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샘 마을의 나와 S, 상미는 친구로 자랐다. 상미와 S 사이에는 요약할 수 없는 과거가 있었고, 나와 S 사이에도 많은 상처를 남긴 가족사가 있었지만 이 모두를 뒤로하고 상미와 나는 성인의 문턱에서 결혼했다.
나와 상미는 결혼 후 연고 없는 프랑스로 갔다. 결혼 10년 만에 아이가 생겼지만 내가 출장으로 집을 비운 어느 날 상미의 불의의 사고로 뱃속의 아이를 잃었다. 사고가 일어나던 그날 S가 우리 집을 방문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지만 나는 상미에게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사고 이후 다시 쫓기듯 그곳을 떠나 우리는 한 마을에 정착했고 거기에 작은 화방을 열었다. 오랜만에 몰두할 수 있는 무언가가 생긴 덕에 잠시 활기가 생기기도 했지만 우리 사이의 근본적인 관계의 회복은 불가했다. S를 빼고는 설명되지 않는 사이였기 때문이다.
큰아버지를 배신한 아버지, 그리고 그 배신을 방조하거나 혹은 도운 나, 무엇보다 상미를 차지한 나는 S에게 씻을 수 없는 죄가 있었고, 상미는 나를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그 모든 것을 S에게 고백하고 용서 받기를 바랐다. 그럼에도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 나는 결혼생활 내내 상미 앞에 떳떳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그런 탓에 S를 그리워할 수도, 궁금해할 수도 없었다. 그것은 더 이상 우리 행복의 모든 것이었던 파랑대문 집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우리는 서로에게 점점 말을 잃어갔다.
부채의식 속에 살아가던 나는 결국 모든 것을 S에게 고백하기로 마음먹고, 하루하루 그날의 이야기를 USB에 담았다. 늦은 고백을 통해서라도 진정한 자유를 얻기로 한 것이었다. 상미는 홀연 한국으로 떠나버린 내가 남긴 녹음 파일을 들으며 여전한 그녀의 일상을 이어갔다. 연극 무대를 준비하기도 하고, 말을 잃은 성호의 딸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그동안 억누르고 참았던 자신의 이야기를 비로소 하기 시작한다.
“말할 수 없었던 말들이 말해진 뒤, 참회와 속죄가 이루어진 이후의 삶에는 무엇이 남겨질까. 이미 누군가 사라진 자리에, 어떤 언어와 시간들이 그 자리를 채울 수 있을까. 『파랑대문』은 결코 가 닿을 수 없는 고백으로 그 마지막 이야기를 이어간다. (……) 그러니까 최윤의 ‘침묵’은 형언하지 못하는 날들의 절망뿐만 아니라 오직 언어로만 다시 가능할 이야기들을 상상하며 감내하는 안간힘의 시간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 시간들이 고이 고였다 흘러내리는 자리에 마법처럼 눈물이 흐를 수 있기를.”(임세화)
표4
파랑blue이면서 동시에 파랑wave이기도 한,
진실한 ‘인간’의 언어를 배워가는 과정
나는 모진 세파의 파랑波浪을 견뎌내고 그 자리에 남아 있는 인물들이 돌아가는 장소에서 만날 파랑대문은 가장 눈부시게 투명한 색으로 빛나야 한다고 믿는다. 그것은 그저 믿음 혹은 환상에 불과하다고 비난받아도 반박할 도리가 없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그 환상이 여전히 소설을 읽고 나서 눈물짓게 하는 원동력임을 알고 있다. 아직 삶이라는 불투명한 지속의 상태에 머무르는 인간들에게 언어는 불완전한 도구이기에 그것을 수신하는 독자들의 믿음이 돕지 않으면 파도처럼 번져나가는 의미의 파동도 언젠가는 스러지고 말 것이다. 최윤의 소설은
침묵에서 말을 꺼내, 그것을 주고받는 사람들의 믿음 위에 살그머니 걸쳐놓는 일의 힘겨움에 대해 직접 증언하고 있다.
-이소연, 「작품해설」 중에서
본문 중에서
결국 S를 피해 여기까지 왔다. 단순한 이름 이상의 S!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 많은 것, 생각이 앞으로 나가는 것을 막는 모든 것을 넣어두는 문 닫힌 골방 같은 것? 무엇이건 그 골방에서 찾지 않으면 앞으로 나가지지 않는 꿈속의 미로 같은 것. 그 문을 열기만 하면 기억의 잡동사니 사이에서 무언가 실마리가 찾아질지도 모르지만 골방 앞을 매일 외면하고 지나간다.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이 나올까봐 다가가기 두려운 그 문.
