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가 사랑한 수식』 『세상 끝 아케이드』 『고양이를 안고 코끼리와 헤엄치다』의 작가 오가와 요코의 소설집 『임신 캘린더』가 현대문학에서 번역을 다듬어 재출간되었다. 제104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인 「임신 캘린더」를 포함해 아쿠타가와상 수상 이후 처음으로 발표한 작품 「기숙사」, 《뉴요커》에 영역판이 실리며 오가와 요코 문학을 해외에 알린 「해 질 녘의 급식실과 비 내리는 수영장」까지, 그림자처럼 흐릿해 더욱 서늘한 두려움을 담은 세 편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작가는 이 책에서 출산, 해외 이주, 결혼이라는 커다란 생활의 변화를 앞둔 여성들이 겪는 막연하고 모호한 두려움과 혼란을 묘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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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속으로
그녀를 빤히 쳐다보는 까닭은 잼을 그냥 먹는 부자연스러움 때문이 아니라 기형적인 몸 때문인 것 같다. 커다랗게 부푼 배 때문에 몸의 온갖 부분이, 예를 들면 장딴지와 볼, 손바닥과 귓불, 엄지손가락과 손톱과 속눈썹의 균형이 일그러져 있다. 그녀가 잼을 삼키면 목살이 위아래로 천천히 꿈틀거린다. 숟가락 자루가 부어오른 손가락에 자국을 남긴다. 나는 그런 언니의 몸 이 부위 저 부위를 말없이 하나하나 바라본다. 마지막 한 숟가락을 깔끔하게 핥아먹자 언니는 어리광을 부리듯 애처로운 눈빛으로 나를 보면서 중얼거린다.
“이제, 없네.”
“내일 또 만들어줄게.”
나는 무표정하게 대답한다. 그리고 온 집 안에 있는 그레이프프루트를 다 잼으로 만들고 나면 아르바이트를 하는 슈퍼마켓에서 또 사 들고 온다. 그럴 때마다 나는 과일 매장 담당자에게 “이거 미국산 그레이프프루트 맞나요?” 하고 확인한다.
- 66쪽,「임신 캘린더」에서
나는 조심조심 손을 내밀어보았다. 방울 하나가 가운뎃손가락 끝을 스치고 떨어졌다. 용기를 내어 조금 더 손을 내밀자 그다음 방울이 손바닥에 떨어졌다.
차갑지도 뜨끈하지도 않았다. 그저 끈끈한 감촉만 남았다. 나는 그것을 손수건으로 닦아낼까, 아니면 쥐어 뭉개버릴까 망설이면서 손바닥을 편 채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방울은 톡, 톡 쉬지 않고 떨어졌다.
‘대체 뭐지?’
나는 열심히 생각했다. 선생님은 잠들었고, 사촌 동생은 합숙 중이고, 수학을 전공하는 그는 행방불명이 되었다. 나는 정말 혼자였다.
‘연필을 쥐고 수학 문제를 풀고 꽃삽으로 구근을 심었다는 그의 아름다운 왼 손가락은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톡.
‘왜 저렇게 묘한 색의 튤립이 핀 것일까.’
톡.
‘왜 나는 늘 사촌 동생을 만날 수 없는 것일까.’
톡.
방울과 함께 온갖 의문이 떨어졌다.
‘왜 선생님은 사촌 동생의 근육과 관절과 견갑골을 그렇게 자세하게 묘사할 수 있는 것일까.’
나는 점차 숨이 갑갑해졌다. 벌리고 있는 손바닥이 저리면서 무거워졌다. 갈 곳 없는 방울이 손바닥에 웅크리고 있었다.
- 145쪽,「기숙사」에서
“저는 눈도 깜박거리지 못하고 그저 서 있었습니다. 그때의 기분을 설명하고 싶은데, 뭐라고 표현이 안 되는군요. 무서웠다, 싫었다, 그런 단순한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장면이었다면 벌써 옛날에 잊어버렸을 겁니다. 감정이 끓어오르기도 전에 뜨뜻미지근한 김의 아른거림과 삽 끝에서 떨어지는 스튜 방울과 짓뭉개진 감자에 찍힌 장화 자국, 그런 불가사의한 광경들이 제 가슴을 짓눌렀죠.”
“그 후인가요? 먹을 수 없게 된 게.”
