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이야기로 묘하게 궁굴려지는
한결같은 작품세계”
2012년에 등단한, 11년차 소설가 이주란은 그동안 두 권의 소설집과 한 권의 장편소설을 상자했다. <김준성문학상>과 <젊은작가상>을 수상하는 등, 꾸준히 작품활동을 하며 그 성과를 인정받은 이주란은 삶의 구석구석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을 뻔뻔스러운 농담으로 승화시킬 줄 아는 능청스러움이 믿음직스럽다는 극찬을 받은 첫 소설집 『모두 다른 아버지』, “상실과 외로움 속에서도 회의에 빠지지 않고 어떤 희망을 발견해내는 인물들을 통해 위로받는” 두 번째 소설집 『한 사람을 위한 마음』, “시 없이 시로 가득하고, 청승 없이 슬픔의 끝점을 보여준다”(박연준)는 평을 받은 첫 장편소설 『수면 아래』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작품세계로 독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는 작가가 되었다.
그의 소설들은 그렇게 자극적이지 않고, 결정적인 사건도 없으며, 심지어 연계된 줄기조차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주란 소설이 보여주는 묘한 끌림의 배후에는 각각의 이야기들 안에 내재된 풍성한 서사와 그것들을 그러모으면 신기하게 하나의 이야기로 만나 이루는 조화가 자리하고 있다. 이번 소설 『어느 날의 나』에서도 그런 이주란 소설의 특징을 만나볼 수 있다.
“오늘의 나는, 그 어느 날의 나보다 괜찮다
유일한 혈육인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빚더미에 앉은 유리에게 선배 언니는 3등에 당첨된 복권을 내밀며 방을 얻으라고 했다. 출구 없어 보이던 유리의 삶은 그렇게 다시 시작되고, 지금은 그 선배 언니와 함께 살며 가족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
유리와 언니는 동거하지만 서로의 삶에 깊이 개입하지는 않는다. 영화관에 같이 가기는 하지만 서로 다른 영화를 보고, 같이 산책에 나서지만 늘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다. 그런 그들의 삶에 유리가 일하는 카페의 단골인 싱글 대디 재한 씨가 등장한다. 재한 씨는 금세 그들 사이에 스며들어 함께 식사를 하고 캠핑도 같이 가지만 아버지의 건강이 악화되어 고향으로 내려가는 것으로 재한 씨는 퇴장한다. 생일도 아닌 유리에게 생일 선물을 마지막으로 건네며.
“밥을 잘 먹고 잠을 잘 자고, 그게 사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했다. 희망이라는 단어를 자주 쓰거나 대단한 미래를 꿈꾸며 살지는 않지만 내가 바꿀 수 없는 것들은 어차피 바꿀 수 없고 오늘 나는 그 어느 날의 나보다 괜찮으니까. 가진 것을 생각하면.”(113-114쪽)
삶을 계속 살게 하는 힘은 완벽한 이해나 뜨거운 사랑이 아닌, 어떤 존재를 염려하는 애틋한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이 작품이다.
“불행은 동행을 좋아한다. 유리의 곁에도 자신의 불행을 고백하며 동행하는 사람들이 있다. 무엇보다 이 이야기가 다른 누구도 아닌 유리 자신의 고백이라는 것, 괜찮을 게 하나도 없지만 그럼에도 “나는 지금 어느 정도 괜찮”다는 이 무심한 고백이야말로 이주란이 그려내는 사소하지만 지속적인 연대라는 것. 아무도 유리에게 괜찮다고 말해주는 사람은 없지만, 어쩌면 누군가에게 무심하게 괜찮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유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아직은 아니지만 그런 기적을 기대해도 좋지 않을까.”
―임현(소설가)
작가의 말
아주 가끔이지만
어느 날엔 혼자서 미래를 그려볼 때가 있다.
그런 일은 없을 거라 단언해왔기 때문에
그때마다 낯선 기분이다.
저곳이었나.
우연히 길을 지나다 그 골목을 들여다본 적이 있다.
