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안 작은 섬에서 태어난 한은 어린 시절 부모의 죽음을 경험하고 평생 연좌제 속에 고통 받으며 삶을 살아간다. 빡빡한 도시생활을 뒤로하고 퇴직 후 제주도로 귀향한 한은 어느 새벽, 달빛 아래에서 춤을 추는 듯한 강아지 망고를 보게 되고, 그저 혼자 그런 것이 아니라 무언가와 함께인 듯한 망고의 모습에 자꾸만 신경이 쓰인다.
우연한 기회에 동네 어르신들의 장터 나들이에 함께하게 된 한은 말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둥지를 튼 윤 씨 할머니에게 마을의 여러 사정들을 듣게 되고 그 대화 끝, 그즈음 반복해서 꾸던 어린 아이들이 등장하는 자신의 꿈 이야기를 한다. 그 이야기를 들은 윤 씨 할머니는 며칠 후 한의 집에 찾아와 차마 하지 못했던 한의 집터에 얽힌 사연을 털어놓는다. 공식적으로 14,232명이 희생되었고, 미신고자와 파악 안 된 수까지 합하면 희생자는 대략 2만에서 3만 명까지로 추정되는 1948년 월산리에서 벌어진 동족간의 가슴 아픈 이야기. 한은 그날 이후 동네에 관한 사료들을 찾아 읽고, 안타깝게 사라진 몽이 남매의 흔적을 찾아 헤맨다.
남편의 갑작스런 죽음 이후, 본인마저 낯선 곳으로 끌려가게 된 몽이 남매의 엄마는 아이들에게 고모 집으로 가서 자신을 기다리라 하고, 남매는 이미 빈집인 고모 집에서 오지 않는 엄마를 기다리다 적군을 색출하기 위함이라는 미명 하에 자행된 화재로 희생당한다. 이웃들은 그 아이들의 불행한 결말을 예상했지만, 모두가 죽어나가는 이미 만신창이가 된 마을에서 그 아이들을 적극적으로 도울 방법을 찾을 수는 없었다.
한은 어느 밤, 강아지 망고와 함께 뛰노는 몽이 남매의 환영을 보고, 밤마다 자신의 꿈에 나타난 아이들이 그 아이들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엄마가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으로 그곳을 지키다 끝내 죽음을 맞이한 아이들이 결국은 엄마를 만나 행복하게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게 된다. 한은, 언뜻 남매 엄마의 얼굴에서 자신의 엄마 얼굴을 발견하면서 고통스러웠던 자신의 트라우마를 떨쳐낸다.
“임철우는 역사의 폭력과 권력의 폭압, 잔인한 인간성의 극단을 보여주기 위해 소설을 쓰지 않는다. 그렇다고 시대를 이해한다거나 가해자의 이면을 들여다보려는 시도를 하는 것도 아니다. 그의 소설은 ‘고발’이나 ‘폭로’가 아니고, ‘증언’이나 ‘기억’에만 그치지도 않는다. 그에게는 남아 있는 사람들이 희생당한 사람들을 어떻게 위로하고 기릴 것인지가 궁극적으로 중요할 뿐이다.”(노태훈)
표4
'특별한 눈'과 '아파하는 마음'을 가진 고통의 사도
임철우가 거처를 제주로 옮겼다는 소식을 들은 지 꽤 지났으니, 그가 어떤 작품을 써서 또 세상에 내보낼 것인지는 충분히 예상 가능했다. 그는 아주 오래전부터 “동굴의 시커먼 아가리” 같은, 혹은 “어둠의 핵심” 같은 ‘구멍’(틈, 공백, 허방)을 눈에 달고 다니는 사람이었으니, 거기 제주에서도 또 심연을 보았으리라……. 휴전선 인근에서, 광주에서, 강원에서, 태평양전쟁 시기 일본군 주둔지에서, 베트남의 전장에서, 그는 그간 자신의 문학 이력 전체를 바로 그 심연을 들여다보는 일에 바쳤다. 그리고 그가 들여다본 심연 속에는 항상 시신들이 즐비했다. 그랬으니 그가 제주에서 무엇을 볼지는 자명했던 셈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시선은 1948년의 월산리 학살 사건을 향했고, 다시 심연 속에서 이런 것들을 본다.
-김형중, 「작품해설」 중에서
본문 중에서
또 다른 무리가 눈앞으로 다가온다. 수십 명씩 굴비 두름처럼 한 줄로 나란히 엮여 있다.