나는 얘기의 핵심을 파악하듯 천천히 물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루미늄 그릇 소리만 들려도, 급식 당번이 복도 저쪽에서 뛰어오기만 해도 그 풍경이 하나하나 되살아났죠. 정말 견딜 수 없었어요. 그래서 제게는 급식이 수영장과 똑같은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이죠. 아무리 손발을 버둥거려도 몸이 가라앉는 것처럼, 급식을 숟가락으로 떠서 입에 대려고 하면 뚱뚱한 아줌마와 삽과 고무장화가 가로막았습니다. 어느 날 아침에는 저도 어쩔 수가 없어서 책가방을 멘 채로 학교에는 가지 않고 온 동네를 싸돌아다녔어요. 체육 수업이 있는 날이어서 마침 좋았죠. 수영 팬티와 빨간 수영모가 들어 있는 비닐 가방을 무릎으로 차면서 걸었습니다. 저는 꽤 오랜 시간을 혼자 돌아다닌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두 시간 정도였어요. 그때쯤 할아버지가 저를 찾아내셨으니까요.”
- 185쪽,「해 질 녘의 급식실과 비 내리는 수영장」에서
■ 목차
임신 캘린더
기숙사
해 질 녘의 급식실과 비 내리는 수영장
작가 후기
해설-순순함의 행방
옮긴이의 말
■ 지은이 _ 오가와 요코(小川洋子)
1962년에 태어났다. 와세다 대학 제1문학부 문예과를 졸업하고, 1988년 『상처 입은 호랑나비』로 가이엔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작가로 데뷔했다. 1991년 「임신 캘린더」로 일본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아쿠타가와상을, 2003년 『박사가 사랑한 수식』으로 제55회 요미우리문학상 소설상, 제1회 일본서점대상 등을 수상하며 일본의 대표적인 여성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2004년 『브라흐만의 매장』으로 이즈미교카문학상을, 2006년『미나의 행진』으로 다니자키준이치로상을 받았다. 2012년에는 『작은 새』로 문부과학대신상을 수상했다. 『약지의 표본』『침묵박물관』 『호텔 아이리스』가 프랑스에서, 『박사가 사랑한 수식』이 일본에서 영화로 제작되었고, 『인질의 낭독회』가 일본에서 드라마로 제작되었다. 이 외에 『바다』 『고양이를 안고 코끼리와 헤엄치다』 『완벽한 병실』 『미나의 행진』 『슈거타임』 『안네 프랑크의 기억』 『호텔 아이리스』 『우연한 축복』 『귀부인 A의 소생』 『언제나 그들은 어딘가에』 등의 작품이 있다.
■ 옮긴이 _ 김난주
1958년 부산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을 수료했다. 1987년 쇼와 여자대학에서 일본 근대문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고, 현재 일본 문학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오가와 요코의 『박사가 사랑한 수식』『호텔 아이리스』를 비롯해 요시모토 바나나의 『스위트 히어애프터』『키친』, 무라야마 유카의 『별을 담은 배』 에쿠니 가오리의 『반짝반짝 빛나는』 『냉정과 열정 사이』, 아베 코보의 『모래의 여자』, 시오노 나나미의 『생각의 궤적』,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포트레이트 인 재즈』, 히가시노 게이고의 『오사카 소년탐정단』『신참자』, 마루야마 겐지의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등 다수의 책을 우리말로 옮겼다.
언니의 임신에 미묘한 반감을 품은 여동생이 출산까지의 과정을 지켜보며 쓴 일기 「임신 캘린더」
양팔과 한쪽 다리가 없는 관리인이 지키는 기숙사에서 사라지는 사람들 「기숙사」
급식실이 불러일으키는 정서에 사로잡힌 남자의 고백 「해 질 녘의 급식실과 비 내리는 수영장」
표제작인 「임신 캘린더」는 1990년 하반기 심사위원들의 절대적인 지지로 제104회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언니 부부와 살고 있는 ‘나’는 언니의 임신 사실을 전해 듣는다. 글은 그때부터 언니의 출산까지, 변해가는 언니의 모습을 지켜보며 그날그날 일어나는 일들과 자신의 생각을 서술하는 일기의 형식을 띠고 있다.
소설가 마쓰무라 에이코의 작품 해설에 따르면, 이 단편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임신’이 축하할 일이라기보다는 불안하고 꺼림칙한 일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주인공은 딱히 거부감을 표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대하거나 설레는 마음으로 아기의 탄생을 기다리지는 않는다. 이는 아이를 가진 언니도 마찬가지라서, 임신을 했다는 사실과 배 속의 아기는 전혀 무관하다는 듯 행동하다가도 임신이란 원초적 상황에 갈팡질팡하며 다가오는 아이와의 만남에 겁을 먹는다. 나는 변화하는 언니의 모습을 기록으로 담으며 임신이 과연 축하해야 할 일인지 고민하고, 농약이 다량 살포되었다는 그레이프프루트로 만든 잼을 매일 언니에게 먹임으로써 언니에게 고통을 주고 언니를 꼴사납게 만드는 언니 배 속의 생명에게 가벼운 복수를 한다.