어느 정도 나아진 후에야
그 골목을, 내 미래를 바로 보게 되었다.
이 정도까지 나아져야 했구나.
나라는 사람은 이 정도에서 미래를 꿈꿔보는구나.
처음 알게 되었고
그 후로는 대체로 좋은 기분이다.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지만
요즘 나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 때문에 괴로워하지는 않는다.
비슷한 다른 기분들이 들긴 하지만
수용소에서 풀려났기 때문에
그 후로는 대체로 좋은 기분이다.
표4
끝내 좁혀지지 않는 거리가 만들어낸 이해의 순간
타자와 유대의 온기를 나누며 공존하는 삶에 대한 희구!
작품의 첫 문장은 “모르는 사람들이 내게 괜찮다, 말해주네.”인데 여기서 목적어는 의도적으로 생략되어 있다. (……) ‘나를 모르는 사람들’이든 ‘내가 모르는 사람들’이든 공통적으로 ‘내가 살아온 삶의 내력’에 대해서는 무지할 수밖에 없다. (……) 그렇지만 여기서 그 문장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괜찮다는 말을 내뱉는 타자의 폭력을 고발하기 위해 동원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나’에 대한 타인의 앎의 수준이 아니라 어쩌면 모든 무지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 무지를 기꺼이 딛고 발화되는 위로의 건넴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의 진정한 주인공은 그동안 유리의 삶과 직접적인 관련을 맺지 않았던, 그 수많은 “모르는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한영인, 「작품해설」 중에서
본문 중에서
* 내가 살던 방을 보고 싶지만 지금 살고 있는 사람에게 실례일 것 같아 그냥 전체를 본다. 이 집에 대한 익숙함이 점점 옅어지고 있다는 걸, 올 때마다 느낀다. 전엔 할머니는 여전히 이 집에 계실 것 같고, 나만 멀리 떨어져나온 것 같았는데 요즘엔 할머니가 지금 나의 집에 같이 있는 것 같은 마음도 든다. 떠올리면 언제든 내 곁에 있는 것처럼.
-15쪽
* 이 공간엔 언니와 나, 둘뿐이다. 사람들 속에 있는 것도 좋지만 고요한 방 안에 혼자 있는 것도 좋아지는 요즘이다. 혼자 살 때는 오히려 느끼지 못했던 기분. 시원하게 몸을 씻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내 방에 누우면 수많은 사람 중의 하나가 아니라 나 자신이 되는 기분이다. 이 세상에 내가 있구나. 나라는 사람이 숨을 쉬고 있구나. 여러 모습으로 여러 마음으로 종일 말하고 움직이다가, 몸과 마음에 아무것도 없이 오로지 나인 채로, 나로 살아 있는 상태로 나 자신이 되고 내 세상이 되는 것.
-37쪽
* 어릴 때 나는 잘못을 했을 때 야단을 맞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 내가 잘못을 하고, 야단을 맞고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고 다시 그러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밤엔 날 안아주고 그런 일은 없었지. 부모라고 자식을 다 사랑하는 건 아닌가 보다 하면서도 나는 왜 매일 사랑을 바랐을까 모르겠어. 다행히 이제 더는 그런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아. 그냥 그랬나 보다, 하게 되어버린 일일 뿐. 물론 왜인지 온전히 편안한 인생은 아닌 느낌이 들지만. 이대로도 괜찮도록 살아봐야지, 할 뿐이야. 어느 날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날 괴롭히는 기억들이지만 대부분의 날들엔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나갈 수 있는, 그런 일과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
-53~54쪽
* 원하는 때로 되돌아갈 수 있다고 하면 언니는 어디로 돌아가고 싶어 할까 생각해보던 밤. 묻지는 않고 혼자서 짐작해보던 밤이었다. 나는 어느 때로도 돌아가고 싶지 않고, 언니도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잠든 언니 옆에서 하모니카로 생일 축하 노래를 최대한 작게 연주해봤다.