-64쪽
어릴 적 우리는 구름샘 마을의 3형제, 그 이상이었다. 자라면서 친구가 되었고 나와 그녀는 성인 문턱에서 결혼했다. 우리에게는 연애의 과정이 없었다. 그녀와 S 사이에는 간단히 요약할 수 없는 역사가 있다. 나와 S 사이에도 많은 상처를 남긴 가족사가 있다. 어느 집엔들, 어떤 가족 사이엔들 전쟁이 없을 것인가. 중요한 것은 결과다. 시간이 지나고 그녀는 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와 S의 사이에는, 나와 S 사이에는 깊은 심연이 놓이게 되었다. 누구 때문이라고는 말하지 말자. 우리 각자의 실수가 모여 우리의 운명을 만들었다.
-68-69쪽
트럭에 대강 짐을 챙겨 야반도주해 큰아버지네 마당에 도착한 날 아침을 나는 너무도 잘 기억하고 있다. 짐 사이에 끼어 누나 옆에서 잠을 깨니 생소한 곳에 와 있었다. 스산한 아침, 겨우 눈을 떴을 때 눈에 들어온 굳게 잡은 작고 통통한 두 개의 손. 잡은 손에서 갈라지는 두 가지를 따라가 보니 이쪽저쪽에 두 얼굴이 있었다. 미소를 띠고 사촌을 맞기 위해 달려 나온 한 소년. 그 소년의 손을 힘주어 잡고 새로운 마을 식구가 될 트럭 위의 소년을 큰 눈망울로 집중해서 바라보던 한 소녀. 선잠에서 깨어 투정할 나이 일곱 살 때였다.
-96쪽
사실은 우리 이리로 도망 왔어. 대안이 없어서. 너도 눈치챘겠지만 아기가 죽었어. 10년 만에 생겼는데 말이야. 다시 뺏긴 거야. 당연해. 우리는 둘 다 자격이 없었거든. 아기를 잃고 난 다음에야 알았어. 그런데 대체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지. 네가 알다시피 시작이 잘못되었지. 어떻게 바로잡아야 할지 모르겠어. 그게 다가 아니거든…….
-118쪽
S가 건사하는 부친의 유업은 번창했다. 그의 말더듬증이 비결인 듯, 주변에는 속이는 사람 못지않게 그를 돕는 사람들이 있었다. 말을 잃은 대신 새로운 재능을 부여받은 것 같았다. 그의 소유가 된 물려받은 땅만은 유독 값이 치솟아, 건축업을 하던 지향이네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그곳에 전원주택 단지를 짓게 되었다. 대성공이었다. S는 그중의 한 채를 우리들을 위해 남겨두었다.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집 이름을 지었다. ‘파랑대문 집’.
-123쪽
이것을 내가 너희 둘에게 전할 때가 언제가 될는지 나는 알 수 없다. 이 녹음 파일이 네게 먼저 도착할지 내가 그 전에 네 앞에 나타날지 그건 잘 모르겠어. 그 전에 내가 이 파일을 모두 삭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볼 수 있겠지. 나는 가끔 이 파일을 듣고 있을 너와 상미를 생각해. 그러나 아무것도 상상할 수가 없어. 너, S의 얼굴도, 상미의 얼굴도 떠오르지가 않아. 블랙아웃이야.
-146쪽
“너와 약속한 것 이제 실행하려고 해.”
걸으면서 나는 소리 내어 그 문장을 발음해본다. 천천히, 외국어를 처음 배운 사람처럼 어색하게. 그래 이 문장은 내게는 외국어다. 외국어처럼 반복해본다. 우선 상미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 상미가 요청한 단 하나의 결혼 조건은 내가 S에게 가서 모든 것을 고백하고 용서를 얻어오라는 것이었다.
-165-166쪽
“성호야 나는 고향에 가도 갈 데가 없어. 아니지 누구네 집에나 갈 수 있지만 그래도 그건 좀 그렇잖아.”
