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충」
시골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삿포로로 떠났던 다쓰로. 결국 사업에 실패하고 낙향해 부모님의 농장 일을 돕는다. 따분한 일상에 위안거리라고는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 옛 연인 시키코와 이따금 몸을 섞는 것뿐. 그러나 대를 이을 손자를 바라는 다쓰로의 아버지가 필리핀 소녀를 며느릿감으로 데려오면서, 영영 계속될 것 같았던 두 사람의 관계에 변화가 찾아온다.
「안개 고치」
아이를 갖지 못한 탓에 결혼 2년 만에 이혼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마키. 돌아가신 어머니의 뜻에 따라 전통 기모노 침선장이 되어 조용히 혼자만의 생활을 꾸려가던 어느 날, 스승 지요노가 쓰러지면서 그녀가 가르치던 어린 제자 야요이까지 떠맡게 된다.
「여름의 능선」
‘착한 할머니는 시어머니가 되고, 온후한 남편은 착한 아들로 변해버렸다.’ 도쿄에서 홋카이도의 시골 마을로 시집온 지 9년. 쉴 새 없이 손자 타령만 늘어놓는 시어머니와 점점 더 바깥으로 나도는 남편, 끝나지 않는 농사일로 숨 막히는 나날을 보내던 교코는 농협 창구에서 우연히 도호쿠로 향하는 페리 여행 팸플릿을 발견하고 마음이 일렁이는 것을 느낀다.
「바다로 돌아가다」
은퇴한 스승의 가게를 이어받아 운영하던 젊은 이발사 게이스케. 계절이 무색하게 눈이 쏟아지던 어느 봄날, 자신의 가게를 찾아온 손님을 보고 묘한 감정을 느낀다. 그녀의 이름은 기네코, 강 건너편 클럽에서 일하는 화류계 여자였다.
「물의 관」
치과 의사인 료코는 자신보다 열다섯 살 많은 클리닉 원장 니시데와 지난 5년간 연인 관계를 유지해왔다. 하지만 최근 둘 사이는 이렇다 할 진전도 변화도 없이 지지부진한 상태에 놓여 있다. 어느 날 시골 마을의 치과 진료소에서 의사를 찾는다는 공고를 본 료코는 충동적으로 그 자리에 지원한다.
「빙평선」
폭력적인 아버지와 무기력한 어머니 밑에서 불우한 학창 시절을 보낸 세이치로. 도쿄대학에 합격해 시궁창 같은 현실에서 벗어나겠다는 일념으로 공부에 몰두하던 그는 어느 밤, 마을 남자들을 상대로 몸을 파는 여자 도모에와 충동적으로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10여 년 후, 지역 세무서장이 되어 돌아온 세이치로는 다시 한번 그녀를 찾아간다.
설충
안개 고치
여름의 능선
바다로 돌아가다
물의 관
빙평선
옮긴이의 말
■ 지은이_ 사쿠라기 시노
1965년 일본 홋카이도 구시로시市에서 태어났다. 중고교 시절, 문예반에서 활동하며 홋카이도 출신 여류 작가 하라다 야스코의 『만가』를 접하고 문학에 눈을 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재판소 타이피스트로 근무하다가 스물네 살에 결혼하면서 전업주부가 되었다. 남편의 전근을 따라 구시로, 아바시리, 루모이 등 홋카이도 각지를 전전하며, 오래전 하라다 야스코가 소속되어 있던 문예지 《홋카이 문학》의 동인으로 다시 소설을 공부한다. 북녘 혹한의 홋카이도는 사쿠라기 문학의 밑바탕이 되어 작품 대부분이 홋카이도, 특히 구시로시 주변을 무대로 하고 있다.
2002년 단편 「설충」으로 제82회 올요미모노신인상을 수상하고 2007년에 첫 소설집 『빙평선』을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집필 활동에 들어갔다. 2013년 『러브리스』로 제19회 시마세연애문학상을 수상. 그리고 같은 해, 신인상 수상으로부터 10여 년 만에 『호텔 로열』로 제149회 나오키상을 수상했다.
첫 작품부터 성性에 대한 거침없는 묘사를 펼쳐 ‘신新관능파’라고 명명되었으나, 인간의 본능적인 행위로서의 비애를 묘사했을 뿐 그것이 핵심은 아니라고 밝힌 바 있다. 다른 작품으로 『풍장』(2008), 『유리 갈대』(2010), 『굽이치는 달』(2013), 『별이 총총』(2014) 등이 있다.
■ 옮긴이_ 양윤옥
일본 문학 전문 번역가. 2005년 히라노 게이치로의 『일식』으로 일본 고단샤에서 수여하는 노마문예번역상을 수상했다. 사쿠라기 시노의 『호텔 로열』 『굽이치는 달』, 히가시노 게이고의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악의』 『유성의 인연』『위험한 비너스』『그대 눈동자에 건배』,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 『여자 없는 남자들』, 스미노 요루의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등 다수의 작품을 우리말로 옮겼다.
나오키상 수상 작가 사쿠라기 시노의
기념비적 데뷔작
단조롭지만 선명하다. 차갑지만 생생하다. 사쿠라기 시노의 작품을 읽고 있노라면 이런 감각에 사로잡힌다. 색채를 잃어버린 대지와 하늘의 표정이, 공허함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이들의 체온이 분명하게 전해져온다. 그녀의 글은 독자의 마음을 북으로 북으로 이끈다.
