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책에 대하여
2012년 4월호부터 11월호에 이르기까지 『현대문학』에 총 8회에 걸쳐 절찬 연재되었던 김숨의 『여인들과 진화하는 적들』이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출간을 앞둔 지난겨울 EBS ‘라디오 연재소설’의 연재작으로 선정되어 전편이 낭독된 이 작품은 청취자들의 뜨거운 호응을 얻으며 출간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
김숨은 1997년 『대전일보』, 1998년 『문학동네』로 등단했다. 그 뒤 세 권의 소설집과 다섯 권의 장편소설을 상자했다. 발표되는 작품들마다 폭력에 대한 공포와 불안, 감시에 대한 두려움, 실존의 고립감과 무기력, 자본주의 사회의 분열의 징후 등을 섬뜩하고 예리한 시선으로 포착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으며 각종 문학상의 강력한 후보로 거론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2012년 장편소설 『노란 개를 버리러』로 <허균문학상>을, 2013년에는 단편소설 「그 밤의 경숙」으로 <현대문학상>을 수상해 그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여인들과 진화하는 적들』은 그동안 보여왔던 김숨 특유의 소설세계를 잇는 동시에 더 한층 넓고 깊은 시선으로 자기 세계를 확장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작품에서 김숨은 유령처럼 살아갔던 대한민국의 수많은 어머니들을 복원해낸다. 그 ‘어머니’는 우리가 그간 ‘훼손될 수 없는 영역’으로 규정했던 것들이 얼마나 심각하게 경제적 가치에 침윤되어 존재의 가치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우리를 오늘날의 현실 자체와 대면하게 한다. 적을 만났을 때 카멜레온의 일시정지처럼 화석이 되어 자신을 보호하는 시어머니, 언제든지 교체 가능한, 일회용품처럼 쓰이고 버려지는 저임금의 하위 서비스직 종사자 며느리, 자신 이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그 무엇에도 관심을 두지 않는 아들이자 남편, 그들의 가족 해체의 과정을 섬뜩할 만큼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출산 예정일을 닷새 앞둔 날까지 마을버스에, 지하철을 두 번이나 갈아타고 출퇴근을 해야 했으며, 크래커를 녹이며 입덧을 견뎌야 했던’ 며느리를 통해 인간 감정을 상품화하는 자본주의의 병폐를 가시화한다. 시어머니의 건강보다 발병이 야기하게 될 비용 문제를 먼저 고민하고, 직장생활 때문에 동거를 시작했던 시어머니를 자신의 퇴직과 함께 불필요한 잉여노동력으로 해석하는 그녀의 속물성은 자본의 거센 압력에서 필사적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생존전략이다. 김숨은 『여인들과 진화하는 적들』에서 그녀를 경유하면서 어떻게 인간의 감정이 화폐가치로 환원되는가가 아니라 감정의 상품화가 개별 인간을 어떻게 파괴하고 그 사람이 맺는 사회적 관계들을 어떻게 왜곡하는가를 짚어낸다.
▲ 줄거리는
두 여자가 있다. 침이 말라가는 여자(시어머니)와 홈쇼핑 콜센터에서 일회용품처럼 쓰이다 버려진 여자(며느리). 그녀들의 동거는 5년 전, 홈쇼핑 콜센터 전화상담원으로 일하는 며느리를 대신해 아이를 돌보기 위해 시어머니가 며느리의 집으로 들어오면서부터다. 일반적 시선에 의하면 두 여자는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관계로 맺어져 있다. 하지만 소설에서 그와 같은 일반적 속성은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그런 속성을 지워버린 원인은 돈이다. 전화상담원으로 일하면서 따뜻한 인간성을 상실하고 기업이 요청하는 감정만을 강요받던 며느리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우울과 수치심, 열등감, 타인을 향한 적대적인 감정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감정은 그녀에게 잉여적인 존재로 전락한 시어머니에 대한 분노와 짜증으로 표출된다. 며느리는 침이 고갈되는 구강건조증으로 고생하는 시어머니를 향해 자주 ‘침’ 같다고 말한다. 며느리에게 침은 하등 중요할 것 없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보잘것없고 하찮은 것의 다른 이름이다. (‘뱉어버리는 게’ 바로 침이다.)
