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은이 가사이 기요시(笠井潔)
1948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와코 대학교에 재학 중 좌익 학생운동에 적극 참여했지만, 1972년 일본 전역을 커다란 충격에 빠뜨린 연합적군사건 이후 정치활동을 그만두며 사상적으로 전향한다. ‘연합적군파’로 불린 급진적 운동권 단체의 젊은이들이 자아비판 과정에서 동지 12명을 집단 구타해 죽인 이 비극적인 사건은 이후 그의 작품세계에 상당한 영향을 준다.
정치 이력으로 대학에서 제적당한 뒤, 1974년 파리로 건너가 2년간 지내면서 ‘혁명을 꿈꾸던 인간이 왜 학살을 저질렀는가’ 하는 주제로 장편평론을 고심하던 중 첫 장편소설 『바이바이, 엔젤』을 구상, 초고를 쓰기 시작한다. 현상학 탐정 야부키 가케루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이 소설은 새로운 본격 미스터리의 장을 열었다는 평을 받으며, 1979년 가도카와 서점에서 출간된 그해 제6회 가도카와 소설상을 수상한다. 데뷔작에서 도스토옙스키 소설에서의 인물 간 사상적인 대화식으로 추리하는 탐정, 탐정의 목소리를 빌려 실제 사상가를 모델로 한 인물을 비판하는 방식 등 이 시리즈만의 형식적인 기법을 구축했다면, 1981년 출간한 두 번째 권 『서머 아포칼립스』부터는 보다 소설적인 재미를 더해 더 많은 대중독자를 확보한다. ‘야부키 가케루 시리즈’는 현재 아홉 번째 이야기가 《미스터리》지에 연재 중이며 외전을 포함한 여덟 권이 단행본으로 출간됐다.
1998년 평론집 『본격 미스터리의 현재』 편자로 제51회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수상한 그는 경계를 넘나드는 필력을 자랑하며 평론가·SF소설가 등으로도 활동한다. 2003년 제3회 본격미스터리대상에서 야부키 가케루 시리즈 『오이디푸스 증후군』으로 소설 대상을, 『탐정소설론 서설』로 평론 대상을 수상하며 그해 소설·평론 양 부문을 독식했고, 『탐정소설과 서술트릭』으로 2012년 제12회 같은 상의 평론·연구 부문을 수상한다. 후진 양성에도 힘쓰면서 요네자와 호노부와 사쿠라바 가즈키를 미스터리 전문 출판사인 도쿄 소겐샤에 소개하기도 했고, 곤도 후미에 등의 작가들은 자신의 창작에 가사이 기요시의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한 바 있다.
그 밖에 작품들로는 ‘사립탐정 아스카이의 사건부 시리즈’, 평론집 『테러의 현상학』 『기계 태엽의 꿈』 『8·15와 3·11 : 전후사의 사각』, 그리고 SF소설 ‘뱀파이어 전쟁 시리즈’ ‘거인 전설 시리즈’ ‘심령 전쟁 시리즈’ 등이 있다. ‘스키탐정 오토리 안주 시리즈’를 비롯해 취미인 스키를 소재로 한 책들을 펴내기도 했다.
■ 옮긴이 송태욱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도쿄외국어대학 연구원을 지냈으며, 현재 연세대에서 강의하면서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르네상스인 김승옥』(공저), 옮긴 책으로는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도련님』 『풀베개』, 오에 겐자부로의 『말의 정의』, 히가시노 게이고의 『사명과 영혼의 경계』,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세설』(상.하), 사사키 이타루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가라타니 고진의 『일본 정신의 기원』 『트랜스크리틱』 『탐구』(전 2권),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전 3권), 강상중의 『살아야 하는 이유』, 미야자키 하야오의 『책으로 가는 문』 등이 있다.
일본 추리소설계의 거목 가사이 기요시의 데뷔작 『바이바이, 엔젤バイバイ、エンジェル』이 현대문학에서 출간되었다. 그간 국내에 출간된 여러 장르소설 해설을 통해 문학평론가로서의 가사이 기요시는 꽤 알려졌지만, 그의 소설이 국내에 소개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가사이 기요시가 추리소설을 쓰게 된 배경에는 마르크스주의와의 결별 경험이 있다. 한때 좌익 학생운동에 적극 참여했던 그는 1972년 아사마 산장에서 급진적 좌익 운동권 학생들이 동지 12명을 집단 구타해 죽인 ‘연합적군사건’을 목도한 뒤 큰 충격에 빠지고, 사상적으로 전향한다. 그는 ‘본격 미스터리’가 두 번의 세계대전을 거치며 대량 학살을 경험한 인류가 인간의 존엄성 회복을 추구하면서 발전한 장르라고 여겼다. 때문에 자신의 문제의식을 가장 잘 녹여낼 수 있는 장르가 본격 미스터리라 판단했고, 자신의 분신이자 매력적인 탐정 ‘야부키 가케루’를 창조해내면서 이 작업에 성공한다.
