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소설을 쓰는 사람
장르가 되어버린 작가, 이장욱
“세상과 삶에 대한 성찰을 감상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일상적 체험을 깊은 통찰과 섬세한 감수성으로 여과시켜 언어로 재구성한 솜씨가 뛰어나다”는 평을 받으며 1994년 『현대문학』 시 부문으로 등단한 이장욱은 시인으로서의 탄탄한 입지를 뒤로하고 2005년 소설가로 자신의 문학세계를 확장해나갔다. “신인으로는 드물게 언어를 통제하는 힘을 가진 작가”(정호웅) “치열한 대결의식이 돋보이는 소설”(공지영)이라는 극찬을 받은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로 <문학수첩작가상>을 수상하며 소설가로서의 제2의 행보를 시작한 이장욱은 현대인의 고독과 절망감을 형상화한 작품을 연이어 발표하며 엄청난 열독자들을 생산해냈다.
어느덧 등단 30년. 네 권의 시집과 네 권의 소설집, 세 권의 장편소설을 내며 그 스스로가 장르가 되어버린 작가 이장욱은 1994년 등단 당시, “다짐하겠다. 내 조악한 마음속 세상을 견뎌준 몸에게. 더 이상 감상만으로 평화를 구하진 않을게, 문장과 문장 사이의 텅 빈 무게도 견뎌보자”고 수상소감을 밝힌 바 있다. 이번 신작 『뜨거운 유월의 바다와 중독자들』의 <작가의 말>이라 해도 어색하지 않을 과거 그의 수상소감은 등단 30년이 흐른 지금 이 순간까지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런 그가 발표한 이번 첫 중편 소설은 “우리 시의 미래에 이장욱이 있었던 것처럼, 이제 우리 소설의 미래도 이장욱을 가졌다”(백지은)는 평자의 이야기가 과언이 아니었음을 다시금 확인하게 하는 작품이다.
해안선이 조금씩 물에 잠식되어 가는 섬,
그곳에 남겨진 이들의 이야기
소설 속 중심인물은 모두 네 명이다. 도청 공무원이었으나 파면당한 뒤 해변모텔을 운영 중인 ‘모수’. 이혼 후 모수를 만나 새로운 생활을 꿈꾸고 있는 ‘연’. 극에 과몰입되어 자신을 잃어가는 연극배우 ‘천’. 예기치 못한 방송사고로 아나운서 일을 그만둔 ‘한나’. 소설은 이들 네 명의 이야기를 ‘연’과 ‘천’의 입을 빌려 번갈아 기술한다.
모수가 병으로 사망한 이후, 연은 모수를 대신해 해변모텔을 운영하고 있다. 인적 드문 그곳을 찾는 투숙객은 거의 없고, 설상가상으로 해안선 침식으로 모텔은 퇴거 명령을 받는다. 인터뷰이와 인터뷰어로 만나 연인이 된 천과 한나. 투병 중인 전 연인에게로 한나가 돌아가버리자 혼자가 된 천은 연의 모텔에 투숙한다. 홀로 남겨진 연과 천에게 하루하루는 특별한 것이 없다. 그저 망망대해 같은 그곳에서 자기 내면에 침잠하며, 각자의 상실을 견딜 뿐이다. “나에게 망망대해는…… 무겁게 밀려오는 파도의 세계입니다. 밀려와서 돌아가지 않는 물의 세계입니다. 물의 세계에 잠겨가는 사람의 표정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요? 무슨 말인지는 당신도 알고 있지 않나요? 이미 알고 있지 않나요 당신도? 우리는 지금 함께 망망대해를 건너가고 있잖아요.”(10쪽)라고 하며 상실의 괴로움을 표출하다가도, “다음 구름에서 쉬어 가요. 우리는 또 태양 아래에서 살아가야 하니까”(154쪽)라고 말하며 다음을 꿈꾸기도 한다.
“다음 구름에서 쉬어 가요.”