다들 똑같이 등 뒤에서 손목이며 팔뚝을 밧줄 혹은 철사 줄로 결박당한 모습. 밧줄이 고삐처럼 목에 그대로 휘감겨 있는 사람도 있다. 하나같이 백지장으로 변한 얼굴들. 목덜미와 가슴께까지 온통 피투성이인 까까머리 소년. 두 눈을 허옇게 부릅뜬 채 굳어버린 노인. 양팔로 가슴을 그러안고 새우처럼 웅크린 젊은 여자. 아직도 입에서 검은 피를 울컥울컥 토해내는 청년…….
거기엔 아이들도 있다. 두어 살, 예닐곱 살, 까까머리 초등학교 아이들까지. 젖먹이를 품에 안은 젊은 어미. 팔다리가 잘려 나가고, 얼굴이 짓이겨진 남자들. 두 눈을 빤히 뜨고 이쪽을 노려보는 노인. 산발한 머리채를 미역 줄기처럼 검게 풀어 헤친 채 떠내려가는 여자……. 은은한 달빛 아래 끝없이 펼쳐지는 그 무서운 광경 앞에서 그는 차마 숨조차 쉬지 못한다.
-20-21쪽
우린 이렇게, 당신들 눈앞에 존재하고 있어.
그럼에도 당신들은 우릴 알아보지 못하지. 왜냐면 당신들이 애초에 우릴 보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지. 보려 하지 않으므로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으므로 우리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거야. 애당초 들으려 하지 않고 느끼려 하지 않으므로, 우리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우리의 존재를 느낄 수가 없는 거야.
-49쪽
그때 자꾸자꾸 뒤를 돌아다보는 당신의 두 눈 속에서 난 텅 빈 구멍 하나를 보았어. 한없이 깊고 캄캄한 어둠의 동굴. 그 커다란 구멍 속으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어. 물 위를 둥둥 떠다니는 시신들. 검은 피를 흘리며 굴비처럼 줄줄이 엮여 떠내려가는 사람들. 아아, 참으로 무섭고 슬프고 끔찍한 광경이었지.
그제야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확실히 알 수 있었어. 아, 당신도 우리처럼 ‘아파하는 마음’이로구나. 우리는 서로가 똑같은 ‘아파하는 마음들’이구나. 그러기에 당신 또한 오래도록 온전히 잠들지 못하고 살아왔구나…….
그러니까 바로 그날부터였어. 우리가 당신의 집을 유심히 지켜보기 시작한 것은.
-63-64쪽
소개령이 내려진 지역은 일체의 통행이 금지되고, 눈에 띄는 자는 누구나 폭도로 간주돼 총살에 처해졌다. 불과 두 달 사이에 한라산 기슭의 수많은 중산간 마을들은 예외 없이 완전히 텅 빈 폐허로 변했다. 마을 전체가 불에 타고, 셀 수도 없이 많은 주민들이 곳곳에서 무차별로 떼죽음을 당했다. 토벌대를 피해 남녀노소 가족들을 이끌고 한라산 골짜기를 헤매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151쪽
“그날 이후, 내 눈에는 지옥과 이 세상이, 악마와 인간이 하나로 겹쳐 보여요. 그러니 어떻게 기도를 할 수 있겠어요.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그런 식의 기도문을 어떻게 두 손 모으고 천연덕스럽게 음송할 수가 있겠어요. 악마와 인간을 도무지 구분 못 하겠는데, 악마의 죄와 인간의 죄를 분간할 수가 없는데, 내가 어떻게 무엇을 위해 기도하고 누구의 용서를 구할 수 있겠어요……. 그런 생각은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170-171쪽
제주신화에서는 열다섯 살을 넘기기 이전에 죽은 어린아이들은 모두 ‘서천꽃밭’으로 간다고 믿는다. 서천꽃밭은 어린아이의 영혼이 머무는 곳, 즉 그들만을 위해 존재하는 특별한 낙원이자 천국이다. 이 낙원은 오로지 어린아이들에게만 입국이 허용되는데, 그 이유는 어린아이들은 아직 죄를 짓지 않은 순수하고 무구한 영혼인 까닭이다.
서천꽃밭은 이름 그대로 사시사철 꽃이 만발한 아름다운 꽃들의 세상이다. 나이 어린 혼령들은 극락에 가기 전 이곳에 머물면서 꽃에 물을 주는 일을 한다.
말 그대로 꽃과 함께, 꽃밭에서, 저마다 한 송이 아름다운 꽃이 되어 아이들은 이승에서 채 누리지 못한 행복과 평화를 마침내 이곳에서 마음껏 누리게 되는 것이다.
-189-190쪽
어쩌면 당신은 그 특별한 눈을 이미 지녔는지도 몰라. 당신은 남다르게 ‘아파하는 마음’을 가졌으니까. 그런 마음의 눈, 영혼의 눈을 가진 이들만이 우리들의 존재를 알아보고, 감지하고 또 공감할 수 있어.
