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노인의 편이 아닌 것처럼 젊은이의 편도 아니지.
시간은 결국 살아 있는 모두를 배신할 걸세.
싸우다 고개를 들어보면 어느덧 자네들도 맥없이 늙어 있을 테니까.”
국가인권위의 <노인인권종합보고서>에 의하면 청년층의 56%가 고령화 사회로 인해 자신들의 일자리를 뺏겼다고 생각하고, 77%가 복지가 늘면 청년층의 부담이 증가될 것이라 대답했다고 한다. 지금 우리 사회의 노인들에 대한 시선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이 자료는 더불어 고령화 사회를 준비해야 하는 우리에게 이 문제들을 어떻게 풀어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답을 요구하기도 한다. 박형서의 소설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한다.
주인공 장길도는 젊은 시절 온 힘을 다해 국가와 조직을 위해 봉사하며 살았지만 결국 말년에 이르러서는 자신을 지켜주는 가장 큰 테두리라고 여겼던 그 국가와 조직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내기 위해 발버둥 쳐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놓인다.
모든 불행의 원인을 자신이 아닌 타자에게 돌리는, 이 자기모순의 분위기는 박형서의 이번 소설 속에서도 끊임없이 등장하고, 그 모든 불행의 원인을 사회는 노인들에게 돌린다.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 무엇을 하며 살았는지는 전혀 중요하지가 않다. 그저 그가 노인이라는 것, 이 사회의 모든 불행이 노인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만이 중요할 뿐이다.
황당하되 무계하지 않은 박형서만의 소설 세계
박형서의 문학은 현실과 괴리된 듯한 머지않은 미래에 도래하게 될 상황들을 소설의 주 무대로 끌어들여 소설적 대입을 통해 노인의 삶과 죽음이 사회를 지배하게 되는 새로운 주제로 작가의 영토를 새롭게 만들어나간다.
담담한 문체와 무심한 듯 군더더기 없는 문장, 적절한 곳에 배치되는 소설적 소도구들은 자칫 무거워질 수 있는 소설의 주제를 서정적으로 응축시켜내며 그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현실의 정중앙을 시원하게, 전복적으로 드러낸다.
이런 과정을 통해 상상 속에서나 가능할 법한 것이라 여겨지던 이야기들은 소설 전면으로 부각되고 작가는 그 혼돈 상황 속에 질서를 부여하며 서사의 구조적 완결성과 리얼리티를 높인다. 마치 소설은 현실의 반영이 아닌 그저 엉망인 이 현실을 정리해 보여주는 것이란 듯. 현실은 이야기 속에 숨어 있다는 듯.
▲ 줄거리는
장길도는 국민연금공단의 노령연금TF팀 팀장으로 재직하다 퇴직을 했다. 사명감과 충성심으로 똘똘 뭉쳐 누구보다 자기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했던 장길도는 그러나 퇴직 후 몸담던 조직과 맞서는 신세가 된다.
지병으로 오랫동안 병원에 누워 있는 장길도의 아홉 살 연상 아내 한수련이 오래전부터 노령연금을 부어왔고, 연금의 수급자였음을 알게 된 것이다. 노령 인구의 폭발적 증가로 연금이 고갈될 처지에 놓인 연금공단은 조직적으로 은밀하게 수급자들을 제거해왔고, 이제 그의 아내 한수련도 그 대상이 된다.
나라와 조직이 무엇보다 우선이던 장길도는 자신의 아내가 공단의 제거 대상이 되자 모든 사고에 혼란을 느끼고, 아내의 죽음을 막으려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그러나 동료, 후배 들의 계속되는 살해 시도에 결국 아내는 목숨을 잃고 장길도 역시 죽음을 맞이한다.
▲ 해설 중에서
모든 게 다 현실이고, 모든 게 다 소설이다
모든 게 다 무정하고, 모든 게 다 유정하다
국가가 개인의 사랑을 해쳐서는 안 된다는 장길도의 신념은 결국 좌절에 이른다. 나는 소설을 덮고 장길도의 마음을 생각해본다. 늙은 그들의 젊음은 어디에 있는가. 물론 장길도는 이렇게 되물을 것이다. 젊은 당신들의 늙음은 어디 있나? 아니, 젊음은? 이 소설은, 영원히 목에 남은 아담의 사과 같은 ‘사과 두 알의 사랑’을 대답으로 들려준다. 작가의 대답은 읽는 이들에겐 결코 가볍지 않은 물음의 방식으로 스며들 것이다.
―이영광, 「작품해설」 중에서
▲ 작가의 말 중에서
지난해 프랑스 엑상프로방스에 갔다. 청명한 하늘로 이름난 고장이었다. 내가 머물던 보발롱 거리에서는 세잔의 작업실이 지척이었고, 눈부신 생빅투아르산도 손에 잡힐 듯 보였다. (……) 하지만 그 많은 낭만 중 어느 하나도 잡지 못했다. (……) 10월 중순, 그리고 마침내 탈고한 건 다시 그로부터 한 달도 더 뒤의 일이었다. (……) 엑상프로방스의 황금 계절에 영영 돌아오지 않을 내 여유로운 시간까지 덤으로 얹어 이 소설 한 편과 바꿨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길 빈다.
