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거리 ●
인기 소설가 히다카 구니히코가 자신의 작업실에서 사체로 발견된다. 후두부에는 둔기로 맞은 흔적이 있고, 전화코드가 그의 목을 감고 있었다. 사체를 발견한 사람은 히다카의 젊은 아내와, 친구이자 아동문학작가인 노노구치 오사무. 만날 약속을 하고 찾아온 노노구치가 사건을 담당하게 된 사람은 한때 노노구치와 과거에 같은 직장에서 근무한 인연이 있는 가가 교이치로 형사. 그는 노노구치가 사건에 관한 수기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 수기를 토대로 사건을 수사하던 중 노노구치의 알리바이가 조작되었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히다카를 살해한 범인은 바로 노노구치였던 것이다. 그러나 노노구치는 체포된 뒤에도 작가로 데뷔하는 데 도움을 준 친구를 왜 살해했는지에 대해서는 침묵만 지킨다. 그의 석연치 않은 태도에 가가 형사는 사건의 이면에 또 다른 진실이 있음을 감지한다. 가가의 집요한 탐문과 조사를 통해 점차 드러나는 두 친구의 과거. 거기에는 아무도 예상치 못한 충격적인 진실이 숨죽이고 있었다.
본문에서 ●
“외출할 때 항상 문을 잠가둡니까?” 내가 물었다.
그녀는 열쇠를 꺼내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요즘에는 거의 문을 잠근 적이 없어요.”
열쇠를 꽂고 그대로 문을 열었다. 작업실도 불이 꺼져 있었다. 하지만 완전히 어두운 건 아니었다. 컴퓨터를 끄지 않았는지 데스크톱의 모니터 화면이 빛을 뿜고 있었다.
리에 씨는 손으로 벽을 더듬어 형광등 스위치를 올렸다.
작업실 한가운데, 다리를 이쪽으로 향하고 쓰러져 있는 히다카의 모습이 보였다.
영 점 몇 초쯤 공백의 시간이 흐르고 리에 씨가 말없이 히다카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그녀는 중간쯤에서 발을 멈추고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온몸이 굳어버렸다. 그사이에 한마디도 말을 하지 않았다.
나도 멈칫멈칫 다가갔다. 히다카는 엎드린 상태로 고개를 틀어 왼쪽 옆얼굴을 내보이고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이미 죽은 자의 눈빛이었다.
“죽었어…….” 나는 중얼거렸다.
_ 「사건」 2 / 33쪽에서
“이런 경험은 아마 내 인생에 다시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어떤 형태로든 기록을 남겨두기로 했어. 일종의 작가 근성이라고 해도 좋겠지.”
그러자 가가는 잠시 생각을 더듬듯이 침묵한 뒤에 이렇게 말했다.
“그걸 좀 보여주시면 안 될까요?”
“보여주다니, 자네한테? 아니, 누구한테 보여주려고 쓴 글이 아닌데.”
“부탁합니다.” 그는 머리를 숙였다. 마키무라 형사도 옆에서 똑같이 하고 있었다.
“엇, 이러지들 말고. 길에서 절을 받으면 내가 민망하지. 게다가 지금까지의 기록은 이미 자네에게 다 말한 내용이야.”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_ 「사건」 5 / 69쪽에서
노노구치 오사무가 이번 사건에 대해 수기를 쓰고 있다는 것은 정말 뜻밖의 일이었다. 만일 그가 범인이라면 사건의 세세한 부분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그런 글쓰기는 결코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수기를 읽는 사이에 그런 생각이 완전히 반대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수기는 그야말로 논리정연한 글이었다. 그리고 논리정연한 기록은 강한 설득력을 갖는다. 읽다 보면 그 내용이 반드시 진실이라고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어느 틈에 깜빡 잊어버리는 것이다. 바로 거기에 노노구치 오사무의 노림수가 숨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_ 「의혹」 / 92쪽에서
“자수하는 것도 가능할까?”
가가 형사의 눈이 둥그레졌다. 그 뒤에 그는 딱 한 번 고개를 저었다.
“안타깝지만 이 단계에서는 자수가 인정되지 않아요. 하지만 공연한 저항을 하신다면 별로 득은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 어깨의 힘이 스르르 빠져나갔다. 절망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감을 느꼈다. 이제 더 이상 연극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_ 「해결」 / 120~121쪽에서
노노구치 오사무의 그 설명은 어느 면에서 논리적으로 맞는 말이기는 했다. 하지만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왜 좀 더 일찍 말하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병으로 쓰러지기 전까지 그는 이 건에 대해 계속 묵비권을 행사했던 것이다. 병으로 입원하면서 한동안 취조받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사이에 변명을 모색했던 게 아닌가 하는 게 내 추리였다. 하지만 현시점에서 그것을 증명하기는 어려웠다.