_다키이 아사요(작가)
2013년 『호텔 로열』로 나오키상을 수상한 사쿠라기 시노의 첫 소설집 『빙평선』(2007)이 양윤옥의 번역으로 현대문학에서 출간되었다. 2002년 단편 「설충」으로 올요미모노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한 그녀는 줄곧 자신이 나고 자란 고향 홋카이도의 정경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을 세밀하게 포착하여 작품에 담았고, 『풍장』(2008), 『유리 갈대』(2010), 『러브리스』(2011), 『굽이치는 달』(2013)을 비롯해 열일곱 권의 단행본을 발표했다.
사쿠라기 시노의 소설은 지역적 특색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풍부한 묘사, 지나치게 기교를 부리지 않는 정직한 문장, 인간 내면의 고독을 읽어내는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지난 수년간 문단에서 큰 주목을 받아왔는데, 『빙평선』은 이렇듯 확고한 색깔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펼쳐 침체된 일본 문학계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는 그녀의 생애 첫 단행본이다. 등단 후 오랫동안 출판 기회를 얻지 못했던 사쿠라기 시노는 5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등단작 「설충」이 수록된 첫 소설집 『빙평선』을 내놓았고, 이 책이 호평을 받은 덕분에 본격적인 작가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빙평선』은 “내가 살아온 땅과 그곳 사람들의 이야기를 쓴다”는 그녀만의 방향성을 드러내어, 이후 발표한 모든 소설들의 토대가 된 작품일 뿐만 아니라, 사실상 ‘소설가’ 사쿠라기 시노의 존재를 대중에게 처음 각인시킨 작가 이력의 ‘원점’이나 다름없다. 표제작을 포함, 총 여섯 편의 단편이 수록된 이 책은 홋카이도, 그중에서도 동쪽의 해무海霧 도시 구시로를 중심으로 겨울이면 유빙으로 뒤덮이는 오호츠크해 연안 마을과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본다.
우리는 모두 무언가에 얽매이고 짓눌린 채 살아간다―
압도적 필력으로 생의 문제를 담아낸 여섯 편의 걸작 단편
소설의 주 무대인 최북단 홋카이도는 대자연의 신비를 고스란히 간직한 땅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오랜 세월 엄혹한 환경에 맞서 터전을 일구어온 주민들의 고단한 삶이 자리하고 있다. 『빙평선』은 한겨울 얼어붙은 대지만큼이나 척박한 삶 속에서 필사적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을 그린다. 젊은 시절 꿈을 좇아 대도시로 나갔다가 빈손으로 낙향한 뒤 불륜으로 공허함을 달래는 연인, 이혼 후 전통 기모노 침선장이 되어 담담하게 새 삶을 개척해가는 여자, 부당한 시집살이와 남편의 무심함을 견디며 불행한 결혼 생활을 지속해온 아내, 자신의 가게를 찾은 창녀와 사랑에 빠진 젊은 이발사, 애인과의 지지부진한 관계를 청산하기 위해 시골 부임을 자처한 치과 의사, 폭압적인 아버지로부터 도피하듯 관계를 맺었던 여자와 10여 년 만에 재회한 남자…….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개인의 의지만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견고한 굴레에 얽매여 있는 인물이다. 현실에 안주하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타인의 몸이 주는 온기에서 탈출구를 찾기도 한다. 첫 작품부터 성을 거침없이 묘사하여 ‘신新관능파’로 명명되었던 사쿠라기 시노답게 적나라한 묘사들이 적잖이 등장하지만, 실상 그 핵심에 있는 것은 ‘열정’이 아니라 엄혹한 현실로부터 도피하려는 자의 ‘비애’ 혹은 ‘체념’에 가깝다.
그러나 태어난 장소와 시대, 가족에 의해 규정되어, 거기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는 등장인물들의 인생이 때로 답답하고 안타깝게 느껴지기는 해도,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작가가 그리고자 한 것이 ‘불행’ 그 자체가 아니라 불행 속에서도 어떻게든 살아나갈 길을 찾아내고야 마는 인간의 ‘강인함’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작중 인물들 중에는 속박을 벗어던지고 탈출에 성공하는 인물이 있는가 하면 주어진 현실을 수용하고 그 안에서 조금이나마 나은 방향을 모색하는 인물도 등장하는데, 그들을 마주했을 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산다’라는 자포자기의 심정이 아니라, ‘어떻게든 산다’라는 작지만 확고한 의지이다. 『빙평선』에는 특히 모진 환경 속에서 서로 연대해 자신의 삶과 가족, 이웃을 떠받치는 여성들의 모습이 자주 그려진다. 시골의 폐쇄적 관습 아래서 약자일 수밖에 없는 여성들이 자신을 옭아매는 과거를 잘라내고, 지지부진한 남녀 관계에 종지부를 찍고, 우유부단한 남성들을 일깨우고, 때로는 무서울 만큼 단호한 결단으로 인생길을 바꾸는 모습은 인상적이다 못해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사쿠라기 시노는 누구의 삶에나 존재하는 보편적인 질곡을 농밀한 문장과 홋카이도라는 독특한 풍광 속에 담아 한 폭의 풍경화처럼 선명하게 그려냈다. 『빙평선』은 사쿠라기 문학의 출발점을 보여주는 기념비적인 작품이자, 이후 그녀의 소설을 조명하고자 할 때 반드시 거론해야 할 귀한 자료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