▲ 본문 중에서
장길도는 국가에 봉사한다는 자부심으로 오랫동안 살아왔다. 아니라면 저 많은 노인들을 처리할 때 필연적으로 들러붙는 죄책감, 동족 살해에 대한 본능적인 혐오감을 극복하지 못해 정신이 이상해졌을 것이다. 군인들이 외부의 적과 대치하는 동안 장길도는 내부의 적과 대치해왔다. 둘 중 어느 한쪽의 결기와 희생이 덜하다고 말할 수 없다. 장길도는 사명감과 충성심이 투철한 사람이었고, 바로 그 덕분에 팀장의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 적어도 현재의 노령연금TF팀 중에는 장길도만큼 길고 화려한 이력을 지닌 외곽 공무원이 없었다.
그런데 그 팀이, 그 조직이, 그 국가가 아내를 해치려는 중이었다.
-pp. 42-43
병원에 도착한 지 닷새가 되던 날 밤에 원 씨는 병실 창문을 통해 아래로 떨어져 사망했다. 누구든 잡히기만 하면 실력을 보여주려고 벼르는 의사가 주변에 득실거렸음에도 이번엔 심장이 파열되었기 때문에 어찌 손써볼 틈이 없었다.
그런데, 왜?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모두의 추측은 비슷했다. 원 씨는 늙었다. 가진 게 없고, 별 희망도 없고, 하루하루 지치기만 했다. 살아 있으면 뭐 하나. 병원비는 또 누가 내나. 왜 굳이 이 고생을 하나.
그랬던 게 아닐까.
이러한 추측은 꽤 합리적이어서 부검이 생략되었다. 국가는 모든 죽음을 부검할 만큼 한가하지 않다.
그게 다 국민의 세금이다.
-pp. 51-52
적색 리스트에 오른 과다 수급자를 처리할 때 노령연금TF팀의 외곽 공무원들은 주로 ‘가능성을 높인다’고 표현한다. 어차피 인생은 수많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사람의 목숨이란 참으로 질긴 것 같으면서도 또 한편으로 보면 피로 가득 찬 풍선과 다를 바 없다.
-pp. 55-56
지하철은 늙은이가 밥 먹는 속도로 달렸다. 하지만 불평하는 사람은 없다. 어차피 시간이 남아도는 이들만 지하철을 타기 때문이다. 장길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온통 노인들이었다. 하나같이 ‘내가 경험이 많아 다 안다’는 표정과 ‘나이 들어서 창피하다’는 표정을 함께 짓고 있었다. 전자는 별로 믿음이 가지 않았고, 후자는 너무 당연해 하나 마나 한 소리였다. 그들의 무임승차를 벌충하기 위해 젊은이들의 지하철 요금은 어지간한 밥 한 끼 값을 넘은 지 오래다. 값싼 고령 인력 때문에 제대로 된 직장도 갖지 못하는 젊은이들이 지하철을 이용하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pp. 72-73
“자살이지 뭐. 어쩔 수 없던 거지.”
“뭐를?”
“싫은 거지.”
“뭐가?”
“제가 늙은 게 싫은 거지. 유서에 이런저런 사연을 남겨봤자 조사해보면 결국은 그게 그거지, 팍삭 늙은 게 싫은 거지.”
“그게, 그런 건가?”
“암 그렇고말고. 그래서 자신을 공격하는 거지.”
“자신을 공격하는 사람도 있나?”
“있지.”
“누구?”
“늙은이들.”
-pp. 82-83
은퇴한 전직 공무원 장 씨(70세, 남)는 서울 성북구 자신의 집에서 전깃줄로 목을 맨 채 발견되었다. 서랍에서 나온 달랑 넉 줄짜리 유서에는 오래 앓던 아내의 죽음에 상심하여 삶의 동기를 잃었다고 적혀 있었다. 장 씨 부부를 오래 보아온 이들은 아내를 떠나보낸 장 씨가 자살을 안 했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거라고 입을 모았다. 사람들이 상처받은 서로에게 더 관심을 갖지 않는 한 이러한 죽음은 끝없이 계속될 것이다.
그 덕에 사회는 숨통을 트고, 한층 젊어진다.
-p. 83
“사실 내 아내가 적색 리스트에 오른 건 좀 문제가 있다네. 내가 봤는데, 그간 수령액이 한 80%쯤에 불과하더군. 적색 리스트에는 보통 100% 수급자들이 오르잖은가.”
장길도의 말에 젊은이가 싸늘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당신 와이프가 올해 79, 그렇지?”
장길도가 뭐라 대답하기 전에 젊은이가 말했다.
“연금이 저축해둔 돈 찾는 게 아닌 거 알잖아. 생산인구 소득을 거둬 비생산인구들에게 나눠주는 거야. 요새 청년 세 명이 노인 일곱 명을 부양하고 있어. 청년들이 100만 원씩을 벌면 너희 늙은이들한테 쪽쪽 빨려서 집에는 대략 50만 원씩 가져간단 말이야. 그 돈으로 애인 만나 찻집에 가고 결혼을 하고 애도 낳아 기르고 월세도 내야 돼. 나머지 50만 원은 당신 같은 늙은이들한테 갖다 바치고 말이야. 뭐, 80%쯤이라고? 80%면 괜찮은 거야? 이봐 장길도 씨, 양심이 좀 있어야지!”