_ 「추급」 / 135~136쪽에서
내가 지금 이렇게 고백의 글을 쓰고 있는 것은 그 같은 경위 때문입니다. 아마도 타인에게 읽히는 것을 목적으로 이만큼 긴 글을 쓰는 건 이것이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말하자면 최후의 작품인 셈입니다. 그걸 생각하면 한 마디 한 문장도 허술하게 쓸 수는 없다는 마음이 들지만, 유감스럽게도 표현 방법에 대해 고민할 만큼의 시간적인 여유는 없을 것 같군요.
_ 「고백」 / 207쪽에서
지은이 히가시노 게이고東野圭吾 ●
일본 추소설계를 대표하는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
대학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하고 졸업 후 엔지니어로 일하다 1985년 『방과 후』로 제31회 에도가와란포상을 수상하면서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이과적 지식을 바탕으로 기발한 트릭과 반전이 빛나는 본격 추리소설부터 서스펜스, 미스터리 색채가 강한 판타지 소설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장르의 작품들을 꾸준히 발표해왔다. 이 중 상당수의 작품이 영화와 텔레비전 드라마로 제작되어 큰 사랑을 받았다. 대표작으로 『비밀』(제52회 일본 추리작가협회상) 『용의자 X의 헌신』(제134회 나오키상, 제6회 본격미스터리대상)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제7회 주오코론문예상) 『몽환화』(제26회 시바타렌자부로상) 『기도의 장막이 내려질 때』(제48회 요시카와에이지문학상) 『그대 눈동자에 건배』 『위험한 비너스』 『백야행』 『유성의 인연』 <라플라스 시리즈> <매스커레이드 시리즈> 외 다수가 있다.
옮긴이 양윤옥 ●
일본 문학 전문 번역가. 2005년 히라노 게이치로의 『일식』으로 일본 고단샤에서 수여하는 노마문예번역상을 수상했다. 사쿠라기 시노의 『호텔 로열』 『별이 총총』,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오쿠다 히데오의 『남쪽으로 튀어』, 스미노 요루의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히가시노 게이고의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그대 눈동자에 건배』 『위험한 비너스』 『유성의 인연』 <라플라스 시리즈> <매스커레이드 시리즈> <가가 형사 시리즈> 등 다수의 작품을 우리말로 옮겼다.
최근 10년간 한국인이 가장 사랑한 소설가(교보문고 2019년 1월 집계), 히가시노 게이고의 대표작 <가가 형사 시리즈>가 한국 출간 10여 년 만에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독자들을 만난다.
냉철한 머리, 뜨거운 심장, 빈틈없이 날카로운 눈매로 범인을 쫓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에 대한 따뜻한 배려를 잃지 않는 불세출의 형사 가가 교이치로. ‘가가 형사’는 시리즈 캐릭터 사용을 최대한 자제하는 히가시노가 이례적으로 30년 가까이 애정을 쏟으면서 성장시킨 인물로, 작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캐릭터이자 그의 페르소나라고 불린다.
1986년, 20대 후반의 풋풋한 신인 작가 히가시노가 자신의 두 번째 책인 『졸업』에서 처음 등장시켰던 대학생 ‘가가 교이치로’는, 이후 『잠자는 숲』(1989)에서 형사로 변신해 10권의 작품에서 활약한다. 각 권에서 가가가 형사로서 성장하는 모습은 곧 그를 탄생시킨 추리소설가 히가시노의 변화, 발전을 보여주는 하나의 지표로서 기능한다. 탄탄한 트릭의 재미를 선사하는 『졸업』에서 시작하여, 히가시노표 로맨틱 미스터리의 첫 주자인 『잠자는 숲』, 마지막까지 범인의 정체가 밝혀지지 않는 전무후무한 구성의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1996) 등 초기 작품군에서는 가가의 놀라운 추리력 속에서 작가의 거침없는 발상과 솜씨를 맛볼 수 있다. 또한 90여 권에 이르는 히가시노 전 작품을 통틀어 최고의 걸작 중 하나로 꼽히는 『악의』(1996)에서 ‘인간의 심리를 가장 완벽하게 꿰뚫는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추리소설을 쓰는 독보적인 작가로서의 면모를 확고히 보여주었으며, 나오키상 수상 이후의 첫 작품인 『붉은 손가락』(2006)에서 사회파 미스터리의 대가로 불리는 히가시노 문학이 정점에 이르렀음을 실감할 수 있다.
이번에 현대문학에서 새롭게 선보인 <가가 형사 시리즈> 개정판은 ‘가가 형사’의 대학 시절부터 네리마 경찰서 소속 형사 시기까지를 다룬 7권의 작품을 아우른다. 개정판에서 옮긴이 양윤옥은 10여 년 전 자신의 번역을 대대적으로 수정, 보완했는데, 시대의 흐름에 따라 바뀐 한글어문규정을 적용하고 기존 판본의 크고 작은 오류를 바로잡은 것은 물론, 권별로 문장 전체를 3,000군데 이상 다듬어 읽는 맛을 온전히 느낄 수 있도록 했다. 아울러 각 권에 대한 기발한 해석이 빛나는 그림작가 최환욱의 표지화로 시리즈로서의 통일성을 더하여 소장 가치를 높였다.
