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엄마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처음 엄마가 된 여성들은 자신의 엄마를 통해 그 삶을 짐작할 뿐이다. 그러나 내가 기준으로 삼은 나의 엄마 역시 엄마로서의 삶은 낯선 것이었다. 그러하기에 세상의 모든 엄마들은 치열하게 자신의 닥친 지금의 삶을 살아냄과 동시에 체념과 헛된 포부들로 삶들을 채운다. 동시에 나의 딸은 나와 같은 삶을 살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반복되는 이런 여성들의 비극은 이 모든 것이 엄마가 된 이후에 비로소 깨달아진다는 데서 시작된다.
스물두 살, 공대 휴학 중인 나는 할머니 댁으로 가서 할머니를 돌봐드리라는 엄마의 전화를 받는다. 출산 직후 나를 할머니에게 맡기고 미국 유학을 다녀온 지방대 토목공학과 교수인 엄마는 지금도 여전히 집보다는 일을 중시하는 사람이다. 매사에 철두철미한 엄마와 달리 나는 학사경고를 받은 전력에, 아직 미래에 대한 고민이 많아 휴학까지 한, 늘 엄마 앞에 부족한 딸일 뿐이다. 그런 내게 엄마의 갑작스런 부탁은 마치 나를 할머니 댁으로 또다시 ‘유배 보내려’는 것처럼 느껴져 서럽기만 하다.
어린 시절 홀로 남겨진 나의 결핍을 채워준 건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늘 나를 살뜰히 챙겼다. 건강과 일상을 염려하고 살피고 배려하는 게 모녀 관계라면 차라리 나에게는 할머니가 엄마였다. 그런 할머니와 다시금 지내게 된 이후 나는 무시와 폭력을 견디며 사랑 없는 결혼생활을 하고 힘들게 낳은 아들을 사고로 잃은, 그리고 그 아픔을 딸을 통해 이겨내고 싶었던 할머니의 삶을 새롭게 알게 된다. 그리고 그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꿈을 대신 살아내기 위해 갓난아이인 나를 홀로 남겨두고 유학을 떠나야 했던 엄마의 비정한 삶을 이해하게 된다. 그 이후 점차 나는 엄마에 대한 서운함을 씻어내고 엄마에게 버려진 듯 느껴졌던, 하찮게만 보였던 나의 삶을 있는 조금씩 긍정하게 된다.
그러나 부족하다고 느끼는 모든 부분에서 엄마를 비교 대상으로 삼는 나는 여전히 엄마를 완벽히 이해하지 못하고, 이런 거리감을 극복하지 못하는 모녀의 관계는 할머니와 엄마 사이에서도 반복된다. 표현하고 수용하는 방식이 다른 데서 빚어지는 이 간극은 서로에게 인정받기 위한 남모를 노력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좁혀지지 않는다. 할머니와 매번 마찰을 빚는 엄마의 태도가 모순적이라고 느끼지만 그런 엄마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던 차, ‘강’과의 사이에서 예상치 못한 임신을 하게 되고, 그렇게 얻어진 아이는 내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는다. 준비 없이 맞은 엄마로서의 삶은 자식으로부터 남편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했던 엄마와 할머니의 삶을 다시 사는 것이었고, 그런 과정을 통해 나는 비로소 나의 삶이자 할머니로까지 이어지는 어머니의 삶을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엄마에게. 이 네 글자를 적은 뒤 다음에 쓸 말을 고르느라 머뭇거려본 이들을 위한 소설이다. 세상의 어떤 말로도 엄마를 향한 마음의 깊이와 넓이를 형언할 수 없을 것 같을 때 이 소설은 적절한 해답 하나를 건네주는 것처럼 보인다. 엄마를 떠올리면 자연스레 마음속에 차오르는 이중적이고 모순된 감정들, 애정과 미움, 고마움과 서운함, 동경과 연민의 파고를 감당하면서 이 소설은 엄마에게 해야 할 말, 하지 않으면 후회할 그 한마디 말을 빚어내기 위해 진지하게 나아간다. 그리하여 백수린은 ‘사랑한다’는 고백으로는 충분히 전달되지 않는 엄마에 대한 그 마음을 ‘친애하는’이라는 표현에 담기로 하였고, 이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우리는 그 말이 엄마에게 선사하기에 맞춤한 바로 그 한 단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게 된다.”(신샛별)
표4
딸은 엄마 또는 위 세대 여성이 나아간 바로 그곳에서부터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한다
이 소설은 누군가의 엄마이거나 딸로 살아왔고, 또 살아가는 중인 ‘여성의 이야기’로 그 외연을 넓히면서 ‘엄마’라는 주체성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지점으로까지 나아간다. (……) 이 소설은 ‘할머니-엄마-나’로 세대를 유전해 내려올수록 더 많은 자유를 누릴 수 있기를 염원하고 또 몸소 실현해 보이기를 주저하지 않은 여성의 이야기로 읽혀야 한다. 이렇게 읽을 때, 엄마가 된다는 것은 자유의 가능성을 낳는다는 말과 같아질 수 있다. ‘자유’라는 추상을 향한 여성의 이어달리기가 진행되는 동안에 이 소설은 마치 바통처럼, 다음 세대의 여성에게 전달돼야 할 친애의 역사의 기록으로 남을 것이다.
