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책에 대하여
2010년 현대문학 신인추천 장편소설 부문 당선작인 『나의 아름다운 마라톤』이 출간되었다. 현대문학의 신인등용문인 신인추천제도의 장편소설 부문이 1999년 부활된 이후 12년 만의 당선작이다. 당선된 이후, 1년 반에 달하는 긴 기간 동안의 꼼꼼한 퇴고과정을 통해 선보이는 이 장편은 탄탄한 구성과 간결하고 군더더기 없는 문장이 작가의 첫 작품이라는 수식이 무색할 정도이다.
사랑이 갑자기 찾아오듯 그렇게 다가온 마라톤을 통한 절망의 극복, 나는 왜 달리는가? 무엇에 도달하기 위해 달리는가? 의 진지한 고민 속에 이뤄지는 찬란한 승화는 소설을 읽는 독자들에게 소설을 통한 극한의 정화淨化를 맛보게 할 것이다.
▲ 줄거리는
불임 진단을 받고 아이 없이 남편과 단둘이 사는 나는 어느 날 열려 있는 남편의 노트북 파일을 우연히 본 후 남편에게 여자가 생긴 것을 알게 된다. 인성교육 담당 기간제 교사인 나와 떨어져 직장이 있는 지방에 주중에 거주하며 마라톤으로 외로움을 달래며 살던 남편에게 여자가 생긴 걸 알자, 그것도 남편의 첫 마라톤 풀코스 완주날 일이 벌어진 것을 알자, 나는 그 길로 무작정 밖으로 뛰쳐나가 달리기 시작한다.
불임 진단, 시숙의 아이 죽음, 동생의 죽음, 시어머니의 사고 등 주기적으로 일어난 사건 속에서도 꿋꿋이 중심을 유지하고 살던 내가 한순간에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나에게 들켰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다시 처음으로 모든 걸 회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나는 남편의 웅얼거림 뒤로 내가 아이를 낳았더라도,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몸이었더라도 그가 그랬을까? 정말 처음으로 회복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으로 내 자신의 유효기간이 이미 끝났음을 되뇐다.
이미 부부간의 어떤 교감도 없어진 상황이지만 허리를 다쳐 내 도움이 절실한 시어머니를 간호할 수밖에 없는 정황 속에 불편한 동거는 계속되고, 갈등은 쌓여만 간다.
남편의 부정과 주변인들의 사고 등, 모든 것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떨치기 위해 시작된 마라톤은 내게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었지만, 내가 살아갈 방편이 되고, 내 안의 결핍을 극복하고 삶의 회복을 긍정할 수 있는 매개가 되어준다.
남편에게 알리지 않고 혼자서 차근차근 준비한 첫 풀코스 날, 완주하는 순간, 피니시라인을 통과하는 순간, 상상도 못했던 가슴 벅찬 장면이 눈앞에 펼쳐진다.
풀코스 21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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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간호방법·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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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연, 제니퍼 그리고 나·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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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풀코스 날
풀코스 마의 벽 지점에서·260
그 아이가 나를 달리게 한다·269
작품해설
그대, 육체의 목소리―달리는 여자에 부쳐 | 양경언·271
작가의 말·290
1958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 성신여대 불문과를 졸업했다. 2010년 『현대문학』 신인추천 장편소설 부문에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 본문 중에서
처음 그날 밤 일을 확인하고자 물었을 때 남편은 20분간 부인했다. 그 20분이 20년 같았다. 노트북 파일과 메일 문장들이 들먹여지고 날아가고 던져지고 분해된 끝에 남편은 무릎을 꿇었다. (……) 무릎 꿇은 남편의 목을 조르려다가 그만두었다. 그 대신 집을 뛰쳐나와 달렸다. 머릿속이 세상에서 가장 복잡한 생각들로 들끓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많은 생각들 사이로 이상한 감정 하나가 비어져 나왔다. 안쓰러움이었다. (……) 얼마를 달렸는지도 모른다. 울음이 터져 나왔다. 예상치 못한 내 커다란 울음소리에 나도 놀랐다. 눈물을 뿌리며 달렸다. 그러자 여태까지 한 번도 해본 적 없던 생각 하나가 불쑥 떠올랐다. 마라톤! 믿을 수 없었다.
-189~190p
내 삶에서 마라톤 코스의 급수대와 같은 절실한 것 찾기. 나는 지금 그 길을 달리고 있는 건가. 지금까지 내게 일어난 일들을 떠올려보았다. 불임, 시숙의 아이 사고, 동생의 사고, 어머니의 사고, 주기적으로 일어난 사고들. 그건 삶이 내게 알리는 경보가 아니었을까. 긴급을 알리는 그 경보들을 모른 체하고 살아온 것일까. 남편의 그 일을 알고서야 귓등으로 흘리던 경보를 제대로 듣게 된 것일까. 그런 생각들로 울적하고 억울해진다. 나는 겁을 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너는 여기까지야, 네 유효기간은 지났어, 남편에게 그런 식으로 폐기처분 되는 상상에 휩싸이기도 한다. ‘다시 처음으로 회복할 수 있어.’ 남편의 그 웅얼거림에 묶여서라고 믿고 싶지는 않다. 내가 아이를 낳았더라도,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몸이었더라도 이렇게 미적거렸을까. ‘처음으로 회복할 수 있어.’ 남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는 것만 같다.