그의 미스터리에는 평범한 삶 속의 뒤틀림을 아프게 바라보는 공감이 있고, 명랑하지만 섣부르지 않은 희망이 있다. 잔혹함에의 호기심이나 배배 꼬인 내성적 기척은 과감히 생략하는 선 굵은 전개, 추리에의 진지한 실험, 현실을 단단히 짚고 선 치밀한 상상력이 세계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일 것이다. 내가 했던 번역 문장을 한 줄 한 줄 수정하면서 말은 시간과 함께 거듭 태어난다는 것을 실감했다. 가가 형사 이야기는 이번 개정판으로 신기하게도 바로 오늘을 사는 소설로 부활했다. 한달음에 세월을 건너뛰는 기적, 히가시노 게이고였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 독자에게 성큼 옮겨온 책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_ 옮긴이 양윤옥, <가가 형사 시리즈> 개정판에 부쳐
도서 소개 ●
베스트셀러 작가의 죽음을 둘러싼 쫓고 쫓기는 두뇌게임
끈질긴 추적 끝에 드러나는 추악한 진실, 그 지독한 악의
인간의 마음속 어두운 이면을 파헤치는
히가시노 게이고 문학의 최고봉
『악의』는 <가가 형사 시리즈> 3번째 작품으로, 히가시노 게이고의 초기 대표작이자 많은 미스터리 팬들의 필독서 겸 입문서로 사랑받는 소설이다. 『악의』에서는 번뜩이는 두뇌와 끈기를 자랑하는, 완성형의 가가 교이치로를 만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 과목 교사였던 그가 어째서 교직에서 물러나 경찰의 길을 걷게 되었는지, 개인사를 엿볼 수 있다.
한 인기 작가의 죽음에 얽힌 기나긴 악의의 여정을 탐구해가는 본 작품에서 히가시노는 미스터리 작가로서 절정의 솜씨를 선보인다. 일찌감치 범인의 정체를 공개한 후 살인의 진짜 동기와 방법에 대한 수수께끼를 던지면서 독자와의 정면 대결을 펼친 것. ‘범인은 누구인가’보다 ‘왜, 어떻게 범죄를 저질렀는가’에 집중하는 작가 특유의 화법은 살인사건의 관계자, 수사관의 수기, 주변인의 증언과 회상이라는 각자의 ‘기록’로 이루어진 독특한 구성에서 효과가 극대화된다. 조금만 시선을 틀면 완전히 의미가 바뀌는 그림을 보는 것처럼, 수사 과정에서 몇 번이고 맞이하는 반전은 독자로 하여금 책을 내려놓을 수 없게 만든다.
“어떤 일이나 감정, 사유, 시간의 흐름 같은 것을 멈춰 세워 길이 남겨두려고 인간은 기록한다. 픽션 또한 틀림없는 ‘기록’의 하나. 이 책은 ‘기록’ 그 자체를 주제로 삼고자 기획한, 장대한 미스터리다.” (기리노 나쓰오)
『악의』는 ‘기록’을 통해 전개된다. 그리고 그 기록이 모두 진실을 향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작가는 독자에게 분명하게 알리고 공정한 두뇌 싸움을 시작한다. 자기 연민에 빠진 범인의 글과 감정을 배제한 담백한 형사의 기록, 서로 다른 개성을 가진 두 종류의 글을 번갈아 보면서 독자들은 시험에 빠진다. 증언과 기록의 함정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지, 또 그 안에 숨겨진 진실을 어디까지 가려낼 수 있는지를. 추리소설계의 제일인자라 불리는 명성에 걸맞게 히가시노 게이고는 이번 작품에서도 긴박감 넘치는 사건 전개와 흡인력, 허를 찌르는 반전과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이 어우러진 문학적 감동으로 다시 한번 독자들을 사로잡는다. 그리고 서서히 밝혀지는 살인의 동기와 그 이면에 숨은 인간의 깊은 어둠, 반전의 미학은 독자들이 미스터리 소설에 기대하는 전율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준다. 어느새 드러나는 사건의 진상은 독자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가의 대표작답게, 범인의 악의는 공포와 함께 묘한 공감을 동시에 안겨준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말할 입을 빼앗겨버린 선의(善意)가 음습하고 치밀한 악의(惡意)에 의해 철저히 말살되는 데 대한 분노가 가가 형사의 가슴속에 회오리바람 같은 열정을 불러일으키지 않았을까. 아무 이유도 없는 악의, 그 악의의 이유를 파헤쳐 선의의 제자리를 찾아주기 위해서 가가 형사는 온갖 수고를 마다하지 않은 것이리라. 역시나 가가 형사는 ‘우리의 영웅’이다! _ 「옮긴이의 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