-205쪽
과일나무에서 귤이나 자두 열매가 저 혼자 뚝 떨어져 바닥에 떼구루루 구른다면, 그건 대부분 우리들의 짓이지.
강아지가 별안간 제 꼬리를 물려고 뱅글뱅글 맴을 돌거나, 고양이가 저 혼자 뜀틀 선수처럼 제자리에서 펄쩍펄쩍 뛴다면, 그건 틀림없이 아이들이 꼬리 끝에 매달려 마구 간지럼을 태우고 있기 때문이야.
해 저물녘 강이나 호수에서 물고기가 느닷없이 혼자 수면 위로 쓩! 하고 튀어나왔다가 퐁! 하고 다시 물속으로 사라진다면, 그건 물어보나 마나 우리들이 물속에서 물고기들이랑 한창 숨바꼭질을 하고 있다는 얘기이고…….
-210쪽
월간 『현대문학』이 펴내는 월간 <핀 소설>, 그 열다섯 번째 책!
<현대문학 핀 시리즈>는 당대 한국 문학의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첨예한 작가들을 선정, 월간 『현대문학』 지면에 선보이고 이것을 다시 단행본 발간으로 이어가는 프로젝트이다. 여기에 선보이는 단행본들은 개별 작품임과 동시에 여섯 명이 ‘한 시리즈’로 큐레이션된 것이다. 현대문학은 이 시리즈의 진지함이 ‘핀’이라는 단어의 섬세한 경쾌함과 아이러니하게 결합되기를 바란다.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은 월간 현대문학이 매월 내놓는 월간 핀이기도 하다. 매월 25일 발간할 예정이 후속 편들은 내로라하는 국내 최고 작가들의 신작을 정해진 날짜에 만나볼 수 있게 기획되어 있다. 한국 출판 사상 최초로 도입되는 일종의 ‘샐러리북’ 개념이다.
001부터 006은 1971년에서 1973년 사이 출생하고, 1990년 후반부터 2000년 사이 등단한, 현재 한국 소설의 든든한 허리를 담당하고 있는 작가들의 작품으로 꾸렸고, 007부터 012는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반 출생하고, 2000년대 중후반 등단한, 현재 한국 소설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의 작품으로 만들어졌다.
013부터 018은 지금의 한국문학의 발전을 이끈 중추적인 역할을 한 1950년대 중후반부터 1960년대 사이 출생 작가, 1980년대에서 1990년대 중반까지 등단한 작가들의 작품으로 이어질 예정이다.
발간되었거나 발간 예정되어 있는 책들은 아래와 같다.
001 편혜영 『죽은 자로 하여금』(2018년 4월 25일 발간)
002 박형서 『당신의 노후』(2018년 5월 25일 발간)
003 김경욱 『거울 보는 남자』(2018년 6월 25일 발간)
004 윤성희 『첫 문장』(2018년 7월 25일 발간)
005 이기호 『목양면 방화 사건 전말기』(2018년 8월 25일 발간)
006 정이현 『알지 못하는 모든 신들에게』(2018년 9월 25일 발간)
007 정용준 『유령』(2018년 10월 25일 발간)
008 김금희 『나의 사랑, 매기』(2018년 11월 25일 발간)
009 김성중 『이슬라』(2018년 12월 25일 발간)
010 손보미 『우연의 신』(2019년 1월 25일 발간)
011 백수린 『친애하고, 친애하는』(2019년 2월 25일 발간)
012 최은미 『어제는 봄』(2019년 3월 25일 발간)
013 김인숙 『벚꽃의 우주』(2019년 4월 25일 발간)
014 이혜경 『기억의 습지』(2019년 5월 25일 발간)
015 임철우 『돌담에 속삭이는』(2019년 6월 25일 발간)
016 최 윤(근간)
017 이승우(근간)
현대문학 × 아티스트 정희승
<현대문학 핀 시리즈>는 아티스트의 영혼이 깃든 표지 작업과 함께 하나의 특별한 예술작품으로 재구성된 독창적인 소설선, 즉 예술 선집이 되었다. 각 소설이 그 작품마다의 독특한 향기와 그윽한 예술적 매혹을 갖게 된 것은 바로 소설과 예술, 이 두 세계의 만남이 이루어낸 영혼의 조화로움 때문일 것이다.
정희승
1974년 서울 출생. 홍익대 회화과 졸업. 런던컬리지 오브 커뮤니케이션London College of
Communication 사진학과 학사와 석사과정 마침. 삼성미술관 리움, 서울시립미술관, 아트선재센터를 비롯한 국내와 뉴욕, 런던 등지에서 수차례 전시 개최. <송은미술대상 우수상> <박건희문화재단 다음작가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