-69쪽
* 그날은 딱 이 정도로 쌀쌀한 날이었다. 어제의 쌀쌀함도 내일의 쌀쌀함도 아니고 딱 오늘 정도의 쌀쌀한 온도와 바람. 나만 알 수 있는 똑같은 날씨를 만나면 나는 잠시 그 어느 날로 돌아간다. 돌아가서 따뜻한 밥과 국과 물과 아이스크림과 새 칫솔을 떠올린 뒤 다시 나온다.
-94-95쪽
* 잊고 살다가도, 차근히 할 일을 하며 살다가도,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았는데도 종종 그날을 떠올리면 죄인이 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날들을 보냈어. 없던 일이 되길 바라는 건 아닌데. 서른 즈음에 알았어. 내가 큰 잘못을 저질렀더라도 엄마에겐 따뜻한 말을 듣고 싶었다는 걸.
-102쪽
* 밥을 잘 먹고 잠을 잘 자고, 그게 사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했다. 희망이라는 단어를 자주 쓰거나 대단한 미래를 꿈꾸며 살지는 않지만 내가 바꿀 수 없는 것들은 어차피 바꿀 수 없고 오늘 나는 그 어느 날의 나보다 괜찮으니까.
-113-114쪽
월간 『현대문학』이 펴내는 월간 <핀 소설>, 그 마흔두 번째 책!
<현대문학 핀 시리즈>는 당대 한국 문학의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첨예한 작가들을 선정, 월간 『현대문학』 지면에 선보이고 이것을 다시 단행본 발간으로 이어가는 프로젝트이다. 여기에 선보이는 단행본들은 개별 작품임과 동시에 여섯 명이 ‘한 시리즈’로 큐레이션된 것이다. 현대문학은 이 시리즈의 진지함이 ‘핀’이라는 단어의 섬세한 경쾌함과 아이러니하게 결합되기를 바란다.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은 월간 『현대문학』이 매월 내놓는 월간 핀이기도 하다. 매월 25일 발간할 예정인 후속 편들은 내로라하는 국내 최고 작가들의 신작을 정해진 날짜에 만나볼 수 있게 기획되어 있다. 한국 출판 사상 최초로 도입되는 일종의 ‘샐러리북’ 개념이다.
001부터 006은 1971년에서 1973년 사이 출생하고, 1990년 후반부터 2000년 사이 등단한, 현재 한국 소설의 든든한 허리를 담당하고 있는 작가들의 작품으로 꾸렸고, 007부터 012는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반 출생하고, 2000년대 중후반 등단한, 현재 한국 소설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의 작품으로 만들어졌다.
013부터 018은 지금의 한국 문학의 발전을 이끈 중추적인 역할을 한 1950년대 중후반부터 1960년대 사이 출생 작가, 1980년대에서 1990년대 중반까지 등단한 작가들의 작품으로 꾸려졌으며, 019부터 024까지는 새로운 한국 문학의 역사를 써내려가고 있는 패기 있는 젊은 작가들의 작품으로 진행되었다.
세대별로 진행되던 핀 소설은 025~030에 들어서서는 장르소설이라는 특징 아래 묶여 출간되었고, 031~036은 절정의 문학을 꽃피우고 있는 1970년대 중후반 출생 작가들의 작품으로 꾸려졌다.
발간되었거나 발간 예정되어 있는 책들은 아래와 같다.