연의 중얼거림을 따라서 천이 중얼거렸다. 언젠가 자신이 해본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그 말을 한 것이 한나였다는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다. 연의 중얼거림이 듣기에 좋았고 듣기에 좋은 것은 따라 하기에 좋을 따름이었다.
천이 제 말을 따라 중얼거리는 것을 듣고 연이 그를 바라보았다. 천도 연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다가 다시 수평선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수평선 너머의 망망대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연은 몽상가도 아니고 생물학자도 아니고 옛사랑을 추억하는 사람도 아니고 단지 살아가는 사람이었는데, 그것은 천도 마찬가지였다. (154쪽)
연과 천은 그들 곁을 떠난 모수, 한나를 각자의 방식으로 기억하며 그들과 여전히 공존하는 것을 택한다. 그리하여 다시 시작될 날들이 있다 믿으며, 삶이 끝난 뒤에도, 세계가 끝난 뒤에서 ‘이후’가 있다 믿으며 그것을 기다린다.
“해안선이 조금씩 물에 잠식되어 가는 섬의 연인들 이야기”라고 작가 스스로가 소개한 한 편의 모노드라마 같은 소설이다.
표4
삶이 끝난 뒤에도, 세계가 끝난 뒤에도 ‘이후’가 있다
다시 시작될 것을 기다리는 이들의 이야기
바닷가에 머무는 그이들을 상상했다. 무덥고 뜨겁고 견디기 어려운 바다를 바라보는 그이들을 상상했다. 죽음이 흔해져버린 세계에서, 국가가 스스로를 방기한 세계에서, 잔여물들만이 남아 있는 세계에서, 불안과 우울만이 남아 있는 세계에서, 바닷가를 산책하는 그이들을 상상했다. 먼 데 수평선이 허공에 걸려 있고 그 너머에서 파도가 밀려올 것이다. 외롭다거나 우울하다거나 하는 감정이 사치스러울 것이다. 그이들은 햇빛 속에 잠겨들듯 더 깊은 물속으로 침잠해갈 것이다. 그곳에서도 무언가가 발견될 것이다. 다시 시작될 것이다. 그것을 기다리고 있다.
―이장욱, 「작가의 말」 중에서
본문 중에서
* 한나에게는 복잡한 것을 단순하게 생각하는 힘이 있었다. 천은 그런 재능을 부러워했고 자신도 그런 것을 닮고 싶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조금씩 닮아갔다. 천은 한나를 따라 복잡한 것을 단순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는데 단순하다고 생각한 것이 정말 단순한 것으로 느껴지자 천은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알았다. 복잡한 이유라든가 다양한 가능성을 모두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러니 눈에 보이는 방향으로 단순하게 나아가면 된다. 천은 매사에 그렇게 생각하려고 노력했고 조금씩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26-27쪽
* 천은 소음 때문에 잠을 설쳤다. 소리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럴 때마다 천은 자신이 강박증 환자 같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천은 무엇에든 잘 사로잡혔고 그렇기 때문에 한나와 함께 살았는지도 모른다.
“당신은 무엇에든 잘 사로잡히는 사람이라서 나와 함께 사는 게 아닐까.” 한나가 이렇게 물었을때 천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대답했다. “글쎄, 그런가.” 천이 그렇게 흐릿하게 대답을 하면 한나는 천의 볼을 만지며 장난스럽게 덧붙이곤 했다. “그래, 그런 건 중요하지 않지. 그렇죠, 배우 님?”
-31쪽
* “어쨌든 왕은 선택해야 했어요. 삶으로 돌아가서 삶을 긍정하고 진실의 일면만을 보고 살 것인가, 죽음을 택해서 삶을 부정하고 진실의 온 모습을 볼 것인가.” (......)
“사실 나는 진실의 일면이고 양면이고 하는 것은 관심 없어요. 진실의 온 모습 따위가 뭐야.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시간의 수많은 차원이라는 것도 웃기고 우스워. 우습고 웃기지. 그러면 세상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도 없을 테니까. 아름다움과 추함이 구분되지 않을 테니까.”
-54-55쪽
* “떠나야겠어. 떠날게.”