『바이바이, 엔젤』은 1970년대 후반 프랑스 파리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로, 작품 곳곳에서 프랑스 혁명부터 파리 코뮌까지 혁명과 반혁명이 반복되다가 1968년의 혁명이 좌절되며 급진적 좌익 세력들이 과격한 테러를 벌이던 시대적 배경을 읽어낼 수 있다. 가사이 기요시는 탐정과 범인의 대결 속에서 일본 적군파를 비롯해 극좌 세력들이 보여준, 진리 실현을 위해서는 ‘보통 인간’들의 존재가 부정당해야 한다고 생각한 혁명 세력의 모순된 사상을 반박한다.
◇혁명을 꿈꾸던 인간은 왜 학살을 저질렀는가
추리 대결 속에 현대 철학의 뜨거운 논쟁을 담아내다
『바이바이, 엔젤』은 현상학적 추리를 구사하는 탐정 야부키 가케루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시리즈의 첫 권이다. 1979년 가도카와 서점에서 출간된 이 책은 그해 최고의 소설을 뽑는 제6회 ‘가도카와 소설상’을 수상했고, 1986년 ≪문예춘추≫에서 선정한 역대 최고의 동서 미스터리 일본 편에서 54위로 꼽힌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가사이 기요시는 자신이 좋아하는 미국 고전 추리소설 작가 밴 다인을 본떠 “한 점의 예외도 허락하지 않는 본격파적인 캐릭터가 보여주는 드라마”를 만들어가는 즐거움을 중심으로 자신의 작품이 탄생했다고 밝힌다. 그의 말대로 야부키 가케루 시리즈는 미타테 살인(analogical murder), 밀실 상태에서의 불가능 범죄, 사건의 모든 단서를 독자에게 숨김없이 보여주는 유능한 탐정과 왓슨 역의 화자 등 ‘본격 미스터리’의 일관된 특징을 보여준다.
미스터리를 다루는 방식에 있어서는 밴 다인의 영향을 받아 고전 기법에 충실했다면, 사상을 다루는 방식에서는 도스토옙스키의 영향을 받았다고 평가된다. 중학교 때 도스토옙스키의 『악령』 같은 작품을 쓰고 싶었다는 그는 실제 사상가를 모델로 한 등장인물들과 탐정의 사상 논쟁을 추리 대결 속에 포함시켰다. 이를 통해 작가는 본격 미스터리 소설로서의 재미를 놓치지 않는 동시에 현대 철학적 쟁점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드러내는 데에도 성공한다.
◇ 사라진 머리, 수수께끼의 남자 그리고 벌어지는 연쇄살인
놓칠 수 없는 본격 미스터리의 향연이 펼쳐지는 한 편의 드라마
라루스가 살인 사건은 붉은 대문자 I로 서명이 된 협박장이 날아오며 시작된다. 붉은 머리글자의 편지, 붉은 방을 적신 피 웅덩이, 벽에 피로 휘갈겨 쓴 A라는 글자, 『주홍 글씨』, 그리고 찢겨나간 『붉은 죽음의 가면』의 첫 페이지. 범인은 이렇듯 과도할 정도로 ‘붉은색’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고, 야부키 가케루는 범죄에 자신의 의지를 골고루 미치게 하려는 범인의 욕망에서 ‘관념’에 사로잡힌 왜곡된 혁명가의 그림자를 본다. 피의 색으로 얼룩진 연쇄살인의 선정적인 정경은 본격 미스터리가 줄 수 있는 자극적인 두뇌 싸움의 재미를 배가하면서 범인의 성격을 여실히 드러내는 장치 역할을 한다.
본격 미스터리에 빠질 수 없는 명탐정 역할의 야부키 가케루는 신비로운 외모에 수도승 같은 검소한 생활을 하는, 기존의 탐정들과는 다른 독특한 캐릭터다. 무엇보다 현상학적 본질직관이라는 그의 추리 기법이 새롭다. 본질직관이란, 원(圓, circle)의 정의를 모르는 어린아이도 그게 원이라는 걸 직감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야부키 가케루. 탐정은 사건의 진상을 논리적으로 추리하는 게 아니라 직관한다고 말하는 명탐정과 함께 사건을 밝혀나가는 것은 야부키 가케루 시리즈만의 매력이다.