-신샛별, 「작품해설」 중에서
작가의 말 중에서
기본적으로 『친애하고, 친애하는』은 3대에 걸친 엄마와 딸의 이야기이지만 나는 이 이야기가 그렇게만 읽히길 원하지는 않는다. 나는 이 짧은 소설이 여성들의 이야기이자 동시에 삶과 죽음, 상처와 용서, 궁극적으로는 다정하고 연약한 인간들을 끝내 살게 하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로 읽혔으면 좋겠다.
본문 중에서
스물두 살이 되었던 그해 봄, 내가 엄마의 전화를 받은 것은 미뤄두었던 설거지를 막 마치고 창밖을 잠시 내다보고 있을 때였다. 창밖 커다란 나무의 우듬지 위에 앉아 있던 작은 새들이 일제히 꽃송이처럼 떨어졌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요약하자면, 모처럼 시간이 난 김에 할머니네 집에 가서 혼자 지내는 할머니를 몇 달간 ‘돌봐드리라’는 이야기였다.
“어차피 넌 할 일도 없잖아.”
-10p
할머니가 그렇게 갑자기 생각나는 밤이면 나는 이제, 내가 그러했듯이 할머니 역시 할머니의 한계 안에서 나를 사랑했을 것이라고, 그리고 그것은 인간이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그러니 내가 그때 할머니의 상태를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것이 그렇게 큰 잘못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을 만큼의 나이를 먹었다. 하지만 어쩌다 출퇴근 시간의 지하철역에서 환승하기 위해 계단을 바삐 올라가는 수없이 많은 이들의 뒤통수를 보거나 8차선 도로의 횡단보도에서 보행자 신호가 바뀌어 내 쪽을 향해 걸어오는 인파를 보다가 가끔씩, 나는 지구상의 이토록 많은 사람 중 누구도 충분히 사랑할 줄 모르는 인간인 것은 아닌가 하는 공포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우리가 타인을 사랑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대체 어떤 의미인 걸까?
-25-26p
“엄마를 실망시킬 때마다 엄마가 ‘너는 아빠를 닮아서 그 모양이냐?’라고 말을 하거든.” 언젠가 나는 홍대 인근 모텔의 침대 위에 누워 엑스 자 모양으로 생긴 형광등을 올려다보며 그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그것이 나보다는 아빠를, 그러니까 엄마보다 무능한 연구자일 뿐 아니라 내가 고등학생이었을 때 젊은 행정직원과 바람을 피운 아빠에 대한 경멸을 표현하는 한 방식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말이 내게 상처가 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그날 결국 그 침대 위에서 “나는 이렇게 엄마를 실망시키는 사람으로 남을 거야”라고 말하며 울음을 터뜨렸다.
-47-48p
사랑했던 여교사 대신 지적인 대화를 조금도 주고받을 수 없는 여자와 하는 수 없이 평생을 살게 된 할아버지에게 엄마는 유일한 자랑거리였다. (……) 엄마의 엄마는 그러는 대신 혼자 술을 마시며 작부처럼 노래를 불렀다. 그런 할머니의 모습에 화가 난 할아버지가 술상을 엎고, 할머니를 때릴 때, 엄마가 미웠던 것은 할아버지가 아니라 할머니였는데, 그 사실을 생각하면 사춘기 때의 엄마는 화가 났고, 커서는 슬펐다.
