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지고 폐허가 되어도 끝없이 변화하는 모든 것
삶과 죽음 속 이해할 수 없는 세계, 북해에서
살아가며 겪는 모든 일들이 우연으로 만들어졌으며 이상하고 비밀스러운 기미들이 구성한 신비의 세계임을 포착해낸 소설집 『밤의 징조와 연인들』. 미로처럼 얽힌 꿈과 현실에서 아름답게 펼쳐지는 영원의 순간들을 그려낸 『앨리스 앨리스 하고 부르면』. 두 편의 소설집을 통해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세계를 정돈된 문체로 전개해나가며 그만의 스타일을 구축해내고 있는 우다영의 이번 신작은 삶과 죽음이 맞닿아 있는 ‘북해’라는 미지의 공간, 그 안에서 삶의 사투를 벌이는 인물들의 극적인 사건이 액자소설 구성으로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엄격하고 보수적인 직업 군인 ‘나선’의 아버지는, 장교 제자들을 자주 집으로 초대한다. 아버지가 그들을 집으로 부르는 건 7년 전 사고로 사망한 공군이던 아들의 죽음 뒤에 오는 슬픔을 잊기 위해서이다. 그들과 자리를 하며 북해에 살던 시절의 추억을 나누는 아버지. 그러나 나선은 죽은 아들의 삶을 복원시키려는 아버지에게 또 다른 의도가 있음을 알게 되고, 반복되는 그 자리가 불편하기만 하다. 그러던 어느 날, 함께 자리하던 중위 하나가 그의 할머니 ‘오경’이 열다섯 살 시절 북해에서 겪은 전쟁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준다.
불바다가 된 북해. 오경은 세 명의 언니들과 황급히 몸을 피하지만 결국 홀로 살아남는다. 생존을 위해 저 너머 북해를 향해 무작정 달리던 오경은 자신을 뒤쫓는 듯한 군인과 추격전을 벌이고, 굉음과 함께 수로 속 돌무더기에 갇히고 만다.
정신을 차린 오경에게 돌 벽 사이 너머 인기척이 들리고, 오경은 그 소리의 주인공이 함께 달리던 적군임을 알고 극심한 공포에 사로잡힌다. 언니들을 죽이고 자신마저 죽이려 했던 적군과의 수로 속 35일, 오경은 그와의 삶을 연장하기 위한 처절한 삶을 이어간다.
살아간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고 그것을 이해하려는 것이 무의미할지라도 주어진 삶을 피하지 않고 묵묵히 나아가는 인물들을 통해 삶과 죽음의 결이 다르지 않다는 것,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는 의미를 찾기 이전에 ‘숭고하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해낸 소설이다.
작가의 말
언젠가부터 북해를 떠올리게 되었다. 눈을 감으면 나는 달리는 기차에 앉아 있고 바다 위로 펄펄 눈이 내리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나는 기다린다. 먼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 물줄기의 근원과 나의 기원. 오래전에 이미 시작되어 언제나 귓가에 어려 있는 자장가를 소리 없는 입술로 따라 부른다. 깊고 복잡한 이야기를 통과하기 위해 네 사람의 이름을 부른다. 나선은 삼차원 공간을 가로지르는 선이다. 오경은 속 깊은 곳이다. 미림은 아름다운 숲이다. 북해의 왕은 슬픔에 잠겨 있다. 그들 은 길을 나섰지만 곧 어디로 가려 했는지 잊었고 그럼에도 계속 길을 걷는다. 부드럽게, 부드럽게. 이것은 노래이고 길고 부드럽게 반복되는 자장가이며 마침내 무겁게 눈을 감는 순간까지 끝나지 않는다.
표4
삶이 형벌처럼 부여한 ‘무의미의 의미’
삶은 무엇이 아니고자 하는가
삶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아니라 삶이 무엇을 의미하는 삶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아니라 삶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음’을 이해하려는 끝없는 고행으로부터 도망치지 않는 태도에 있어서 나선과 중위는 닮아 있다. (……) 삶은 죽음만큼이나 기이하고 또 묘연한 것이어서 삶을 들여다보는 것은 죽음을 들여다보는 것과 다르지 않고, 삶을 사는 것은 죽음을 사는 것과 같은지도 모르겠다. 『북해에서』는 그 기묘함을 붙잡으려고 손을 뻗으면서도 모래알처럼 계속해서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태도에 사로잡혀 있다. 누군가에게는 의미가 없으리만치 우스꽝스럽게 보이겠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고매하고 또 숭고한 태도에.