■ 추천사
“탁월한 정밀도로 그려진, 고고한 지고의 탐정 소설.” _니시오 이신(西尾維新), 소설가
“일본 추리 문단에 새로운 한 페이지를 더한, 가사이 기요시의 데뷔 장편.” _다쓰미 마사아키(巽昌章),평론가
■ 책 속으로
“이거 참 심한데.” 바르베스가 엉겁결에 신음 비슷한 소리를 냈다. 경관들은 일순 그 자리에 선 채 움직이지 못했다.
뒤따라 들어온 모가르 경정의 눈에 처참한 광경이 들어왔다. 붉은 색조로 통일된 호화로운 거실 중앙에, 그것 역시 계획된 실내장식의 일부라도 되는 것처럼 신선한 피가 흥건히 괴어 있었다. 그리고 붉은 방 중앙에 있는 피 웅덩이 한가운데에는 외출용 옷을 입고 두 팔을 몸에 딱 붙인 여자의 시체가 엎드려 있었다. 그러나 보는 사람의 속을 메스껍게 하는 것은, 묘하게 뒤죽박죽 조화가 안 되는 그 인상이었다. 세련된 외출복을 입고 똑바른 자세로 엎어져 있는 시체에는 있어야 할 곳에 머리가 없었다. _「제1장 빅토르 위고 거리의 머리 없는 시체」 82쪽에서
“누가 오데트를 죽인 범인일까?”
“루시퍼야.” 드디어 대답한 가케루의 얼굴에는 놀리는 듯한, 재미있어하는 듯한 표정이 언뜻 떠올랐다.
“루시퍼라니?” 앙투안이 허를 찔린 듯 작게 외쳤다.
“루시퍼, 헬스 엔젤(지옥의 천사)이기도 하지……” 가케루가 앙투안의 얼굴을 보고 덧붙였다. 앙투안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딴 데를 보며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 롤링스톤즈의 곡이었다. _「제3장 뤽상부르 공원의 안개」 182쪽에서
“경정님, 창문은 어떻습니까? 7층이지만 창문으로 들어갔는지도 모르잖습니까?”
“창문은 중앙 냉온방이라서 1년 내내 밀폐되어 있네. 밖에서 여는 건 불가능하지. 게다가 자네도 봤잖나. 외벽에는 발을 디딜 곳이 전혀 없어. 옥상에서든 거리에서든 거길 오르내릴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것 같진 않네.”
“그럼 범인은 어떻게 방으로 들어갔을까요? 경정님, 전혀 불가능한 거 아닙니까?” 바르베스는 당혹스러운 신음 소리를 내뱉었다. “최대 용의자인 조제트한테는 알리바이가 있고, 공범자가 있다고 해도 그놈은 방으로 들어갈 수 없지…… 대체 어떻게 된 건지 원.”
모가르 경정은 불가능한 범죄라는 사실이 드러나자 입술을 굳게 다물고 철야로 핏발이 선 눈을 크게 뜬 채 꼼짝하지 않았다. 바르베스는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그저 경정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_「제3장 뤽상부르 공원의 안개」 237쪽에서
그랬을까. 망연히 서 있는 내게 가케루는 계속해서 말했다. “타락천사…… 유리 천사지. 분명히 천사이긴 해도 유리처럼 딱딱하고 차갑고 깨지기 쉬웠거든. 이 세계에서는 천사니까 지옥에 떨어지게 되겠지. 뭔가에 씐 거야.”
내 머릿속에서 롤링스톤즈의 노래 한 구절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리비에르 교수의 서재에서 앙투안이 가케루를 냉소하듯이 휘파람으로 불렀던 노래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었을 때 난 혁명을 보았어 난 황제와 성직자들을 죽였고 아나스타샤는 공허한 비명을 질렀지. _「에필로그 피레네에서 온 편지」 394~395쪽에서
평범한 미스터리의 경우, 범인을 체포하고 범행 동기를 알면 독자는 그것으로 납득한다. 수수께끼가 풀리면 거기서 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사이 기요시의 소설은 그 뒤에 다시 생각거리를 남겨둔다. 트릭에 놀랄 뿐 아니라 사상적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하는 미스터리인 셈이다. 하지만 야부키 가케루의 현상학적 논의나 작중에 그려지는 사상적인 진술에 다소 무거움을 느낀다고 해도 머리 없는 시체의 수수께끼와 이어지는 밀실 상태에서의 폭사와 관련된 트릭을 푸는 것, 그리고 매력적인 캐릭터 야부키 가케루를 만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_「옮긴이의 말」 400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