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발적 고립의 역사 위에 서 있는,
우리가 잃어버린 모든 것
화려한 자본주의의 산물인 백화점이란 공간 안의 인간 군상을 날카롭게 파헤친 『판타스틱 개미지옥』, 인생의 수많은 길 위에서 여전히 방황하는 서른셋 여성의 일상을 그린 『쿨하게 한걸음』. 2007년 두 편의 장편소설로 화려하게 등단한 서유미는 이후 두 편의 소설집과 네 편의 장편소설을 발표하며 독특한 시선으로 ‘서유미 스타일’을 창조해냈다. 그런 그가 발표한 신작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결혼 후 직장, 가족, 친구라는 기존에 있어왔던 세계를 그리워하면서도 새로운 환경으로부터 벗어나지도 적응하지도 못하는 주인공의 현실을 바라보는 데서 출발한다. 얼핏, 재취업을 위해 노력하는 한 여성의 평범한 이야기로 읽히는 이 소설은, 그러나 조금만 들여다보면 일상성 속에 숨어 있는 주인공 경주로 대표되는 ‘경단녀’들의 내밀한 지점을 발견할 수 있다.
육아휴직 이후 복직 대신 퇴직을 선택한 경주는 딸 지우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매일 아침 카페 제이니로 출근한다. 보내놓은 이력서의 수신 확인을 하며 재취업을 위한 구직 활동을 이어가지만 취업 시장의 녹록치 않은 현실 앞에 번번이 좌절한다. 마음을 나누던 친구들과의 인간관계에서마저 단절을 경험한 경주는 자신을 같은 마음으로 이해해주지 않는 사람들 에게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고 자발적인 고립의 상태로 자신을 몰아넣는다.
현실과 이상의 경계선 위에서 괴로워하는 경주와 달리, 카페 제이니의 주인 미스 제이니는 늘 한결같다. 매일 자신의 루틴을 지키고 손님이 몰려드는 시간에도 허둥대는 법 없이 차분하다. 경주는 그런 미스 제이니의 모습에 자신의 미래를 투영시키며 희망을 갖지만 느닷없는 카페 휴업에 버림받은 듯한 기분마저 느낀다.
다시 찾은 카페에서 아이가 아파 당분간 문을 닫는다는 작은 메모를 발견한 경주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는다. 힘내라는, 다른 이들의 응원 메시지를 보고 자신도 볼펜을 꺼내 들지만 손을 그러모은 채 고개만 숙일 뿐이다.
“경주는 자신이 두 달 동안 시간을 보냈던 카페를 새삼스레 다시 둘러보았다. 여전히 미지의 시간을 지나는 중이고 어디에 도달하게 될지 몰라 두리번거리고 있지만 여기서 보낸 한 시절이 자신을 앞으로 나아가게 한 건 분명했다.”(160쪽)
자신의 모든 것이라 여겨왔던 것들을 지켜내려 몸부림치지만 여의치 않은 현실에 절망하는,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하는 미성숙한 외로운 인간. 그러나 그 시차와 간극 사이에서 한 단계 진일보하게 될 주인공 경주의 내면을 객관적 시선으로 내밀하게 파고든 소설이다.
소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개인이 처한 환경의 모호함 안에서 더욱 선명해지는 현재를 그리고 있다. 내 주변에 실제로 있을 것 같은 인물 경주와 경주의 사람들과 그들을 둘러싼 관계들, 그것이 직접 맞대응하기 곤란한 현실과 무척 닮아 있어 경주의 현재 위치가 더욱 뾰족하게 느껴진다. (……) 경주가 기다리는 전화에 ‘노경주 고객님’이 아닌 ‘노경주 씨’가 불리길 바라지만 이미 우리는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무척 잘 알고 있는 ‘어른의 시간’을 보내고 있어 무턱대고 희망적인 위로를 건넬 수 없다. 그저 노경주가 든 ‘횃불’이 진정한 ‘구조신호’가 되어 어딘가에 가닿길 바랄 뿐이다.
—이정연(문학평론가)
작가의 말
우주에서 창백한 푸른 점인 지구를 바라보듯,
카페 제이니의 창가에 앉아 궤도를 수정하는 노경주의 삶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삶이 지속된다는 것은
무언가를 천천히 잃어가는 일이기도 하다는 걸.
그걸 알아가는 게 슬프기만 한 건 아니라는 얘기도 나누고 싶었다.
노경주가 불 꺼진 제이니의 문 앞에 서 있는 마지막 장면을 오래 생각했다.