-이은지, 「작품해설」 중에서
본문 중에서
* 화재와 폭발로 바깥이 해가 떠오르는 새벽녘처럼 밝아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정전이었다. 어둠 속에서 찾아보니 신발장이 있던 자리의 천장이 무너져 돌과 먼지 아래 현관 입구가 파묻혀 있었다. 간신히 한 사람 정도가 지나갈 수 있는 공간이 남아 있었지만 몇 분 뒤에도 그 공간이 무사히 남아 있으리라고 장담할 수 없었다.
“서둘러. 다 무너질지도 몰라.”
-31쪽
* 군인은 큰 키의 거구였고 그 역시 오경을 마주치기 전부터 달리고 있었다. 오경은 그와 정확히 눈이 마주쳤지만 얼굴을 금세 잊어버렸다. 눈 코 입의 생김새도 표정도 기억나지 않아서 오경은 그 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조금도 짐작할 수 없었다. 명백한 의미를 가진 것은 오직 그의 손에 들린 끝으로 갈수록 얇아지는 긴 소총이었고 서서히 오경을 향해 올라오는 총구였다. 오경은 멈추지 않고 계속 달렸고 군인도 방향을 틀어 뒤를 쫓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한 사람은 쫓고 다른 한 사람은 쫓기는 상태가 되었다. 마치 이 술래잡기가 그들 이 만나기 오래전부터 이미 시작됐던 것처럼.
-35-36쪽
* 그는 정말 매일 아침 오경에게 비스킷을 하나씩 건네주기 시작했다. 암흑 속에 잠겼던 수로에 아 침 햇살이 차오르면 오경은 시계도 없이 눈을 뜨고 그대로 가만히 기다렸다. 군인은 오경이 깨어났는지 묻지 않고 즉각 기계처럼 움직였다. 신기하게도 그때가 정확히 들어맞았다. 신기하게 여겼지만 내심 오경은 그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이 시간은, 비스킷을 나누고 그것을 먹는 시간은 둘에 게 하루를 여는 시간이자 하루 중 가장 중요한 시간이었다. 하루에 일어나는 사건의 전부이며 또다 시 내일이 존재하는 유일한 이유였다.
-61쪽
* 그러다 폐허가 된 도시 한 골목에서 홀로 죽어가는 노인을 보았다. 그는 곧 죽을 운명이었다. 천 년 동안 세상을 떠돈 북해의 왕은 갑자기 자기 안에서 샘솟는 낯선 감정을 느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깊은 연민이었다. 북해의 왕은 그 노인을 알고 있었다. 그는 오랜 옛날 성당에 벽돌을 옮기다가 떨어져 평생 다리를 절게 된 아이였다. 북해의 왕은 노인에게서 아이를 볼 수 있었기에 점점 슬퍼졌다. 그 노인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그의 마음에 잠시 깃들었다. 그와 한마음이 되었다.
-132쪽
월간 『현대문학』이 펴내는 월간 <핀 소설>, 그 서른일곱 번째 책!
<현대문학 핀 시리즈>는 당대 한국 문학의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첨예한 작가들을 선정, 월간 『현대문학』 지면에 선보이고 이것을 다시 단행본 발간으로 이어가는 프로젝트이다. 여기에 선보이는 단행본들은 개별 작품임과 동시에 여섯 명이 ‘한 시리즈’로 큐레이션된 것이다. 현대문학은 이 시리즈의 진지함이 ‘핀’이라는 단어의 섬세한 경쾌함과 아이러니하게 결합되기를 바란다.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은 월간 『현대문학』이 매월 내놓는 월간 핀이기도 하다. 매월 25일 발간할 예정인 후속 편들은 내로라하는 국내 최고 작가들의 신작을 정해진 날짜에 만나볼 수 있게 기획되어 있다. 한국 출판 사상 최초로 도입되는 일종의 ‘샐러리북’ 개념이다.
001부터 006은 1971년에서 1973년 사이 출생하고, 1990년 후반부터 2000년 사이 등단한, 현재 한국 소설의 든든한 허리를 담당하고 있는 작가들의 작품으로 꾸렸고, 007부터 012는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반 출생하고, 2000년대 중후반 등단한, 현재 한국 소설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의 작품으로 만들어졌다.
013부터 018은 지금의 한국 문학의 발전을 이끈 중추적인 역할을 한 1950년대 중후반부터 1960년대 사이 출생 작가, 1980년대에서 1990년대 중반까지 등단한 작가들의 작품으로 꾸려졌으며, 019부터 024까지는 새로운 한국 문학의 역사를 써내려가고 있는 패기 있는 젊은 작가들의 작품으로 진행되었다.
