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말
계절이 바뀔 때마다 페이지를 한 장 넘기는 소리가 난다면 어떨까. 말의 순서를 바꾸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가 된다. 페이지를 한 장 넘기면 계절이 바뀌는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 한 장이 넘어 갈 때 한동안 멈춰 있던 계절이 비로소 흐르기 시작하고, 이렇게 각별한 해동의 경험은 우리가 계속 소설을 쓰거나 읽도록 만든다.
아주 거대한 판형의 책을 종종 떠올린다. 가로 2미터 세로 3미터쯤 되는, 페이지를 넘기려면 두꺼운 커튼을 치고 걷을 때처럼 몸짓이 커져야 하는 책. 그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길 때 얼마나 놀라운 바람이 불까. 가방에 넣을 수도 없고 집에 둘 수도 없어 오직 내 머릿속에서만 펼쳐보는 책 인데, 마지막 페이지를 아직 만나진 못했다. 다만 상상할 뿐, 그리고 경이로운 바람에 닿고 싶어 계속 쓸 뿐.
2021년 단 한 번뿐인 오늘, 윤고은
표4
‘사랑 이후의 사랑’으로 세상과의 조우를!
결혼도 보험 대상이 되는 세상
알 수 없이 훼손된 세계에 전하는 따뜻한 메시지
『밤의 여행자들』이 현실을 벗어나 이국의 여행지에서 맞닥뜨린 놀랍고도 섬뜩한 재난 서사였다면 『도서관 런웨이』는 현재에 당도한 전 지구적 공포인 ‘코로나’를 배경으로, 바로 지금 우리의 현실 속에 포진한 일상적 재난을 구축한다. 그것은 뜻밖에도, 보험과 결혼이다. 이 두 가지는 언뜻 연결 고리가 없어 보이지만, 작가는 이런 농담마저 슬쩍 숨겨놓고 있다. 우리는 “보험약관처럼 소원을”(33쪽) 빌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으며 “이제 보험이 결혼을 다루게 된 것은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84쪽)라고. 그러니 못 이기는 척 이야기를 따라가면 좋을 것이다. 이제 소설이 보험과 결혼 을 다루게 된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닌 셈이니까. 금세, 빠져들게 될 테니까.
-염승숙, 「작품해설」 중에서
차 례
도서관 런웨이 009
작품해설 270
작가의 말 294
본문 중에서
* 안나는 고요한 책들 사이로 걸어가는 걸 좋아했다. 키 높은 서가들이 담벼락처럼 이어진 도서관에서는 아무렇게나 걸어서는 안 됐다. 신발 밑창, 특히 뒷굽을 지면에 잠깐 접촉한다는 느낌으로 내려놓아야만 소리가 나지 않았다. 포스트잇을 한 장씩 바닥에 붙이는 것과 비슷하게. 안나는 자신의 걸음이 바닥에 오래 흔적을 남기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에 접촉에 대한 부담 없이 총총 걸었다.
-9쪽
* 걔네’의 정확한 이름은 AS였다. AS손해보험. 언니는 매달 보험료로 5만 900원씩을 납입했는데, 그 납입 내역을 보면서도 K는 이 보험의 존재 여부에 대해 의심했다. AS손해보험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있지만, 이런 종류의 보험이 정말 존재한단 말인가? 언니가 K의 속마음을 읽은 것처럼 말했다.
-74쪽
* 결혼은 한 사회의 그릇이나 상자 같은 거라고 했다. 결혼을 통해 담아낼 수 있는 인간사들이 무수하다면서. k는 아빠의 말에 동의하면서도, 그러나 과거의 결혼이 택배 상자 5호 정도의 크기였다면 지금은 2호 상자쯤 되는 거라고 말했다. 50년 전의 결혼이나 30년 전의 결혼에 비해 지금의 결혼이 다른 모양을 하고 있다면 단지 상자의 크기가 작아진 것뿐이라고 말이다. 크기가 5호에서 2호로 작아졌기 때문에 과거에 비해 결혼이라는 상자 안에 담을 수 있는 것들이 적어져 진짜 중요한 것들만 담을 수 있게 된 것이라고 했다.