애를 셋이나 키우다 보니 성호에게는 자면서 듣는 기술이 생긴 모양이다. 그는 조금도 창피해하거나 미안한 기색도 없이 부스스 깨어나 대답했다. 마치 자기 집이니 가라는 듯이.
“뭐 걱정이야. 파랑대문 집에 가면 되잖아.”
-186쪽
월간 『현대문학』이 펴내는 월간 <핀 소설>, 그 열여섯 번째 책!
<현대문학 핀 시리즈>는 당대 한국 문학의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첨예한 작가들을 선정, 월간 『현대문학』 지면에 선보이고 이것을 다시 단행본 발간으로 이어가는 프로젝트이다. 여기에 선보이는 단행본들은 개별 작품임과 동시에 여섯 명이 ‘한 시리즈’로 큐레이션된 것이다. 현대문학은 이 시리즈의 진지함이 ‘핀’이라는 단어의 섬세한 경쾌함과 아이러니하게 결합되기를 바란다.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은 월간 현대문학이 매월 내놓는 월간 핀이기도 하다. 매월 25일 발간할 예정이 후속 편들은 내로라하는 국내 최고 작가들의 신작을 정해진 날짜에 만나볼 수 있게 기획되어 있다. 한국 출판 사상 최초로 도입되는 일종의 ‘샐러리북’ 개념이다.
001부터 006은 1971년에서 1973년 사이 출생하고, 1990년 후반부터 2000년 사이 등단한, 현재 한국 소설의 든든한 허리를 담당하고 있는 작가들의 작품으로 꾸렸고, 007부터 012는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반 출생하고, 2000년대 중후반 등단한, 현재 한국 소설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의 작품으로 만들어졌다.
013부터 018은 지금의 한국문학의 발전을 이끈 중추적인 역할을 한 1950년대 중후반부터 1960년대 사이 출생 작가, 1980년대에서 1990년대 중반까지 등단한 작가들의 작품으로 이어질 예정이다.
발간되었거나 발간 예정되어 있는 책들은 아래와 같다.
001 편혜영 『죽은 자로 하여금』(2018년 4월 25일 발간)
002 박형서 『당신의 노후』(2018년 5월 25일 발간)
003 김경욱 『거울 보는 남자』(2018년 6월 25일 발간)
004 윤성희 『첫 문장』(2018년 7월 25일 발간)
005 이기호 『목양면 방화 사건 전말기』(2018년 8월 25일 발간)
006 정이현 『알지 못하는 모든 신들에게』(2018년 9월 25일 발간)
007 정용준 『유령』(2018년 10월 25일 발간)
008 김금희 『나의 사랑, 매기』(2018년 11월 25일 발간)
009 김성중 『이슬라』(2018년 12월 25일 발간)
010 손보미 『우연의 신』(2019년 1월 25일 발간)
011 백수린 『친애하고, 친애하는』(2019년 2월 25일 발간)
012 최은미 『어제는 봄』(2019년 3월 25일 발간)
013 김인숙 『벚꽃의 우주』(2019년 4월 25일 발간)
014 이혜경 『기억의 습지』(2019년 5월 25일 발간)
015 임철우 『돌담에 속삭이는』(2019년 6월 25일 발간)
016 최 윤 『파랑대문』(2019년 7월 25일 발간)
017 이승우(근간)
018 하성란(근간)
019 임 현(근간)
020 정지돈(근간)
021 박민정(근간)
022 최정화(근간)
023 김엄지(근간)
024 김혜진(근간)
현대문학 × 아티스트 정희승
<현대문학 핀 시리즈>는 아티스트의 영혼이 깃든 표지 작업과 함께 하나의 특별한 예술작품으로 재구성된 독창적인 소설선, 즉 예술 선집이 되었다. 각 소설이 그 작품마다의 독특한 향기와 그윽한 예술적 매혹을 갖게 된 것은 바로 소설과 예술, 이 두 세계의 만남이 이루어낸 영혼의 조화로움 때문일 것이다.
정희승
1974년 서울 출생. 홍익대 회화과 졸업. 런던컬리지 오브 커뮤니케이션London College of
Communication 사진학과 학사와 석사과정 마침. 삼성미술관 리움, 서울시립미술관, 아트선재센터를 비롯한 국내와 뉴욕, 런던 등지에서 수차례 전시 개최. <송은미술대상 우수상> <박건희문화재단 다음작가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