「기숙사」의 주인공은 남편을 해외 부임으로 떠나보낸 주부로, 남편을 따라 일본을 떠날 준비를 해야 하지만 패치워크에만 몰두하며 현실에서 소극적으로 도피하고 있다. 그 와중에 사촌 동생이 기숙사를 소개시켜달라고 부탁하자, 그를 도와준다는 것을 구실 삼아 세세한 이주 준비를 요청하는 남편의 편지를 서랍 깊숙이 밀어 넣는다. 「해 질 녘의 급식실과 비 내리는 수영장」의 주인공은 신혼 생활을 앞둔 예비 신부지만 결혼에 대한 기대나 설렘 따위는 느끼지 못한다. 그저 어쩌다 몇 번 만난 남자가 들려주는 급식실과 비 내리는 수영장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 풍경을 떠올리고 남자의 정서에 젖어들 뿐이다.
이 세 이야기의 주인공은 모두 다가올 사건에 대해 현실감을 느끼지 못하며, 무언가가 결핍되어 있다. 「임신 캘린더」의 나에게는 조카가 생긴다는 기쁨과 희망이 없고, 「기숙사」의 나에게는 남편과의 재회를 고대하는 즐거움이 없으며, 「해 질 녘의 급식실과 비 내리는 수영장」의 나에게는 신혼에 대한 꿈이나 기대가 없다.
이들은 자신이 처한 현실에서 유리되어 있고, 그 상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도 없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 사건이 불러올 긍정적 감정들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그 두려움 때문에 주인공들은 다가올 사건을 회피하고 남의 일인 양 멀거니 쳐다보고만 있다고 옮긴이는 말한다.
임신이나 결혼 같은 인생의 주요 사건들은 기쁨과 즐거움만큼이나 두려움과 불안도 불러오지만, 사람들은 보통 이를 애써 의식 저편으로 밀어놓곤 한다. 오가와 요코는 이렇게 인지의 밑바닥에 도사리고 숨은 부정적 감정들을 민감하게 파악해 끄집어내고, 일상적인 단어를 새롭게 조합해 만들어낸 생경한 이미지로 이 오묘한 느낌들을 표현한다. 하나하나 공들여 고른 단어들을 쌓아 올려 만든 문장이 오가와 요코 특유의 투명하고 서늘한 정서를 자아내며, 굳이 기교를 부리지 않고 딱 필요한 만큼의 어휘만 사용한 문체는 과하지 않아 오히려 더 선득한 느낌을 가져다준다.
깔끔하고 단정한 문장들에서 느끼게 되는 두려움과 혼란스러움은 오가와 요코만이 그려낼 수 있는 기묘한 세계를 보여준다. 작가의 초기 걸작 단편집 『임신 캘린더』를 통해 독자들은 그녀의 작풍을 이루는 모태인 집요할 정도의 관찰력과 더불어, 일상과 비일상의 모호한 경계를 그리는 오가와 요코 작품 세계의 근원을 탐색할 수 있을 것이다.
■「임신 캘린더」 아쿠타가와상 심사평
극히 평범한 것들 속에서 소름 끼치는 불안이나 공포를 꿰뚫어 볼 수 있었다. 출산을 포함해 그동안 당연히 자연스럽다고 생각한 일들이 이제는 자연스럽지 않다는 시대의 감촉이 소리 높이지 않고도 자연스레 쓰였다는 점에 탄복했다.
_비평가 히노 게이조
그동안의 작품에도 여성의 신체나 먹는 행위에 대한 예민한 감각이 돋보였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그런 면이 특히 잘 드러나 있다. 무엇보다 출산하는 언니와 아직 임신 경험이 없는 동생 사이의 여자만이 감지할 수 있는 세계가 이쪽저쪽 모두 뚜렷하게 드러나 사람을 끌어들이는 힘이 된다.
_소설가 다쿠보 히데오
오가와 요코는 심리의 변천을 꿰뚫어 부드럽게 구상화시킨다. 동생은 언니의 진통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심리적 타격을 입고, 유아기로 퇴행해 환상 세계 속으로 들어간다. 작가는 이를 오묘한 음영의 농담으로 표현해낸다.
_소설가 오에 겐자부로
심사 때마다 나를 항상 곤란하게 했던 투명하고 예민한 문장은 건재했고, 이를 높이 평가해 수상에 동의했다. 이 사람은 작품 하나를 끝낼 때마다 출발점으로 돌아가 다시 힘겨운 여행을 새롭게 시작하는 유형으로 보이는데, 그 부분에 믿음이 간다고 생각했다.
_소설가 요시유키 준노스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