 수상하며 일본의 대표적인 여성 작가로 자리매김한 오가와 요코의 연작소설집 『세상 끝 아케이드』가 현대문학에서 출간되었다.『박사가 사랑한 수식』『고양이를 안고 코끼리와 헤엄치다』등의 작품을 통해 절제된 문장으로 따듯한 감동과 아름다운 정서를 선사했던 오가와 요코가 이번에는 정적에 감싸인 낡은 아케이드에서 벌어지는 열 가지 이야기를 하나의 책으로 엮어냈다.『인질의 낭독회』이후 한국에서 3년 만에 발매되는 신작으로 그녀를 기다리던 팬들에게는 반가운 소식이 될 것이다.
상실이라는 인간의 근원적 슬픔을 끌어안고 헤매다 작은 아케이드에 도착한 사람들은 이곳에서 죽은 이의 기억이 담긴 물건을 사고 따뜻한 어둠에 슬픔을 풀어놓는다. 비록 그 슬픔을 완전히 해소하지는 못하더라도, 자신의 슬픔을 이해하고 소중히 여겨주는 사람과 장소를 만나 위로받고 다시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는다. 아케이드의 관리인이자 배달원인 서술자 ‘나’ 역시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죽음을 아케이드에서 치유하며, 이야기가 거듭되며 밝혀지는 나의 과거와 에피소드들은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를 점점 허물어 간다.
이야기는 이웃과 죽음을 매개로 발전해온 ‘파사주-아케이드’에서 시작되었다
오가와 요코는 전자책 서점 리더스토어에서 주최한 『세상 끝 아케이드』특별 대담에서 ‘인물보다 장소를 먼저 묘사하고 싶었고, 손님이 많지는 않지만 다른 곳에서는 얻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는, 어디에 있는지 모호한 그런 닫힌 곳을 그리고 싶었다’며 파리의 파사주(19세기 유럽 도시에 출현한 아케이드 거리. 이웃들과 장례를 매개로 해서 발전했다고 한다)나 유럽의 아케이드와 비슷한, 좁은 골목에 유리 천장이 있고 상품과 동화된 것 같은 주인이 앉아 있는 곳이라는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이야기를 생각해냈다며 작품의 배경이 되는 아케이드를 묘사한다.
또한 자신이 좁은 곳에 집착하는 것은 반대로 굉장히 넓은 곳을 찾는 일과 같다며 전작 『고양이를 안고 코끼리와 헤엄치다』에서 가로 8칸, 세로 8칸인 체스판을 통해 주인공이 그 이상의 세계를 접하고 우주를 느끼는 것처럼, 아케이드의 백과사전이나 의안 등도 일상생활에서는 도달할 수 없는 어떤 곳을 보여주는 문고리이자 입구이며, 아케이드는 깊고 넓은 다른 세계로 이어지는 통로라고 설명한다.
집필 과정에 대해서는 “예를 들자면 레이스란 물건은 검은 종이에 붙여 보면 아시겠지만 사실 우리가 뜬 실이 아니라 짜이지 않은 틈새, 즉 그곳에 없는 것의 아름다움을 보고 있다는 점에서 굉장히 소설적인 사물이다. 아케이드의 상품들에는 기본적으로 인간이 두 손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의 고귀함이 담겨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케이드에서 취급하는 상품을 먼저 고른 후 그에 따라 인물들의 이야기를 그려냈다.”고 말한다. 아케이드라는 장소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상품으로, 그리고 캐릭터로 연결되어 뻗어나간 것이다.
작품에서 드러나는 오가와 요코의 죽음과 삶, 소설에 대한 시각
결국 이 소설에서 다루고 있는 주요 주제 중 하나는 죽음이다. 요코는 이어지는 대담에서 “결국 나는 살아 있는 건지 죽은 건지 알지 못하는 상태를 좋아한다. 박제 동물도 죽고 싶지만 인간의 애정 때문에 애매한 공간에 머무르고 있다고 느끼는데, 그런 모습에 애정이 솟는다. 그런 있어서는 안 되는 모순 속에 ‘소설’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라고 말한다.
또 “내 소설에 그려진 시점에서 결국은 누구나 죽는다. 죽음이라는 면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고 생각한다. 거칠게 말하자면 소설은 죽음을 그리기 위한 도구이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줄여 주기 위해 죽음을 설명해 주는 게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죽음을 지켜보는 것이다. 등장인물의 세계에서 죽음을 지켜봐줄 사람이 없다면, 적어도 작가는 그 죽음을 지켜봐야 한다.”라고 자신의 사생관과 소설관을 피력했다.『세상 끝 아케이드』는 이렇게 오가와 월드 특유의 묘사와 정서와 더불어 그녀가 천착해온 죽음과 삶, 소설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그녀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소중한 작품이다.
오가와 요코의 새로운 시도, 만화와의 접목
『세상 끝 아케이드』는 오가와 요코 작품 중 처음으로 만화가 아리나가 이네가 작화를 맡아 동명의 만화 및 이네의 삽화가 들어간 버전의 소설도 발간되어 주목을 끌었다.
삽화 소설과 만화의 전자책 출간에 발맞춰 이뤄진 만화가 아리나가 이네와의 대담에서 요코는 “만화 작업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며 화면에서는 무언가를 표현할 때 적어도 두 단계 이상을 밟아나가야 하며, 글이 그런 면에서는 독자를 좀 더 단번에 다른 세계로 접할 수 있게 한다는 차이를 깨닫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네는 “작업을 하며 어느덧 이야기 속에서 안과 밖이 모호해지는 경험을 했다. 어떤 문을 여는 순간 갑자기 넓은 우주로 이어지는 느낌, 현실과 이어져 있으면서 우주와도 이어져 있는 느낌 같은 것을 제대로 표현하는 것이 힘들었다.”고 소회하며 오가와 월드에 대한 감탄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