그런 말을 한 것은 한나였고 한나는 한나답지 않게 감상적인 어조로 덧붙였다.
“구름 같고 연기 같은 것을 보고 예감이구나, 하고 깨달을 때가 있잖아요. 그래서 고개를 들면 이미 그것에는 텅 빈 하늘뿐이야. 구름도 연기도 당신도 없어.” (......)
예감을 한 덕분에 천은 놀라지 않았다. 의외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나가 떠나겠다고 한 이유를 말했을 때는 놀랐고 의외라고 생각했다.
-62쪽
* “아시겠지만 메소드는 일종의 훈련 방법이잖아요. 배우가 배역에 스며들기 위한 것이죠. 그런데 저는 스며든다고 느끼지 않아요.”
“스며들지 않는다면?”
“글쎄요. 스며들지 않는다면…… 뭐라고 해야 할까…… 뭔가에 중독되는 기분이랄까요.”
천은 그렇게 말하고 한나를 멀뚱하게 바라보았다. 한나는, 중독이 된다고요? 스며드는 거나 중독되는 거나 그게 그거 아닌가? 하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뭔가 다르긴 다른 것 같아서였는데 그게 뭔지는 알 수 없었다.
-105-106쪽
* 자기도 모르게 대사를 치는 건가. 한나는 천의 표정과 말투가 낯설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아아, 이건 내가 아는 사람의 표정과 말투가 아니다. 이것은 다른 종류의 인간이다. 다른 기억과 낯선 감정을 가진 존재이다. 내가 처음부터 다시 이해하고 적응해야 하는…… 타인이다. 한나는 천에게서 이물감을 느꼈고 이물감은 점점 자라났고 그것은 한나의 몸에서 오래 사라지지 않았다. 천에게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한나는 확신했다.
-131-132쪽
* 연은 마치 모수가 앞에 있는 것처럼 말했다. 정말이지 모수는 일기를 쓰고 나서 일기에 사로잡힌 사람 같았다. 사로잡힌다고? 그렇지. 사로잡히는 거지.
모수는 무엇을 생각해서 무어라고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무어라고 말을 했기 때문에 무엇을 생각하는 사람 같았다. 말을 하고 그 말을 지키기 위해 행동하는 사람 같았다. 노트에 그렇게 적었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야 하는 사람처럼, 모수는 살아갔다. 모수의 노트를 읽어가면서 연은 그렇다는 것을 알았다.
-148쪽
월간 『현대문학』이 펴내는 <핀 소설>, 그 쉰 번째 책!
<현대문학 핀 시리즈>는 당대 한국 문학의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첨예한 작가들을 선정, 월간 『현대문학』 지면에 선보이고 이것을 다시 단행본 출간으로 이어가는 프로젝트이다. 여기에 선보이는 단행본들은 개별 작품임과 동시에 ‘한 시리즈’로 큐레이션된 것이다. 현대문학은 이 시리즈의 진지함이 ‘핀’이라는 단어의 섬세한 경쾌함과 아이러니하게 결합되기를 바란다.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은 월간 『현대문학』이 분기별 출간하는 것으로, 내로라하는 국내 최고 작가들의 신작을 정해진 날짜에 만나볼 수 있게 기획되어 있다.
출간되었거나 출간 예정되어 있는 책들은 아래와 같다.