-194p
항상 달리는데도 왜 달릴 때마다 힘이 드는 걸까. 하프코스를 완주한 뒤로 훈련을 대하는 기분이 가벼워졌다. 그러나 그건 기분뿐이었다. 실제로 달리는 건 달라진 점이 없었다. 익숙해지면 쉬워질 줄 알았다. 참고 달리면 쉬워지는 날이 올 줄 알았다. 그러나 그 일에 익숙해질 뿐 그 일이 쉬워지는 건 아니었다. 쉽게 달려지는 날은 오지도 않을 것이고 애당초 그런 건 있지도 않은 것이었다. 실망스러웠다. 삶에 보기 좋게 속은 기분이었다. 결국 알게 된 건 결코 쉬워지는 일은 없으며 익숙해질 뿐이라는 것, 그걸 알고도 계속 달릴 수밖에 없는 게 삶이라는 것뿐. 맙소사. 그것이었다.
-240p
나는 왜 달리는가. 내가 설정한 기준은 무엇인가. 결국 나는 무엇에 도달하기 위해 달리는 것일까. 남편을 똑바로 보겠다는 것. 그것일까. 실은 나의 달리기도 결국은 어제의 약점을 조금이라도 극복해가는 것, 과거의 나를 극복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부디 이렇게 달리는 것으로 어제의 약점을 조금이 아닌 완전히 극복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처음처럼 회복할 수 있다고 한 남편의 말처럼 그 처음으로 회복하기를.
-241p
모든 시간을 오로지 마라톤풀코스를 향해 모아 가고 있는 내 모습이 마치 출산일을 앞둔 임산부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예정된 그날을 향해 집중해온 모든 시간이 출산의 진통으로 여겨진다. 진통의 고통은 한순간에 해소될 것이다. 내가 일그러진 표정으로 마지막 힘을 짜내고 마침내 아이를 낳는다.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우는 빨간 아이가 내 가슴에 안긴다. 차마 상상도 못했던 장면이다. 내가 출산하는 장면이다. 완주하는 순간, 피니시라인을 통과하는 순간, 나는 엄마의 산도를 찢고 탄생한 신생아의 울음을 터뜨리며 비로소 새로 태어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257p
내게 아이가 있었더라면, 생각해본다. 내게 아이가 있다면, 발음해본다. 나는 그 문장을 호흡하기 시작한다. 내게 아이가 있다면, 호흡할수록 나는 점점 페이스를 회복한다. 아이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가늘고 긴 다리로 달리고 있는 소녀의 모습이다. 그 모습에 피니시라인을 통과하던 영화 속 소년의 모습이 겹친다. 구름더미를 이룬 아이의 발이 거대하게 부풀어 오른다. 네가 뭘 알아! 남편의 목소리가 터져나온다. 통나무 무더기가 경주로에 몰려온다. 심장을 후비는 듯한 자동차의 급브레이크와 사이렌 소리가 경주로를 울린다. 급브레이크와 사이렌 소리에 통나무의 단면들이 쩍 하고 금이 간다. 갈라진 틈으로 핏물이 타고 흐른다. 갈라터지고 중심의 입자를 게우는 통나무들이 경주로를 덮쳐 온다. 아이는 땀을 날리며 달리기를 계속한다. 아이는 언제든지 박차고 달려 나갈 기세다. 싱싱하다. 그 아이가 나를 향해 손짓한다. 이제 그 아이가 나를 달리게 한다.
-269~270p
▲ 작가의 말 중에서
글이 막힐 때도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도 달렸다. 길이 보이는 건 아니지만 달리다 보면 생각이 간추려졌다. 글이 잘 풀리는 느낌이 들 때도 달렸다. 그런 때는 행복해서 달렸는데 더 상쾌했다. 처음 이 장편소설을 떠올린 것도 마라톤 경주로에서였다. 이야기도 달리는 가운데 이루어졌다. 달리는 게 힘들어 달리기와 상관없는 생각을 해보려고 애썼고 그러다가 소설이 떠올랐다. 원고지 1000매를 채운 순간 내 삶이 정리되었다는 생각이 들며 키보드에서 두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이 소설 한 편을 쓰기 위해 그 순간까지 살아왔다는 생각도 들었다. 달리는 동안 나는 달라지고 있었다. 이 책을 내는 동안에도 나는 달라졌을 것이다. 드디어 책이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 길로 나가 달렸다. 달리는데 눈물이 나왔다. 발톱 없는 발가락들이 아리고 욱신거렸다. 그렇게 달리며 생각했다. 새로 나는 발톱처럼 내 소설이 자랄 것이라고.
▲ 작품해설 중에서
달리기를 목적의식적으로 막 시작할 무렵, 여자의 몸은 화학적, 구조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마라톤을 하기에 적합한 몸으로 변화한다는 것은, 자신의 무모함과 견줄 수 있는 체력과 마음이 자라난다는 의미가 된다. 기억을 끄집어낼 상상력을 키우는 몸을, 또한 그 기억을 매만질 용기도 키우는 몸을 가진다는 의미도 될 것이다. 때문에 여자는 달리는 도중에 살아 움직이는 스스로에게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감정을 살려내고, 그 감정을 들여다보며 자신의 아픔이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게 되는 과정을 맞이한다. 그리고 마라톤이 실은 자신의 말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며, 자신의 말로 이루어진 서사의 한가운데에 설 수 있는 과정임을 서서히, 체득한다.
달릴 때, 여자는 제 서사의 주인공일 수 있다.
자신의 달리기에 대해 말할 때, 여자는 제 서사의 관찰자일 수 있다.
우리는 방금, 하나이면서 다수인 여자를 만나고 왔다. 그리고 그들 중 하나가 여자를 만난 당신의 일부와 겹쳐진다는 걸, 당신은 안다. 우리, 육체의 목소리가, 여자로부터 당신에게 흐른다. 여자의 이야기로 인해, 당신의 이야기충동 역시도 끌어올려질 것이다. 살아 있음을 욕망하는 삶은 계속될 것이다.
- 양경언, <작품해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