소설이 알지 못하고 닿을 수 없는 사람을 향해 간절해지는 마음을 전하는 일이라면,
뭐라고 써야 할지 몰라 펜을 든 채 우두커니 서 있는 사람의 심정으로
이 소설을 썼다.
표4
단절과 고립을 넘어,
잃어버린 나를 찾아가는 길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오랜 시간 동안 계속되어온 여성들의 자발적 고립의 역사 위에 서 있다. 그러나 과거의 소설들이 혼자라는 상태, 고립이라는 상황에서 돌파구를 찾아내는 데 그쳤다면 서유미의 성취는 각자의 고립을 넘어서는 느슨한 연대를 통해 멈춘 듯한 좌표를 이동시켰다는 데에 있다. 단절된 것처럼 보이고 뒤늦은 것처럼 보이는 그들의 시간은 기준점을 바꾸면 연결된 것처럼 보이고 적절한 것처럼 보인다. (……) 고립의 역사 위에서 시작한 이 소설이 이토록 함께하며 끝날 수 있다니, 상처를 끌어안던 서유미의 소설은 이제 스스로 낫는 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 세상을 향해 횃불을 들고 구조 신호를 보내던 경주는 없다. 그녀의 좌표가 이동하기 시작했다.
-박혜진, 「작품해설」 중에서
본문 중에서
* 경주는 이 알 수 없음을 견디는 것도 구직 활동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모르는 상태에서 양식에 맞는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묵묵히 발송하는 것, 그 일에 감정을 싣지 않고 지속해나가는 것이 중요했다. 가끔은 무인도에서 비행기가 지나갈 때마다 횃불을 들고 구조 신호를 보내는 기분이었다. 여기에 자신이 있음을 알아봐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팔을 흔들었다.
-12쪽
* 어른이 되어도 눈물로, 우는 일로만 속엣것을 끄집어낼 수밖에 없는 시기를 지날 때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이 시기와 이 상태를 아이와 엄마가 자라는 때라고 하겠지. 경주도 눈물을 닦고 잠이 들면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지나가게 될 것이었다. 인생을 산다는 게 그 접힌 페이지를 펴고 접힌 말들 사이를 지나가는 일이라는 걸, 아무리 가깝고 사랑하는 사이여도 모든 것을 같이 나눌 수도 알 수도 없다는 걸, 하루하루 각자에게 주어진 일들을 해나가다 가끔 같이 괜찮은 시간을 보내는 게 인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31쪽
* 경주가 이따금 돌아보는 건 타인이 아니라 과거의 자신이었다. 과거의 자신이 당연하게 여기던 것과 잃어버린 것에 대해 생각했다. 현재의 삶을 그대로 유지한 채로 과거의 어떤 부분만 돌이키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 이중적인 심정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친구들에게 제대로 설명할 수도 이해시킬 방법도 없었다. 이해라니,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82-83쪽
* 경주는 오랫동안 그렇게 묻고 싶었다. 왜 그랬느냐고. 왜 돌잔치에 오지 않고 이유도 알려주지 않은 거냐고, 우리가 왜 이렇게 된 거냐고, 오랜 친구들과 이제는 연락도 주고받지 않는 J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그녀의 이력서를 패스하는 담당자들과 미스 제이니에게도 묻고 싶었다. 그러나 경주는 그들에게 묻는 대신 자신에게 물었고 그들에게 답을 들을 수 없을 것 같아 지나쳤다. 오랫동안 혼자 짐작하고 헤아렸다. 자신을 설득하는 동안 질문의 공소시효가 지나가버렸다.
-158-159쪽
월간 『현대문학』이 펴내는 월간 <핀 소설>, 그 서른두 번째 책!
<현대문학 핀 시리즈>는 당대 한국 문학의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첨예한 작가들을 선정, 월간 『현대문학』 지면에 선보이고 이것을 다시 단행본 발간으로 이어가는 프로젝트이다. 여기에 선보이는 단행본들은 개별 작품임과 동시에 여섯 명이 ‘한 시리즈’로 큐레이션된 것이다. 현대문학은 이 시리즈의 진지함이 ‘핀’이라는 단어의 섬세한 경쾌함과 아이러니하게 결합되기를 바란다.
<현대문학 핀 시리즈> 는 월간 『현대문학』이 매월 내놓는 월간 핀이기도 하다. 매월 25일 소설집과 시집으로 번갈아 발행되는 핀 시리즈는 내로라하는 국내 최고 작가들의 신작을 정해진 날짜에 만나볼 수 있게 기획되어 있다. 한국 출판 사상 최초로 도입되는, 일종의 ‘샐러리북’ 개념이다.
