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대를 졸업하고 경찰청에서 3년을 근무한 뒤 민간 조사원이 된 ‘그’는 의뢰인의 시각에 맞춰 그들이 원하는 결과물을 만족스럽게 찾아내주는 까닭에 그 분야에서 대체 불가한 자원이었다. 그런 그가 유일하게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는 시기가 있었는데 그건 자신이 ‘포화 상태’ 직전이라고 판단될 시 모든 것을 놓고 과감하게 자신만의 여행을 떠나는 것이었다. 그는 그것을 리-프레시라고 부르며 철저히 지켰다.
방콕행 여행을 하루 앞둔 저녁, 그는 자신의 주 고객 중 하나인 대형 로펌의 대표 변호사에게 한 의뢰인을 꼭 만나줄 것을 부탁 받고, 그를 만나러 나간다. 물론 어떤 일인지에 관계없이 정중히 거절을 하고 자신의 여행 일정에 맞춰 출국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의뢰인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빠져들게 되었고 결국은 7년 동안 한 번도 취소해본 적 없는 자신의 휴가 일정을 뒤로하고 프랑스로 출국한다.
부모의 이혼과 엄마의 죽음으로 인해 프랑스에서 살고 있는 아빠에게 보내진 ‘그녀’는 프랑스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뉴욕의 한 에이전시를 거쳐 예술재단에서 일하고 있다. 헤비 스모커에다 동양인인 그녀에게 동료들은 알 수 없는 거리감을 내비쳤고, 그렇게 일하던 그녀에게 고등학교 동창인 안영시-알리샤가 유품을 남겼으니 그것을 가지러 와주길 원한다는 편지를 받는다. 고등학교 시절 딱히 친하지 않았던 안영시-알리샤가 갑자기 왜 유품을 남겼는지 알 수 없는 그녀는 다시 절대 돌아가지 않겠다 다짐했던 프랑스로 가보기로 한다.
‘그’가 의뢰인에게 받은 부탁은 전 세계 한 병 남은 조니 워커 화이트 라벨을 찾아와 달라는 것이었고, 안영시-알리샤가 ‘그녀’에게 남긴 유품은 바로 그가 찾아와야 하는 조니 워커 화이트 라벨이었다. 그렇게 그와 그녀는 프랑스 리옹에서 만나게 되고, 그는 생각보다 쉽게 화이트 라벨을 손에 넣을 수 있었지만 포기하고 의뢰인에게 실패를 선언한다. 사실 그 둘은 프랑스로 오기 전 공통적으로 죽음을 간접 경험했다. ‘그’는 티브이를 통해 그 광경을 ‘보았고’ ‘그녀’는 굉음으로 그 사건을 ‘듣게’ 되었다. 이 일은 그들에게 죽음에 관해 다시금 생각하게 했고, 이 일로 인해 그 둘은 새롭게 살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난다. 새로이 생겨난 이 마음들은 결국 자신들의 삶을 적극적으로 개입해보려는 마음을 갖게 해주었고, 이로 인해 그와 그녀는 예기치 않은 미래를 향해 한 걸음 나아가게 된다.
손보미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은 사실과 허구를 섞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소설인지 혼란시킴으로써 소설적 재미를 풍성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번 소설에서 ‘우연’이라는 주제가 함축하고 있는 생의 신비를 포착하고자 한 작가의 의도에 의해 소설의 켜켜이 숨겨둔 우연적인 사건들로 긴장감을 더욱 갖게 하고 있다. “현실이라는 큰 전제 안에서 소설(허구)과 소설 아닌 것(사실)의 접점이야말로 우연의 한 양상처럼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김나영) 우연히 마지막 조니 워커 화이트 라벨을 찾아오는 일을 맡게 된 ‘그’, 이름을 착각한 한 선생님 때문에 우연히 프랑스로 다시 돌아온 ‘그녀’. 그러나 이 우연한 사실로 두 사람이 운명적인 만남을 갖는다거나 다른 행운의 이야기로 더 이상 진전하지는 않는다. 그저 그 우연은 또 다른 우연을 낳고, 그 우연은 또 다른 행로로 그들의 발걸음을 옮기게 한다. “현실은 누구에게나 확고부동한 것으로 놓여 있지 않고 그것을 사는 사람에 따라서 변화하는 상태로 있”(김나영)을 뿐이다. 그 우연의 기로에 ‘그’와 ‘그녀’가 서 있을 뿐이다.