-pp. 125-126
“왜 안 죽어? 응? 늙었는데 왜 안 죽어! 그렇게 오래 살면 거북이지 그게 사람이야? 요즘 툭하면 100살이야. 늙으면 죽는 게 당연한데 대체 왜들 안 죽는 거야! 온갖 잡다한 병에 걸려 골골대면서도 살아 있으니 마냥 기분 좋아? 기분 막 째져? 어제도 출근하다 보니 어떤 노파가 횡단보도를 점거하고는 5분 동안 건너더라고. 영락없이 지각을 해서 이사장님한테 꾸중 들었지 뭐야. 나라 전체가 그래. 사방이 꽉 막혀서 썩어가고 있어. 하는 일이라고는 영혼이 떠나지 않도록 붙들고 있는 게 전부인 주제에 당신들 대체 왜 우리 사회에 아직 남아 있는 거야!”
-pp. 126-127
수련 씨와의 근사한 40년.
장길도는 생각했다.
길지 않았다. 정말 짧았다.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그리고 이제 수련 씨는 없다.
싹 죽여버리고 싶은 새파란 개새끼들만 있다.
바보, 뭐가 애국이고 국가냐. 수련 씨 같은 착한 노인을 죽여야 유지되는 게 무슨 나라냐. 이따위 나라는 한시바삐 멸망해주는 게 인류에 대한 기여다.
-pp. 129-130
전부 끝난 것이다. 장길도는 이틀간의 전력 질주 속에서 분실해버린 단어들을 하나둘 속으로 헤아려보았다. 누나, 스승과 동료, 자존심, 신뢰, 명예, 애국……. 너무 많고 또 너무 뜨거워 속이 바짝바짝 탔다. 새콤한 사과 한 알이 먹고 싶었다. 아니다. 사과를 먹고 싶은 게 아니다. 사과 따위는 개한테 줘버려도 좋다. 그깟 사과가 뭐라고 그걸 구하려 밤새 달렸던 자신의 젊음과 자다 말고 벌떡 일어나 사과 두 알을 꼭지째 우적우적 씹어 먹던 수련 씨의 젊음, 그토록 수많은 게 가능했던 젊음, 그리고 이제는 영영 잃어버린 저 새파란 젊음이 그리운 것이다.
-p. 133
“자네들은 가망이 좀 있는 거 같은가? 이길 것 같아? 아닐세. 곰곰이 따져보면 자네들도 가망 없긴 마찬가지야. 시간이 노인의 편이 아닌 것처럼 젊은이의 편도 아니지. 시간은 결국 살아 있는 모두를 배신할 걸세. 싸우다 고개를 들어보면 어느덧 자네들도 맥없이 늙어 있을 테니까.”
-p. 134
월간 『현대문학』이 펴내는 월간 <핀 소설>, 그 두 번째 책!
<현대문학 핀 시리즈>는 당대 한국 문학의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첨예한 작가들을 선정, 월간 『현대문학』 지면에 선보이고 이것을 다시 단행본 발간으로 이어가는 프로젝트이다. 여기에 선보이는 단행본들은 개별 작품임과 동시에 여섯 명이 ‘한 시리즈’로 큐레이션된 것이다. 현대문학은 이 시리즈의 진지함이 ‘핀’이라는 단어의 섬세한 경쾌함과 아이러니하게 결합되기를 바란다.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은 월간 현대문학이 매월 내놓는 월간 핀이기도 하다. 매월 25일 발간할 예정이 후속 편들은 내로라하는 국내 최고 작가들의 신작을 정해진 날짜에 만나볼 수 있게 기획되어 있다. 한국 출판 사상 최초로 도입되는 일종의 ‘샐러리북’ 개념이다.
001부터 006은 1971년에서 1973년 사이 출생하고, 1990년 후반부터 2000년 사이 등단한, 현재 한국 소설의 든든한 허리를 담당하고 있는 작가들의 작품으로 꾸려진다.
007부터 012는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반 출생하고, 2000년대 중후반 등단한, 현재 한국 소설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의 작품으로 꾸려질 예정이다.
발간되었거나 발간 예정되어 있는 책들은 아래와 같다.
001 편혜영 『죽은 자로 하여금』(4월 25일 발간)
002 박형서 『당신의 노후』(5월 25일 발간)
003 김경욱(6월 25일 발간 예정)
004 윤성희(7월 25일 발간 예정)
005 이기호(8월 25일 발간 예정)
006 정이현(9월 25일 발간 예정)
007 정용준(10월 25일 발간 예정)
008 김성중(11월 25일 발간 예정)
009 김금희(12월 25일 발간 예정)
010 손보미(2019년 1월 25일 발간 예정)
011 백수린(2019년 2월 25일 발간 예정)
012 최은미(2019년 3월 25일 발간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