-94쪽
* 2015년 간통죄가 폐지된 후 결혼보험이 ‘배우자의 부정행위’라는 항목에 대해 특별히 적용할 수 있는 조치는 없었다. 그러나 기러기는 몹시 특수한 상황을 전제로 하고 있으므로 조금 달랐다. 이 시기는 부부가 서로 노력해야 하는, 자녀 교육을 위해 협력해야 하는 시기였다. 먼 곳까지 날아가 가족을 위해 먹이를 물어 오는 기러기의 행동이 우스워져서는 곤란했다. 어느 한쪽 배우자의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게 안심 결혼보험의 입장이었다. 보험 가입자가 부부 중 하나이고 가입자 아닌 다른 한 사람의 외도를 증명할 수 있을 때, 그들이 기러기 특약에 가입된 상태라면 일정 부분 보험금을 받을 수 있었다. 정신적 충격에 대한 상담도 3회 받을 수 있었다. 어느 한쪽에 의한 학비와 생활비도 그걸 사용하는 쪽에서 상의 없는 사용, 나름의 횡령, 배임, 편취 로 해석될 수 있는 행동을 한다면 보험금 청구 대상이 될 수 있었다.
-105-106쪽
* 글쎄요. 그런데 결혼이란 게 동거에 따른 고독을 선택하는 거 아니겠어요? 그건 예상 불가한 일이 아니었을 것 같아요. 그러니 보험사에서 보장해줄 수 있는 게 아닐 듯하고요.
-109쪽
* 누군가의 숨이 위협이 되는 시대, 마스크로 코와 입을 다 틀어막아야 하는 시대, 안경을 쓰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감염 위험이 적어진다는 통계가 읽히는 시대, 생일 촛불을 입김으로 불어서 끄는 것도 모험이 되는 시대, 거리두기의 시대에 나는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을 유예하지 못하고 의심하지도 못하고 그 위로 미끄러졌다. 그리고 책달 아래서 마치 지상 처음인 것처럼 키스했다.
-191-192쪽
월간 『현대문학』이 펴내는 월간 <핀 소설>, 그 서른여섯 번째 책!
<현대문학 핀 시리즈>는 당대 한국 문학의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첨예한 작가들을 선정, 월간 『현대문학』 지면에 선보이고 이것을 다시 단행본 발간으로 이어가는 프로젝트이다. 여기에 선보이는 단행본들은 개별 작품임과 동시에 여섯 명이 ‘한 시리즈’로 큐레이션된 것이다. 현대문학은 이 시리즈의 진지함이 ‘핀’이라는 단어의 섬세한 경쾌함과 아이러니하게 결합되기를 바란다.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은 월간 『현대문학』이 매월 내놓는 월간 핀이기도 하다. 매월 25일 발간할 예정인 후속 편들은 내로라하는 국내 최고 작가들의 신작을 정해진 날짜에 만나볼 수 있게 기획되어 있다. 한국 출판 사상 최초로 도입되는 일종의 ‘샐러리북’ 개념이다.
001부터 006은 1971년에서 1973년 사이 출생하고, 1990년 후반부터 2000년 사이 등단한, 현재 한국 소설의 든든한 허리를 담당하고 있는 작가들의 작품으로 꾸렸고, 007부터 012는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반 출생하고, 2000년대 중후반 등단한, 현재 한국 소설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의 작품으로 만들어졌다.
013부터 018은 지금의 한국 문학의 발전을 이끈 중추적인 역할을 한 1950년대 중후반부터 1960년대 사이 출생 작가, 1980년대에서 1990년대 중반까지 등단한 작가들의 작품으로 꾸려졌으며, 019부터 024까지는 새로운 한국 문학의 역사를 써내려가고 있는 패기 있는 젊은 작가들의 작품으로 진행되었다.
세대별로 진행되던 핀 소설은 025~030에 들어서서는 장르소설이라는 특징 아래 묶여 출간되었고, 031~036은 절정의 문학을 꽃피우고 있는 1970년대 중후반 출생 작가들의 작품으로 꾸려질 예정이다.