표4
우연과 우연 이후
“인간의 삶은 우연히 일어나는 일들에 의해 계속 변화하는 것이다”
운명은 한 인간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고정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인생 전체를 두고 봤을 때는 찰나에 불과한 어떤 사건, 즉 우연히 일어나는 일들에 의해서 계속해서 변화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연의 신’은 인간의 삶이 계속 행복하거나 반대로 계속 불행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또한 이 우연의 신으로 인해 누구나가 겪는 행복이나 불행은 그것을 겪는 시점에서 제 인생 전체를 반추할 정도로 무겁게 느낄 일이 아니라고 여기게 된다. 어떤 행복이나 불행도 끝없이 지속되지는 않으리라는 것, 더불어 그것이 일어난 데에는 누군가 단독으로 행한 일만이 원인으로 작용하지 않는다는 것. 이 엄연한 삶의 진실들은 너무나 자주 잊히고 간혹 우연히 한 편의 소설에서 불현듯 다시 마주하게 된다.
-김나영, 「작품해설」 중에서
본문 중에서
리-프레시. 민간 조사원 일을 시작한 후로 7년 동안 그는 한 번도 이 일정을 취소해본 적이 없었다. 휴가 일정이 매해 일정하게 정해져 있는 건 아니었다. 그건 알아차리는 것에 가까웠다. 그는 그걸 ‘포화 상태’라고 불렀다. ‘포화 상태’에 다다르기 바로 직전, 그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14p
“이 계통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을 소개해달라는데, 그건 바로 자네 아닌가. 게다가 내일 아침 비행기로 바로 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해서 말이야. 내게 중요한 손님이니 다정하게 대해주게. 일을 꼭 맡아서 할 필욘 없어. 물론 자네가 더 잘 알겠지. 이야기를 들어만 주고 그냥 돌려보내는 것도 자네 장기 중 하나니까. 내 체면이 깎이지만 않게 해달라는 말이네.”
-p. 23
“중요한 건, ‘기술적인 측면’에서 우리가 이 사태를 바라봐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분은 죽음을 앞두고 있습니다. 겉으로 볼 땐 멀쩡하십니다만 사실은 암세포가 그녀의 몸 구석구석을 아주 천천히 파괴하고 있는 중이랍니다. 그리고 그분은 이제 마지막 화이트 라벨을 자기 손에 넣고 싶어 합니다.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까?”
-39p
소피아 마지엘은 자신을 알리샤 마지엘의 엄마라고 소개하고 있었다. 알리샤가 죽었고, 알리샤가 당신에게 남긴 유품이 있으니, 그걸 받으러 올 용의가 있는지를 묻고 있었다. 국제 소포로 보내줄 수도 있지만, 그곳으로 와서 알리샤의 죽음을 애도하고 직접 유품을 전해 받을 수 있는지, 한 번쯤은 물어보고 싶었다고 쓰고 있었다.
그녀는 좀 어리둥절해졌다. 알리샤가 죽었다고?
-52p
그는 이제껏 수많은 사람들의 뒷모습을 응시했었고, 그럴 때마다 자신이 조사해야 하는 것, 느껴야 하는 것, 판단해야 하는 것이 명확했었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그 순간, 리옹 시가지의 야경을 바라보다가 탄성을 내지르며 이리저리 사진을 찍는 사람들 틈에서 홀로 서 있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는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해야 할지 전혀 모르고 있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모든 게 분명하지가 않았고, 그의 손에 잡히는 게 없었다. 그런 식의 감정은 처음이었다.
-96p
진짜 ‘시선’은 어디에 있는 걸까? 그건 누구의 눈알일까? 위장, 그는 그런 단어를 떠올렸다. 누군가가 어떤 관계를 ‘위장’하고 싶어 한다면, 이를테면―그는 어떤 관계를 예로 들지 오랫동안 고민했다 ― 어떤 부모가 남들 앞에서 좋은 부모인 척한다면 그들이 진짜로 숨기고 싶어 하는 건 누구의 모습일까? 그는 그게 부모 자신을 위장하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 반대인지도 몰랐다.