-71~73p
할머니가 부두를 찾는 것은 가슴이 답답하거나 화가 날 때라는 사실을 내가 알아챈 것이 언제였는지는 모르겠다. 할머니는 부두에 도착하면 주변의 상점에 들어가거나 좌판의 주인들과 대화를 나누는 법 없이 그저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서 있기만 했다. 마치 뛰어들려는 사람처럼. 그러다가 지루해진 내가 보채기라도 하면 할머니는 덩치가 이미 커져버린 나를 업고 부두를 위에서 아래로 걸었다. 앙상하게 마른 사람이 어찌나 엄청난 기세로 걷는지 거친 호흡이 업힌 내 볼 위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러니까 그건 울음을 참는 사람의 등이었어.”
-82p
나는 아랫배를 노크하는 것 같은 규칙적인 태동을 느끼며 할머니가 기억하는 (……) 여름을 상상했다. 그런 완벽한 여름의 어떤 날, 연노란색 태양이 아직 머리 꼭대기에 있었을 때, 달궈진 모래를 맨발로 밟고 걷다가 무언가에 이끌린 듯 옷을 벗고 바닷물로 뛰어드는 알몸의 여자와 그 옆에 서 있던, 세월이 좀 더 흐르고 나면 그런 엄마가 부끄러워지겠지만 그 순간만큼은 수평선을 향해 달려가는 엄마의 뒷모습을 황홀한 눈으로 바라보는 어린 여자아이를.
-126-127p
월간 『현대문학』이 펴내는 월간 <핀 소설>, 그 열한 번째 책!
<현대문학 핀 시리즈>는 당대 한국 문학의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첨예한 작가들을 선정, 월간 『현대문학』 지면에 선보이고 이것을 다시 단행본 발간으로 이어가는 프로젝트이다. 여기에 선보이는 단행본들은 개별 작품임과 동시에 여섯 명이 ‘한 시리즈’로 큐레이션된 것이다. 현대문학은 이 시리즈의 진지함이 ‘핀’이라는 단어의 섬세한 경쾌함과 아이러니하게 결합되기를 바란다.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은 월간 현대문학이 매월 내놓는 월간 핀이기도 하다. 매월 25일 발간할 예정이 후속 편들은 내로라하는 국내 최고 작가들의 신작을 정해진 날짜에 만나볼 수 있게 기획되어 있다. 한국 출판 사상 최초로 도입되는 일종의 ‘샐러리북’ 개념이다.
001부터 006은 1971년에서 1973년 사이 출생하고, 1990년 후반부터 2000년 사이 등단한, 현재 한국 소설의 든든한 허리를 담당하고 있는 작가들의 작품으로 꾸렸다.
007부터 012는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반 출생하고, 2000년대 중후반 등단한, 현재 한국 소설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의 작품으로 꾸려질 예정이다.
발간되었거나 발간 예정되어 있는 책들은 아래와 같다.
001 편혜영 『죽은 자로 하여금』(2018년 4월 25일 발간)
002 박형서 『당신의 노후』(2018년 5월 25일 발간)
003 김경욱 『거울 보는 남자』(2018년 6월 25일 발간)
004 윤성희 『첫 문장』(2018년 7월 25일 발간)
005 이기호 『목양면 방화 사건 전말기』(2018년 8월 25일 발간)
006 정이현 『알지 못하는 모든 신들에게』(2018년 9월 25일 발간)
007 정용준 『유령』(2018년 10월 25일 발간)
008 김금희 『나의 사랑, 매기』(2018년 11월 25일 발간)
009 김성중 『이슬라』(2018년 12월 25일 발간)
010 손보미 『우연의 신』(2019년 1월 25일 발간)
011 백수린 『친애하고, 친애하는』(2019년 2월 25일 발간)
012 최은미(2019년 3월 25일 발간 예정)
013 김인숙(근간)
014 이혜경(근간)
015 임철우(근간)
016 최 윤(근간)
017 이승우(근간)
018 하성란(근간)
현대문학 × 아티스트 허은경
<현대문학 핀 시리즈>는 아티스트의 영혼이 깃든 표지 작업과 함께 하나의 특별한 예술작품으로 재구성된 독창적인 소설선, 즉 예술 선집이 되었다. 각 소설이 그 작품마다의 독특한 향기와 그윽한 예술적 매혹을 갖게 된 것은 바로 소설과 예술, 이 두 세계의 만남이 이루어낸 영혼의 조화로움 때문일 것이다.
허은경
1964년 서울 출생. 서울대 서양화과 졸업. 미국 캘리포니아주 패서디나에 위치한 아트센터Art Center College of Design, Pasadena, CA에서 학사와 석사 학위 취득. 1992년 첫 개인전 「After Myth」로 활동을 시작, 미국과 한국, 독일, 중국을 오가며 다수의 개인전, 단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