발간되었거나 발간 예정되어 있는 책들은 아래와 같다.
001 편혜영 『죽은 자로 하여금』(2018년 4월 25일 발간)
002 박형서 『당신의 노후』(2018년 5월 25일 발간)
003 김경욱 『거울 보는 남자』(2018년 6월 25일 발간)
004 윤성희 『첫 문장』(2018년 7월 25일 발간)
005 이기호 『목양면 방화 사건 전말기』(2018년 8월 25일 발간)
006 정이현 『알지 못하는 모든 신들에게』(2018년 9월 25일 발간)
007 정용준 『유령』(2018년 10월 25일 발간)
008 김금희 『나의 사랑, 매기』(2018년 11월 25일 발간)
009 김성중 『이슬라』(2018년 12월 25일 발간)
010 손보미 『우연의 신』(2019년 1월 25일 발간)
011 백수린 『친애하고, 친애하는』(2019년 2월 25일 발간)
012 최은미 『어제는 봄』(2019년 3월 25일 발간)
013 김인숙 『벚꽃의 우주』(2019년 4월 25일 발간)
014 이혜경 『기억의 습지』(2019년 5월 25일 발간)
015 임철우 『돌담에 속삭이는』(2019년 6월 25일 발간)
016 최 윤 『파랑대문』(2019년 7월 25일 발간)
017 이승우 『캉탕』(2019년 8월 25일 발간)
018 하성란 『크리스마스캐럴』(2019년 9월 25일 발간)
019 임 현 『당신과 다른 나』(2019년 10월 25일 발간)
020 정지돈 『야간 경비원의 일기』(2019년 11월 25일 발간)
021 박민정 『서독 이모』(2019년 12월 25일)
022 최정화 『메모리 익스체인지』(2020년 1월 25일)
023 김엄지 『폭죽무덤』(2020년 2월 25일)
024 김혜진 『불과 나의 자서전』(2020년 3월 25일)
025 이영도 『마트 이야기―시하와 칸타의 장』(2020년 4월 25일)
026 듀 나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었다』(2020년 5월 25일)
027 조 현 『나, 이페머러의 수호자』(2020년 6월 25일)
028 백민석 『플라스틱맨』(2020년 7월 25일)
029 김희선 『죽음이 너희를 갈라놓을 때까지』(2020년 8월 25일)
030 최제훈 『단지 살인마』(2020년 9월 25일)
031 정소현 『가해자들』 (2020년 10월 25일)
032 서유미 『우리가 잃어버린 것』 (2020년 12월 25일)
033 최진영 『내가 되는 꿈』 (2021년 2월 25일)
034 구병모 『바늘과 가죽의 시詩』 (2021년 4월 25일)
035 김미월 『일주일의 세계』 (2021년 6월 25일)
036 윤고은 『도서관 런웨이』 (2021년 8월 25일)
037 우다영 (근간)
038 김초엽 (근간)
039 오한기 (근간)
현대문학 × 아티스트 박민준
<현대문학 핀 시리즈>는 아티스트의 영혼이 깃든 표지 작업과 함께 하나의 특별한 예술작품으로 재구성된 독창적인 소설선, 즉 예술 선집이 되었다. 각 소설이 그 작품마다의 독특한 향기와 그윽한 예술적 매혹을 갖게 된 것은 바로 소설과 예술, 이 두 세계의 만남이 이루어낸 영혼의 조화로움 때문일 것이다.
박민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졸업. 동 대학원 회화과 졸업, 동경예술대학교 대학원 재료기법학과 연구생 과정 수료. 서울시립미술관, 갤러리현대 등 국내외 다수의 기관 및 장소에서 전시. 『라포르 서커스』를 집필한 소설가로서도 활동 중. 자신이 상상해낸 새로운 이야기에 신화적 이미지 혹은 역사적 일화를 얹음으로써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그러나 ‘완전히 낯설지만은 않은’ 독창적인 화면을 연출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