001부터 006은 1971년에서 1973년 사이 출생하고, 1990년 후반부터 2000년 사이 등단한, 현재 한국 소설의 든든한 허리를 담당하고 있는 작가들의 작품으로 꾸렸고, 007부터 012는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반 출생하고, 2000년대 중후반 등단한, 현재 한국 소설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의 작품으로 만들어졌다.
013부터 018은 지금의 한국 문학의 발전을 이끈 중추적인 역할을 한 1950년대 중후반부터 1960년대 사이 출생 작가, 1980년대에서 1990년대 중반까지 등단한 작가들의 작품으로 꾸려졌으며, 019부터 024까지는 새로운 한국 문학의 역사를 써내려가고 있는 패기 있는 1980년대생 젊은 작가들의 작품으로 진행되었다.
세대별로 진행되던 핀 소설은 025~030에 들어서서는 장르소설이라는 특징 아래 묶여 출간되었고, 031~036은 절정의 문학을 꽃피우고 있는 1970년대 중후반 출생 여성 작가들의 작품으로 꾸려지고 있다.
발간되었거나 발간 예정되어 있는 책들은 아래와 같다.
001 편혜영 『죽은 자로 하여금』(2018년 4월 25일 발간)
002 박형서 『당신의 노후』(2018년 5월 25일 발간)
003 김경욱 『거울 보는 남자』(2018년 6월 25일 발간)
004 윤성희 『첫 문장』(2018년 7월 25일 발간)
005 이기호 『목양면 방화 사건 전말기』(2018년 8월 25일 발간)
006 정이현 『알지 못하는 모든 신들에게』(2018년 9월 25일 발간)
007 정용준 『유령』(2018년 10월 25일 발간)
008 김금희 『나의 사랑, 매기』(2018년 11월 25일 발간)
009 김성중 『이슬라』(2018년 12월 25일 발간)
010 손보미 『우연의 신』(2019년 1월 25일 발간)
011 백수린 『친애하고, 친애하는』(2019년 2월 25일 발간)
012 최은미 『어제는 봄』(2019년 3월 25일 발간)
013 김인숙 『벚꽃의 우주』(2019년 4월 25일 발간)
014 이혜경 『기억의 습지』(2019년 5월 25일 발간)
015 임철우 『돌담에 속삭이는』(2019년 6월 25일 발간)
016 최 윤 『파랑대문』(2019년 7월 25일 발간)
017 이승우 『캉탕』(2019년 8월 25일 발간)
018 하성란 『크리스마스캐럴』(2019년 9월 25일 발간)
019 임 현 『당신과 다른 나』(2019년 10월 25일 발간)
020 정지돈 『야간 경비원의 일기』(2019년 11월 25일 발간)
021 박민정 『서독 이모』(2019년 12월 25일)
022 최정화 『메모리 익스체인지』(2020년 1월 25일)
023 김엄지 『폭죽무덤』(2020년 2월 25일)
024 김혜진 『불과 나의 자서전』(2020년 3월 25일)
025 이영도 『마트 이야기―시하와 칸타의 장』(2020년 4월 25일)
026 듀 나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었다』(2020년 5월 25일)
027 조 현 『나, 이페머러의 수호자』(2020년 6월 25일)
028 백민석 『플라스틱맨』(2020년 7월 25일)
029 김희선 『죽음이 너희를 갈라놓을 때까지』(2020년 8월 25일)
030 최제훈 『단지 살인마』(2020년 9월 25일)
031 정소현 『가해자들』 (2020년 10월 25일)
032 서유미 『우리가 잃어버린 것』(2020년 12월 25일)
033 최진영 근간
034 구병모 근간
035 김미월 근간
036 윤고은 근간
현대문학 × 아티스트 박민준
<현대문학 핀 시리즈>는 아티스트의 영혼이 깃든 표지 작업과 함께 하나의 특별한 예술작품으로 재구성된 독창적인 소설선, 즉 예술 선집이 되었다. 각 소설이 그 작품마다의 독특한 향기와 그윽한 예술적 매혹을 갖게 된 것은 바로 소설과 예술, 이 두 세계의 만남이 이루어낸 영혼의 조화로움 때문일 것이다.
박민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졸업. 동 대학원 회화과 졸업, 동경예술대학교 대학원 재료기법학과 연구생 과정 수료. 서울시립미술관, 갤러리현대 등 국내외 다수의 기관 및 장소에서 전시. 『라포르 서커스』를 집필한 소설가로서도 활동 중. 자신이 상상해낸 새로운 이야기에 신화적 이미지 혹은 역사적 일화를 얹음으로써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그러나 ‘완전히 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