이런 며느리의 모욕에 대해 시어머니가 대응하는 존재방식은 화석이 되어 자신을 보호하는 것. ‘화석인류’를 자처하면서까지 얻고자 하는 것은 인류 최초의 인간이자 여성인 루시, 즉 최초의 어머니로 돌아가는 것이다. 왜 하필 마르는 것이 침인가, 하는 것에 대한 해답이 여기에 있다. 입안의 침이 마르면서 시어머니의 몸 또한 침처럼, 어쩌면 침보다 더 말라간다. 마르면서 점점 인류 최초의 인간이자 여성인 루시를 닮아간다. 루시와 침이 상징하는 바는 동일하다. 동물적인 모성애로 대표되는, 루시가 살았던 시대의 가치관으로 돌아가는 것. 더럽고 하찮은 것처럼 보이지만 자연 진통제가 함유된, 인체에서 없어서는 안 될 침처럼 ‘신장이 고작 1미터밖에 안’ 되었던 루시는 그러나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이다. 루시가, 혹은 루시로 상징되는 모성성이 없었다면 인류는 존재하지 않았다. 외관은 차츰 루시를 닮아가는데 그러나 침이 마르고 있다! 며느리의 모욕이 가중될수록 시어머니의 입속 침 역시 점점 더 말라간다. 루시 시대의 가치관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시어머니의 열망이자 선택은 급기야 공사현장 구덩이 속에 들어가 눕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극대화시킨다.
종의 번식률을 높이기 위해 가능한 한 많은 자손을 낳고자 하는 R전략가인 시어머니와 치열한 종내 경쟁을 뚫기 위해 최소의 자손만 낳겠다는 K전략가인 며느리의 공존은 가능할 것인가. 시어머니를 향해 모욕의 말을 던지는 며느리의 모습은 추하기보다는 오히려 서글프다. 그것은 며느리의 운명 역시 옆집이나 아랫집 혹은 한 골목에 살고 있는 이웃쯤 되는 화석인류의 삶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여인들과 진화하는 적들』이 우리를 깊이 공감하게 하는 것은 이 책의 작가가 화석이 되어가는 ‘오늘’ 우리시대의 슬픈 초상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섬뜩하면서도 예리하게 인간의 내면을 파헤치고 있다.
▲ 본문 중에서
한때나마 그녀는 여자와 자신이 공생共生관계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함께 산 지 석 달까지는 그랬다. 서로가 너무 다르지만, 필요에 의해 서로 도우면서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피치 못할 관계. 지의류라던가. 균류와 녹조류가 상리공생적 결합을 하고 있다는 식물이……. 다른 한쪽 없이는 나머지 한쪽도 살아가는 게 불가능할 만큼 밀접하게 결합해, 하나의 식물처럼 보인다는 이중생물. 생물 쪽 상식이라고는 약육강식과 이기적 유전자, 멸종과 진화 정도인 그녀가 지의류라는 식물의 이름까지 기억하고 있는 것은, 이중인격도 아니고 이중생물이라는 말이 재미있어서였다.
“이중생물이라고 아세요?”
“…….”
“둘이자 하나인 결합생물 말이에요.”
“…….”
“밝혀지지 않은 이중생물이 얼마든지 있을지 모른다지 뭐예요.”
“…….”
“너무 꼭 결합해 하나의 생물처럼 보이는 이중, 다중생물 말이에요.”
“인간도 그런지 모르지…….”
“인간이 뭐요?”
“알고 보면 인간도 그 이중…… 생물인지…… 뭔지…….”
“어머니도 참, 무슨 엉뚱한…….”
그녀는 코웃음을 쳤다.
“네 입으로 그러지 않았냐.”
“……?”
“밝혀지지 않은 이중생물이 있을지 모른다고 네 입으로…… 얼마든지…….”
“아무리 그래도 설마 인간이 이중생물이겠어요.”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밝혀지지 않았다 뿐이지…… 어쩌면…….”
여자가 상반신을 일으키더니 등을 구부정히 말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석고상처럼 아무 움직임이 없었다. 뭐야? 혹시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그러나 그녀는 여자가 그저 이중생물이 뭔지 전혀 이해 못하고 엉뚱한 소리를 한 것뿐이라고 이해하고 싶었다. 인간처럼 이기적인 존재가 이중생물이라니…… 말이 되는가? 그녀는 다른 종들은 얼마든지 이중생물이 될 수 있어도, 인간만은 결코 이중생물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십여 분이 흐르도록 여자는 꼼짝하지 않았다. 저대로 잠들기라도 했나 싶었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여자의 눈이 단추가 떨어진 구멍처럼 멍하니 벌어져 있었던 것이다. 종종 여자는 저렇게 심장과 피가 굳은 듯 미동조차 없이 거실 바닥이나 식탁 의자, 소파에 앉아 있고는 했다. 소리 없이, 움직임 없이, 있는 듯 없는 듯, 붙박이 가구처럼 가만히 존재할 뿐인데 그녀는 여자가 몹시 거슬렸다. 그러고 보니 존재하지 않는 듯 존재할 때, 여자의 존재가 그녀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 무겁고 부담스럽게 다가왔다. 차라리 설거지나 걸레질을 할 때, 나물을 무칠 때 여자의 존재감이 덜 느껴졌다.