세대별로 진행되던 핀 소설은 025~030에 들어서서는 장르소설이라는 특징 아래 묶여 출간되었고, 031~036은 절정의 문학을 꽃피우고 있는 1970년대 중후반 출생 작가들의 작품으로 꾸려졌다.
발간되었거나 발간 예정되어 있는 책들은 아래와 같다.
001 편혜영 『죽은 자로 하여금』(2018년 4월 25일 발간)
002 박형서 『당신의 노후』(2018년 5월 25일 발간)
003 김경욱 『거울 보는 남자』(2018년 6월 25일 발간)
004 윤성희 『첫 문장』(2018년 7월 25일 발간)
005 이기호 『목양면 방화 사건 전말기』(2018년 8월 25일 발간)
006 정이현 『알지 못하는 모든 신들에게』(2018년 9월 25일 발간)
007 정용준 『유령』(2018년 10월 25일 발간)
008 김금희 『나의 사랑, 매기』(2018년 11월 25일 발간)
009 김성중 『이슬라』(2018년 12월 25일 발간)
010 손보미 『우연의 신』(2019년 1월 25일 발간)
011 백수린 『친애하고, 친애하는』(2019년 2월 25일 발간)
012 최은미 『어제는 봄』(2019년 3월 25일 발간)
013 김인숙 『벚꽃의 우주』(2019년 4월 25일 발간)
014 이혜경 『기억의 습지』(2019년 5월 25일 발간)
015 임철우 『돌담에 속삭이는』(2019년 6월 25일 발간)
016 최 윤 『파랑대문』(2019년 7월 25일 발간)
017 이승우 『캉탕』(2019년 8월 25일 발간)
018 하성란 『크리스마스캐럴』(2019년 9월 25일 발간)
019 임 현 『당신과 다른 나』(2019년 10월 25일 발간)
020 정지돈 『야간 경비원의 일기』(2019년 11월 25일 발간)
021 박민정 『서독 이모』(2019년 12월 25일)
022 최정화 『메모리 익스체인지』(2020년 1월 25일)
023 김엄지 『폭죽무덤』(2020년 2월 25일)
024 김혜진 『불과 나의 자서전』(2020년 3월 25일)
025 이영도 『마트 이야기―시하와 칸타의 장』(2020년 4월 25일)
026 듀 나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었다』(2020년 5월 25일)
027 조 현 『나, 이페머러의 수호자』(2020년 6월 25일)
028 백민석 『플라스틱맨』(2020년 7월 25일)
029 김희선 『죽음이 너희를 갈라놓을 때까지』(2020년 8월 25일)
030 최제훈 『단지 살인마』(2020년 9월 25일)
031 정소현 『가해자들』 (2020년 10월 25일)
032 서유미 『우리가 잃어버린 것』 (2020년 12월 25일)
033 최진영 『내가 되는 꿈』 (2021년 2월 25일)
034 구병모 『바늘과 가죽의 시詩』 (2021년 4월 25일)
035 김미월 『일주일의 세계』 (2021년 6월 25일)
036 윤고은 『도서관 런웨이』 (2021년 8월 25일)
037 우다영 『북해에서』 (2021년 10월 25일)
038 김초엽 근간
039 오한기 근간
040 서수진 근간
041 한정현 근간
042 이주란 근간
현대문학 × 아티스트 이동기
<현대문학 핀 시리즈>는 아티스트의 영혼이 깃든 표지 작업과 함께 하나의 특별한 예술작품으로 재구성된 독창적인 소설선, 즉 예술 선집이 되었다. 각 소설이 그 작품마다의 독특한 향기와 그윽한 예술적 매혹을 갖게 된 것은 바로 소설과 예술, 이 두 세계의 만남이 이루어낸 영혼의 조화로움 때문일 것이다.
이동기
한국 현대 미술에 만화 이미지를 본격적으로 도입했으며, 1993년에 창조한 캐릭터 ‘아토마우스’가 등장하는 일련의 현대 미술 작품들로 알려진 작가이다. 2000년대 세계 미술의 ‘네오 팝neo-pop’적 흐름을 예견한 그의 작품들은 현대 사회의 다양한 요소들을 다루고 있는데, 만화, 광고, 인터넷부터 고전 회화와 추상 미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각적, 문화적 요소 들을 통해 실재와 허구, 무거움과 가벼움, 물질과 정신, 동양과 서양 등 이질적 영역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암시하고 있다.
베를린의 마이클슐츠갤러리, 암스테르담의 윌렘커스 붐갤러리, 서울의 일민미술관 등에서 30여 회의 개인전을 가졌으며, 2011년 베니스비엔날레 부대전시 ‘퓨처 패스Future Pass’, 2005년 후쿠오카아시아미술관의 ‘애니메이트Animate’등의 전시에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