001 편혜영 『죽은 자로 하여금』(2018년 4월 25일 출간)
002 박형서 『당신의 노후』(2018년 5월 25일 출간)
003 김경욱 『거울 보는 남자』(2018년 6월 25일 출간)
004 윤성희 『첫 문장』(2018년 7월 25일 출간)
005 이기호 『목양면 방화 사건 전말기』(2018년 8월 25일 출간)
006 정이현 『알지 못하는 모든 신들에게』(2018년 9월 25일 출간)
007 정용준 『유령』(2018년 10월 25일 출간)
008 김금희 『나의 사랑, 매기』(2018년 11월 25일 출간)
009 김성중 『이슬라』(2018년 12월 25일 출간)
010 손보미 『우연의 신』(2019년 1월 25일 출간)
011 백수린 『친애하고, 친애하는』(2019년 2월 25일 출간)
012 최은미 『어제는 봄』(2019년 3월 25일 출간)
013 김인숙 『벚꽃의 우주』(2019년 4월 25일 출간)
014 이혜경 『기억의 습지』(2019년 5월 25일 출간)
015 임철우 『돌담에 속삭이는』(2019년 6월 25일 출간)
016 최 윤 『파랑대문』(2019년 7월 25일 출간)
017 이승우 『캉탕』(2019년 8월 25일 출간)
018 하성란 『크리스마스캐럴』(2019년 9월 25일 출간)
019 임 현 『당신과 다른 나』(2019년 10월 25일 출간)
020 정지돈 『야간 경비원의 일기』(2019년 11월 25일 출간)
021 박민정 『서독 이모』(2019년 12월 25일)
022 최정화 『메모리 익스체인지』(2020년 1월 25일)
023 김엄지 『폭죽무덤』(2020년 2월 25일)
024 김혜진 『불과 나의 자서전』(2020년 3월 25일)
025 이영도 『마트 이야기―시하와 칸타의 장』(2020년 4월 25일)
026 듀 나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었다』(2020년 5월 25일)
027 조 현 『나, 이페머러의 수호자』(2020년 6월 25일)
028 백민석 『플라스틱맨』(2020년 7월 25일)
029 김희선 『죽음이 너희를 갈라놓을 때까지』(2020년 8월 25일)
030 최제훈 『단지 살인마』(2020년 9월 25일)
031 정소현 『가해자들』 (2020년 10월 25일)
032 서유미 『우리가 잃어버린 것』 (2020년 12월 25일)
033 최진영 『내가 되는 꿈』 (2021년 2월 25일)
034 구병모 『바늘과 가죽의 시詩』 (2021년 4월 25일)
035 김미월 『일주일의 세계』 (2021년 6월 25일)
036 윤고은 『도서관 런웨이』 (2021년 8월 25일)
037 우다영 『북해에서』 (2021년 10월 25일)
038 김초엽 『므레모사』(2021년 12월 25일)
039 오한기 『산책하기 좋은 날』(2022년 2월 25일)
040 서수진 『유진과 데이브』(2022년 4월 25일)
041 한정현 『마고麻姑―미군정기 윤박 교수 살해 사건에 얽힌 세 명의 여성 용의자』(2022년 6월 25일)
042 이주란 『어느 날의 나』(2022년 8월 25일)
043 천선란 『랑과 나의 사막』(2022년 10월 25일)
044 이서수 『몸과 여자들』(2022년 12월 25일)
045 천희란 『K의 장례』(2023년 2월 25일)
046 문진영 『딩』(2023년 4월 25일)
047 임솔아 『짐승처럼』(2023년 6월 25일)
048 강화길 『풀업』(2023년 8월 25일)
049 김지연 『태초의 냄새』(2023년 10월 25일)
050 이장욱 『뜨거운 유월의 바다와 중독자들』(2024년 1월 25일)
051 김솔 (근간)
052 김멜라 (근간)
053 안보윤 (근간)
현대문학 × 아티스트 오세열
<현대문학 핀 시리즈>는 아티스트의 영혼이 깃든 표지 작업과 함께 하나의 특별한 예술작품으로 재구성된 독창적인 소설선, 즉 예술 선집이 되었다. 각 소설이 그 작품마다의 독특한 향기와 그윽한 예술적 매혹을 갖게 된 것은 바로 소설과 예술, 이 두 세계의 만남이 이루어낸 영혼의 조화로움 때문일 것이다.
오세열
1945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라벌예술대학과 중앙대학교에서 수학했다. 부산시립미술관, 대전시립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학고재 상하이 등에서 다수의 개인전 및 그룹전을 가졌다. 국립현대미술관, 대전시립미술관, 프레데릭 R. 와이즈만 예술재단(미국 로스앤젤레스) 등 국내외 주요 미술 기관에서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