001 편혜영 『죽은 자로 하여금』(2018년 4월 25일 발간)
002 박형서 『당신의 노후』(2018년 5월 25일 발간)
003 김경욱 『거울 보는 남자』(2018년 6월 25일 발간)
004 윤성희 『첫 문장』(2018년 7월 25일 발간)
005 이기호 『목양면 방화 사건 전말기』(2018년 8월 25일 발간)
006 정이현 『알지 못하는 모든 신들에게』(2018년 9월 25일 발간)
007 정용준 『유령』(2018년 10월 25일 발간)
008 김금희 『나의 사랑, 매기』(2018년 11월 25일 발간)
009 김성중 『이슬라』(2018년 12월 25일 발간)
010 손보미 『우연의 신』(2019년 1월 25일 발간)
011 백수린 『친애하고, 친애하는』(2019년 2월 25일 발간)
012 최은미 『어제는 봄』(2019년 3월 25일 발간)
013 김인숙 『벚꽃의 우주』(2019년 4월 25일 발간)
014 이혜경 『기억의 습지』(2019년 5월 25일 발간)
015 임철우 『돌담에 속삭이는』(2019년 6월 25일 발간)
016 최 윤 『파랑대문』(2019년 7월 25일 발간)
017 이승우 『캉탕』(2019년 8월 25일 발간)
018 하성란 『크리스마스캐럴』(2019년 9월 25일 발간)
019 임 현 『당신과 다른 나』(2019년 10월 25일 발간)
020 정지돈 『야간 경비원의 일기』(2019년 11월 25일 발간)
021 박민정 『서독 이모』(2019년 12월 25일)
022 최정화 『메모리 익스체인지』(2020년 1월 25일)
023 김엄지 『폭죽무덤』(2020년 2월 25일)
024 김혜진 『불과 나의 자서전』(2020년 3월 25일)
025 이영도 『마트 이야기―시하와 칸타의 장』(2020년 4월 25일)
026 듀 나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었다』(2020년 5월 25일)
027 조 현 『나, 이페머러의 수호자』(2020년 6월 25일)
028 백민석 『플라스틱맨』(2020년 7월 25일)
029 김희선 『죽음이 너희를 갈라놓을 때까지』(2020년 8월 25일)
030 최제훈 『단지 살인마』(2020년 9월 25일)
031 정소현 『가해자들』 (2020년 10월 25일)
032 서유미 『우리가 잃어버린 것』 (2020년 12월 25일)
033 최진영 『내가 되는 꿈』 (2021년 2월 25일)
034 구병모 『바늘과 가죽의 시詩』 (2021년 4월 25일)
035 김미월 『일주일의 세계』 (2021년 6월 25일)
036 윤고은 『도서관 런웨이』 (2021년 8월 25일)
037 우다영 『북해에서』 (2021년 10월 25일)
038 김초엽 『므레모사』(2021년 12월 25일)
039 오한기 『산책하기 좋은 날』(2022년 2월 25일)
040 서수진 『유진과 데이브』(2022년 4월 25일)
041 한정현 『마고麻姑―미군정기 윤박 교수 살해 사건에 얽힌 세 명의 여성 용의자』(2022년 6월 25일)
042 이주란 『어느 날의 나』(2022년 8월 25일)
043 천선란 근간
044 이서수 근간
045 천희란 근간
현대문학 × 아티스트 이동기
<현대문학 핀 시리즈>는 아티스트의 영혼이 깃든 표지 작업과 함께 하나의 특별한 예술작품으로 재구성된 독창적인 소설선, 즉 예술 선집이 되었다. 각 소설이 그 작품마다의 독특한 향기와 그윽한 예술적 매혹을 갖게 된 것은 바로 소설과 예술, 이 두 세계의 만남이 이루어낸 영혼의 조화로움 때문일 것이다.
이동기
한국 현대 미술에 만화 이미지를 본격적으로 도입했으며, 1993년에 창조한 캐릭터 ‘아토마우스’가 등장하는 일련의 현대 미술 작품들로 알려진 작가이다. 2000년대 세계 미술의 ‘네오 팝neo-pop’적 흐름을 예견한 그의 작품들은 현대 사회의 다양한 요소들을 다루고 있는데, 만화, 광고, 인터넷부터 고전 회화와 추상 미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각적, 문화적 요소 들을 통해 실재와 허구, 무거움과 가벼움, 물질과 정신, 동양과 서양 등 이질적 영역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암시하고 있다.
베를린의 마이클슐츠갤러리, 암스테르담의 윌렘커스 붐갤러리, 서울의 일민미술관 등에서 30여 회의 개인전을 가졌으며, 2011년 베니스비엔날레 부대전시 ‘퓨처 패스Future Pass’, 2005년 후쿠오카아시아미술관의 ‘애니메이트Animate’등의 전시에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