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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끝 아케이드 最果てアーケード

  • 저자 오가와 요코 지음
  • 역자 권영주
  • ISBN 978-89-7275-732-0
  • 출간일 2015년 02월 28일
  • 사양 240쪽 | 127*188
  • 정가 12,000원

아쿠타가와상 수상 작가 오가와 요코 3년 만의 신작,
상실이라는 인간의 근원적 슬픔을 보듬는 열 편의 이야기

나는 의상 담당의 뒷모습이 멀어진 뒤로도 안마당에서 그녀 생각을 했다. 시든 화분과 수많은 의상들로 둘러싸인 방에서 그녀는 홀로 작업한다. 그녀의 마음속에서만 상연될 연극을 위해 등장인물들이 입을 옷을 짓는다. 내가 배달한 꾸러미에서 레이스 쪼가리 하나를 꺼내 어루만지면, 이루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옷감을 만져온 손가락이 금세 그 속으로 숨어든다. 그녀는 옷감에서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아득히 먼 곳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속삭임을 반지 하나 끼지 않은 늙은 손이 건져 올린다. 그녀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누군지 모를 그 사람을 잠시간 무대에 되살려내기 위한 의상을 생각한다. 이윽고 재봉틀에 실을 꿴다. 소맷부리에, 가슴에, 또는 치맛자락에 레이스를 꿰매 붙인다. 구부정한 등이 재봉틀과 하나로 이어져 구별할 수 없게 된다.
무대의상 한 벌이 완성된다. 빠뜨린 데가 없는지 구석구석 살펴보고, 먼지를 털고, 전체적인 모습을 바라보고 나면 긴 숨을 한 번 내쉬고 행어에 건다. 얼마 남지 않은 공간에 그럭저럭 쑤셔 넣은 의상은 금세 다른 의상들 속에 파묻힌다. 의상 담당은 이런 식으로 죽은 이를 위한 옷을 계속해서 만든다.
- 27~28쪽,「의상 담당」에서

 

대학 노트가 한 권 한 권 글자로 메워지고, 연필은 몽땅하게 줄어들었다. 등이 쑤시고, 공책은 땀으로 축축하고, 눈도 가물거리지만 신사 아저씨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유도 생각하지 않고, 괜히 무리하지도 않는다. 이 세상을 형성하는 것들을 하나하나 손에 들고 찬찬히 바라보며 감촉을 확인한 뒤 있던 곳에 되돌려놓는다. 그 일을 한없이 반복한다. 과거에 딸이 탐색했던 길을 따라가며 희미한 자취라도 남아 있지 않은지 자세히 살펴보고, 그 애가 그렇게 바랐어도 도달하지 못했던 길을 대신 밟는다.
- 52~53쪽,「백과사전 소녀」에서

 

그곳은 결코 방이 아니고, 헛방도 아니고, 당연히 의자라든지 전등, 양탄자도 없는, 그저 문손잡이를 위해 존재하는 어둠이었다. 세계의 우묵한 구멍 같은 아케이드에 숨겨진 또 하나의 우묵한 구멍이었다. 그곳에 주저앉아 몸을 둥글게 말고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있으면, 올바른 위치에 쏙 들어간 것처럼 몸이 편안했다. 거리를 걸으면서 옅게 흐릿해졌던 속 알맹이가 다시 응축되는 듯했다. 페페도 꼭 같이 들어와서는 틈새가 없을 듯한 곳에 재주 좋게 파고들어 내 엉덩이와 다리 사이에 몸을 말고 누웠다.
어렸을 때는 관절이 삐걱삐걱 쑤실 지경이었는데, 어느새 좁은 게 신경 쓰이지 않게 되었다. 몸이 자라고 페페까지 있으니 더 좁은 게 당연하건만, 구멍과 몸의 라인이 조화를 이루고 어둠은 우리를 보듬어주었다. 어디에도 무리가 없었다.                                                    

-136~137쪽,「손잡이 씨」에서

 

“이런 식으로 누가 대대적으로 칭송받는 자리에 있을 수 있다니, 그것만으로도 특별한 일 아니냐. 내가 모르는 사람이라도, 나 자신은 평생 칭송받을 일이 없으리란 걸 알고 있어도, 박수를 보내는 일 그 자체만으로도 행운이란 기분이 드는 거야.”

 (중략)
“세 선수의 목에 차례대로 메달이 걸려. 특제 받침대에 놓여 있던 메달이 선수의 목에 걸리는 순간 갑자기 생기 넘치게 보이니 참 신기하지. 드디어 영혼을 얻은 거야. 하지만 메달이 선수보다 튀는 일은 결코 없어. 가장 빛나는 건 물론 승자야. 메달은 그 점을 잘 이해하고 있어. 자기는 이 사람이 승자입니다, 하고 가리키기 위한 조그만 표지에 불과하다는 걸 알아.”
- 154~155쪽,「훈장 상점 미망인」에서

 

내가 태어나기 조금 전, 어느 부잣집 다락방의 여행 가방에서 나온 진기한 레이스를 만난 레이스 상점 주인은 잠시 망설인 끝에 그것을 사들여 액자에 담아 가게 구석에 장식했다. 그게 유발로 뜬 레이스였다. 망설인 것은 값이 비싸서가 아니라 소유자의 마음이 그토록 깊이 스며든 물건을 장사하는 곳에 들이기가 꺼려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레이스는 여행 가방 속에서 짓눌리고 가장자리는 올이 풀려 힘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손을 보지 않으면 조각조각 해체되어 한낱 먼지 묻은 머리털이 될 우려가 있었다. 주인은 그것을 구해내 원래 모습으로 되돌리고 보존하기 위해 구입한 것이었다. 유발 레이스는 자신이 취급하는 물건은 많든 적든 죽은 이의 자취를 지니고 있으니 그들을 공경하는 마음을 잊어선 안 된다는 신념의 상징이었다.

-157~158쪽,「유발 레이스」에서

 

어디로 돌아가는지 모르는 조교의 뒷모습을 향해 말없이 작별 인사를 한 뒤, 나는 홀로 아케이드로 돌아왔다. 걸으면서 내내 조교 생각을 했다. 인간은 아무도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는 캄캄하고 습한 동굴에 사는 황갈색과일박쥐를 생각하는 인생. 그들이 발하는 초음파의 의미를 알고 싶어 하고, 그것을 알면 어떻게 되는 건지도 모르는 채, 날이면 날마다 그들을 관찰하고 그래프를 만들고 가설을 수립하고 실험을 되풀이하는 인생. 인간이 모르는 방식으로 신호를 주고받는 작은 동물의 현명함에 감명 받는 인생. 그리고 바이올린을 잘 켤 수 있는 인생.
어쩌면 아버지가 살았을 수도 있는 인생은 이렇게나 매력적이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아버지의 불운을 이렇게 누가 보충해준다. 아케이드 관리인으로서의 인생이 얼마나 근사한 것이었는지를 이런 식으로 내게 보여준다.                                    

- 208~209쪽,「유괴범의 시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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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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