- pp. 140-142
“그러고 보면 동물들이 서로의 상처를 혀로 핥아주는 행위가…….”
“혀로 핥아주는 행위가, 뭐요?”
“상처를 혀로 핥고 핥아 침…… 침을 발라주는 행위가…… 외려 고등한 행위가 아닌가 싶다…….”
“고등이요?”
“하등한 행위가 아니라…… 고등한…….”
말인즉, 동물들이 서로의 상처를 혀로 핥는 행위가 높은 차원의 행위라는 소리가 아닌가. 여자의 괴상한 논리와 주장에 그녀는 수긍은커녕 반발심이 일었다. 아이의 이마에 난 종기, 그 종기에 침을 바르던 여자의 행위가 또다시 그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애써 잊고 넘어가려 했던, 불결하고 미심쩍을 뿐 아니라 의뭉스럽기 짝이 없던 여자의 행위가.
“어머니 논리대로라면, 침팬지가 인간보다 고등하다는 거예요?”
“…….”
“동물 중 그나마 지능이 높다지만, 인간의 지능에는 훨씬 못 미치는 침팬지가 말이에요.”
“고등한 면도 있지 않겠냐……?”
“침팬지가 인간보다 고등한 면도…… 개미도, 물고기도, 나비도, 벌도…… 연구해보면 인간보다 월등한 면이…….”
“어떤 면이 인간보다 월등한데요?”
그녀는 굳은 얼굴로 여자를 직시했다.
“말했지 않았냐…… 서로의 상처를 혀로 핥아주는 행위만 해도…….”
“약품을 개발해 상처에 바르는 인간이 고등한 게 아니라요?”
“맛을…… 그렇지…… 단맛…… 쓴맛…… 어디 그뿐이냐…… 신맛과 짠맛…… 죄다 귀신같이 느끼는 혀로…… 긁히고 까진 상처를 느끼면서…… 상처가 아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혀로 핥고…… 또 핥는 것하고…… 약을 바르고 마는 것하고…….”
그녀는 더 이상 잠자코 듣고 있을 수만 없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려 했지만, 욕지기 같은 분노가 치밀었다.
“그래서 그러신 거예요?”
“……?”
“그래서, 민수 이마에 난 종기에 더럽게 침을 바르신 거예요?”
“…….”
“아예 혀로 핥아주지 그러셨어요.”
“혀로 말이냐……?”
“침이 흥건히 묻도록 혀로 핥아주시지 그러셨어요.”
여자가 주춤주춤 웅크려 앉은 자세 그대로 아이를 향해 돌아앉았다. 허기진 짐승이 눈앞의 먹잇감을 바라보듯 위태로운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았다.
- pp. 222-224
관棺처럼 길고 네모나게 판 구덩이 속에 사람이 누워 있었다. 웬 여자가……. 포클레인 삽날 자국이 선명한 구덩이 속에 웬 여자가 들어가 누워 있나 했더니, 여자였다. 두 손을 가슴께에 모으고 두 눈을 꼭 감고 있었지만 시어머니인 여자가 틀림없었다. 백발의 머리카락이 풀어헤쳐져 여자의 얼굴과 목, 가슴을 실뿌리처럼 뒤덮고 있었다. 그러쥔 여자의 두 손은 땅을 뚫고 올라온 알뿌리 같았다.
“치매 걸린 노인넨가 봐.”
“구덩이로 들어가는 걸 내가 봤다니까.”
“어디 사는 할머닌가?”
“구덩이 속에는 왜 들어가시냐고 아무리 물어도 들은 척도 안 하시더라니까.”
사람들이 앞뒤 없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그녀의 귀에 환청처럼 들렸다.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광경 앞에서 그녀는 할 말을 상실한 채 넋 놓고 서 있었다. 여자가 어째서 구덩이 속에 들어가 누워 있는 것인지 헤아릴 정신이 없었다. 도망치듯 그곳을 뜨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301호 여자와 502호 남자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저 젊은 여자가 며느리예요.”
301호 여자가 수군거리는 소리가 그녀에게 들렸다. 일순 정적이 감돌았다. 구덩이를 중심으로 모인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그녀는 구덩이 속 여자가 자신은 전혀 모르는 여자라고,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이나 마찬가지라고 사람들에게 소리 지르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자신이 아무리 부정해도 사람들이 믿어주지 않으리란 걸 알았다. 여자가 이상한 사람이 된 마당에, 하나 마나 한 소리를 해서 자신마저 이상한 사람이 될 수는 없었다.
“잠들었나?”
“꺼내드려야 하는 거 아니야?”