-153p
그는 언제나 리-프레시에 대해 그렇게 생각했었다. 병 속의 물이 점점 차올라서, ‘포화 상태’에 다다르기 전에 병을 비워버리는 거라고. 하지만 그는 자신이 이제껏 무언가를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건 텅 비어 있는 병 속에 무언가가 점점 차오르는 그런 것과는 달랐다. 병 속이 비워져 있는 순간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건 언제나 물로 가득 차 있었다. 문제는 병 속의 물이 언제나 균형을 맞출 수 있느냐는 거였다. 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은 딱 그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느냐 없느냐였다. 그러니까, 그건 단 한 방울과 관련된 문제였다. 단 한 방울 때문에 너무 많은 게 달라질 수도 있었다.
-155-156p
월간 『현대문학』이 펴내는 월간 <핀 소설>, 그 열 번째 책!
<현대문학 핀 시리즈>는 당대 한국 문학의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첨예한 작가들을 선정, 월간 『현대문학』 지면에 선보이고 이것을 다시 단행본 발간으로 이어가는 프로젝트이다. 여기에 선보이는 단행본들은 개별 작품임과 동시에 여섯 명이 ‘한 시리즈’로 큐레이션된 것이다. 현대문학은 이 시리즈의 진지함이 ‘핀’이라는 단어의 섬세한 경쾌함과 아이러니하게 결합되기를 바란다.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은 월간 현대문학이 매월 내놓는 월간 핀이기도 하다. 매월 25일 발간할 예정이 후속 편들은 내로라하는 국내 최고 작가들의 신작을 정해진 날짜에 만나볼 수 있게 기획되어 있다. 한국 출판 사상 최초로 도입되는 일종의 ‘샐러리북’ 개념이다.
001부터 006은 1971년에서 1973년 사이 출생하고, 1990년 후반부터 2000년 사이 등단한, 현재 한국 소설의 든든한 허리를 담당하고 있는 작가들의 작품으로 꾸렸다.
007부터 012는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반 출생하고, 2000년대 중후반 등단한, 현재 한국 소설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의 작품으로 꾸려질 예정이다.
발간되었거나 발간 예정되어 있는 책들은 아래와 같다.
001 편혜영 『죽은 자로 하여금』(2018년 4월 25일 발간)
002 박형서 『당신의 노후』(2018년 5월 25일 발간)
003 김경욱 『거울 보는 남자』(2018년 6월 25일 발간)
004 윤성희 『첫 문장』(2018년 7월 25일 발간)
005 이기호 『목양면 방화 사건 전말기』(2018년 8월 25일 발간)
006 정이현 『알지 못하는 모든 신들에게』(2018년 9월 25일 발간)
007 정용준 『유령』(2018년 10월 25일 발간)
008 김금희 『나의 사랑, 매기』(2018년 11월 25일 발간)
009 김성중 『이슬라』(2018년 12월 25일 발간)
010 손보미 『우연의 신』(2019년 1월 25일 발간)
011 백수린(2019년 2월 25일 발간 예정)
012 최은미(2019년 3월 25일 발간 예정)
현대문학 × 아티스트 허은경
<현대문학 핀 시리즈>는 아티스트의 영혼이 깃든 표지 작업과 함께 하나의 특별한 예술작품으로 재구성된 독창적인 소설선, 즉 예술 선집이 되었다. 각 소설이 그 작품마다의 독특한 향기와 그윽한 예술적 매혹을 갖게 된 것은 바로 소설과 예술, 이 두 세계의 만남이 이루어낸 영혼의 조화로움 때문일 것이다.
허은경
1964년 서울 출생. 서울대 서양화과 졸업. 미국 캘리포니아주 패서디나에 위치한 아트센터Art Center College of Design, Pasadena, CA에서 학사와 석사 학위 취득. 1992년 첫 개인전 「After Myth」로 활동을 시작, 미국과 한국, 독일, 중국을 오가며 다수의 개인전, 단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