502호 남자가 당장 팔을 걷어붙이고 구덩이 속으로 뛰어들 듯 굴었다.
“구덩이가 꽤 깊은걸.”
“그러게, 할머니가 저길 어떻게 들어가셨대?”
그녀에게는 구덩이가 천 길 낭떠러지처럼 깊어 보였다. 아무리 손을 멀리 뻗어도 닿을 수 없을 만큼 깊은 곳에 여자가 누워 있는 것 같았다.
“어떻게 좀 해봐요.”
301호 여자가 그녀의 어깨를 쳐왔다.
“구경만 하고 서 있을 건가?”
“119라도 불러야 하는 거 아니야?”
뒷걸음질 치고 싶은 욕구를 간신히 억누르고 그녀는 구덩이로 바짝 다가섰다. 그녀의 발에 차인 흙뭉치가 구덩이 속 여자의 가슴께로 떨어졌다. 어떤 조치를 취할지, 사람들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자신을 주시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구덩이에 대고 모기만 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거기서 뭐하시는 거예요?”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흩뜨리고 지나갔다.
“거기 들어가 누워 계시면 어떻게 해요? 어서 나오세요.”
그녀는 처음으로 여자에게 애원하고 있었다. 여자는 그러나 그녀가 구덩이 속으로 들어와 꺼내주기를 기다리는 듯 꿈쩍하지 않았다.
“어서 나오시라니까요…… 어서요…….”
애원은 점차 흐느낌으로 변해갔다. 어스름이 깔려와 먹종이처럼 구덩이를 덮었다. 여자가 소멸하듯 어스름에 조금씩 집어삼켜지고 있었다.
- pp. 297-300
▲ 작가의 말 중에서
깃털, 보푸라기, 부리, 입, 존귀, 욕조…….
오늘 제가 마음속에서 알을 품듯, 가만히 품었던 말들입니다.
새알일 수도, 전등알일 수도, 쌀알일 수도, 팥알일 수도 있는 알 같은 말.
그리고 욕조 물속에서 중얼거린 말.
아파…… 아파…….
어쩌면 저의 마른입을 빌려 그녀가, 그녀들이 중얼거린 말.
오늘 밤 꿈에서 그녀를 만나면, 그녀가 누구든 “당신은 존귀한 존재”라고 이야기해주고 싶습니다.
감히 ‘존귀함’에 대해 쓰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작품해설 중에서
김숨의 소설은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았던 존재들과 그들의 표현되지 않았던 심연을 기록한다. 지우고 싶었던 과거와 덮어버리고 싶은 현재를 증명하는 존재들을 조심스럽게 우리 앞에 불러온다. 무능하고 무기력한 아버지, 불임의 어머니, 쓸모와 가치를 상실한 노인, 사회의 일원으로 살기 위해 인간에게 요구되는 최소한의 기준도 충족시키지 못하는 이들이 온전한 개인이기는커녕 가구처럼 그 자리에 붙박인 채 무기물의 생을 견뎌냈음을 여전히 견디고 있음을 반복해서 말한다. 김숨의 소설은 언제나 공감에 앞서 슬픔이 배어 있는 부끄러움을 불러온다. 화석이 된 그들이 바로 우리의 얼굴인 때문이다. 분별할 수 없는 나의 얼굴과 우리의 존재를 그렇게 대면하게 되기 때문이다.
『여인들과 진화하는 적들』에서 김숨은 분명 유령처럼 살아갔던 대한민국의 수많은 어머니들을 복원한다. 하지만 그 어머니는 가부장제 이데올로기가 유포한 희생과 헌신의 이미지로 체현되지도, 전통적 의미에서 우리가 상실한 과거와 같은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김숨의 ‘어머니’는 우리가 그간 ‘훼손될 수 없는 영역’으로 규정했던 것들이 얼마나 심각하게 경제적 가치에 의해 침윤되어 있는지 보여줌으로써 우리를 오늘날의 현실 자체와 대면하게 한다. 전문대를 나와 홈쇼핑 콜센터 상담원을 하고 있는 ‘어머니’가 ‘자신의 아이만은 생존에 유리하도록 진화하기를 바라며, 당당히 브랜드 아파트에서 키우고 싶어’ 윗세대 ‘어머니’를 착취한다. ‘어머니’는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 ‘어머니’를 착취하면서 그렇게 진화를 꿈꿔왔다. 그러나 그 ‘어머니’가 아파트 신축공사로 인해 파헤쳐진 구덩이 속에 들어가 ‘화석인류’임을 스스로 입증하고자 할 때, ‘어머니’의 진화는 인류의 역사에서 있지도 있을 수도 없었음이 판명되고 있다고 말해도 좋다.
- 소영현(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