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모든 시대 모든 문명의, 모든 청춘들이 토해내는 묵시들의 수호자
조현은 2008년 등단 이후 독특한 우주적 상상력으로 무장한 일곱 편의 단편을 담은 『누구에게나 아무것도 아닌 햄버거의 역사』와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에서 펼쳐지는 아이덴티티와 사랑에 관한 일곱 편의 이야기가 실린 『새드엔딩에 안녕을』이라는 두 권의 소설집을 출간했다. 등단과 동시에 문단의 기대주로 떠오르며 활발한 활동을 한 것에 비하면 과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과작의 원인은 동년배 작가들과는 사뭇 다른 그의 문학적 행보에서 찾을 수 있다. 조현은 순문학 작가들에게는 전혀 다른 영역이라 여겨졌던 장르소설에 다가갔고, 그 관심사들을 하나씩 본인의 작품에 녹여냈다. 그리고 등단 12년 만에, 그 세계관들을 집약한 소설 『나, 이페머러의 수호자』를 선보이게 됐다.
미합중국 대통령의 무해한 취미생활을 서포트하는 것이 재단 설립의 취지라는, 재단법인 ‘세계희귀물보호재단’. 수상쩍은 이 글로벌 재단 구성원들의 주 업무는 야생 동식물에서부터 오컬트의 유산까지, 전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희귀품에 대한 자료조사 및 수집이다. 여러 번의 구직 활동 끝에 이곳에 인턴으로 일하게 된 나는 조선시대의 성인용품부터 벽사부적에 이르기까지 온갖 골동품의 조사 활동과 재단의 여러 테스트를 거친 뒤 마침내 계약직 연구원으로 임용된다. 하지만 계약직이라는 신분은 여전히 불안하고 암담하기만 하다.
그즈음 미국 CIA에 ‘마이스터 X’로부터 경매에 참가하라는 초청장이 날아오고 CIA는 세계평화에 변수가 될 수 있는 물품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이 경매에 나와 나의 보스 제인에게 참여를 권한다. 마이스터 X가 원하는 물품을 제출해 평가를 받아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는 이 경매에 참여하기까지 다른 나라의 정보기관 요원들과 총격전도 벌이는 등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우리는 회심의 물품을 들고 마이스터 X가 초청한 유럽의 고성에 무사히 도착한다.
정규직이 되어 여자친구와의 안정적인 미래를 설계하고자 나는 경매에 전투적으로 매달리고, 경매 과정 중 환각의 상태 속에 마이스터 X의 질문을 받으며 세 가지의 시험에 빠지게 된다.
“그러니 선택된 자여, 시험하라! 독사doxa, 너의 미궁을 시험하라! 에피스테메episteme, 너의 시대를 시험하라! 이데아idea, 너의 우주를 시험하라!”(153쪽)
시험의 과정을 통해 나는 이페머러를 이용하고자 했던 내 모습을 돌아보며, 그것들이 한 번 읽고 버려도 되는 잡동사니가 아니라 각자의 고통에 찬 묵시록이라는 것을, 내 인생의 든든한 버팀목이던 여자친구 역시 지금 자신만의 묵시록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마이스터 X가 각국 경매자들에게 경매를 위해 준비하도록 한 각종 묵시의 이페머러는 버림받은 자들의 고통을 왜곡한 표현이자, 현실의 아픔을 측정하고 헤아리는 도구가 된다. 그러니까 이페머러는 소설에서 주인공 ‘나’의 스펙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자신에게 닥친 시련을 극복해낼 도구로 적극 재활용되면서 새로운 의미를 띠게 된다.” (복도훈)
작가의 말
누구나 저마다의 묵시록을 품고 인생을 살아간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자주 연옥이 살갗을 스치는 일상 속에서 우리 모두 가끔은 기이한 기적을 체험하며 살아갔으면. 그리고 이 책을 선택해주신 독자님과 앞으로도 좋은 인연으로 뵈었으면. 독자님이야 말로 진정한 이페머러의 수호자이니까요.
표4
음모론과 UFO,
휴거, 오컬트, 묵시록, 일루미나티……
당신이 기다리던 진짜 소설이 온다!
조현의 『나, 이페머러의 수호자』는 행복한 결말로 끝난다. (……) 조현 소설의 제목을 다시 빌리면 ‘새드엔딩에 안녕을’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제 알게 된다. 이 소설은 어쩌면 빙의 들린 언어, 언령의 생생한 체험담이자 문학에 대한 믿음을 다시금 확인하는 이야기라는 것을. 황당해 보이는 소녀의 묵시적 환상이 실린 공책과 식민지 젊은이들의 죽음과 부활을 기록한 애가, 그리고 광화문의 세 모녀의 가계부가 만나 빙의하는 순간에 대한 증언이라는 것을. “내가 언어로 읽어낸 무수한 존재들이, 차원을 이격하여, 빙의하여, 한 몸으로 겹쳐”지는 언어의 고통스러운 황홀에 대한 신뢰라는 것을.
-복도훈, 「작품해설」 중에서
본문 중에서
그런 술자리를 마치고 여자친구를 바래다주는 밤이면 서로 손을 잡지 못했다. 그런 밤, 길들은 미궁으로 변해 뒤섞이고 사물은 뾰족한 모습으로 변해 20대의 청춘을 찔렀다
-21-22쪽
사실 나 역시 지금껏 살아오면서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현실이란 이름의 괴물이 날리는 핵펀치에 굴복해 미리 세워놓은 그럴싸한 계획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러니 결론은 처맞기 전까지 더 그럴싸한 계획을 세워둬야 한다는 것.
-85쪽
본부의 비밀 수장고로 이송될 만큼의 가치는 인정받지 못해 극동아시아의 창고에서 언젠가 누군가가 키스로 깨워주길 바라는 백설공주처럼 곱게 잠들어 있던, 그러니까 마이스터 X의 조건에 들어맞을지 모르는 이페머러 한 뭉치.
-87쪽
마감 시간을 앞둔 대형마트에서 ‘1+1’ 특가 세일을 알리는 안내 방송처럼 경매 시작가가 선포되고, 고개를 쳐든 미어캣들이 히틀러 애인의 유골이라는 말에 잠시 충격에 빠져 입을 떡 벌리는 사이에─물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미디어파사드의 흑백 화면은 폭격으로 폐허가 된 건물더미에서 일단의 소련군이 중장비를 동원해 땅을 파헤치는 장면으로 바뀌었다
-109-110쪽
모든 시대에는, 모든 시대만의, 묵시가 있습니다. 지난 세기의 소동을, 지켜본 기자가 대답했다. 묵시를 보는 데는, 나이가, 성별이, 금 그어진 국경이, 필요 없어요. 오히려 젊을수록 더 묵시를 본답니다. 어느 시대나, 연옥은, 청춘에게 가장 잘, 펼쳐지니까요.
-175쪽
모든 세대는 묵시를 본다, 모든 시대의 모든 이들은, 저마다의 묵시록을 쓴다, 누군가는, B5 크기의 노트에 59쪽 분량으로 쓰고, 맨 마지막 페이지에, 드디어 휴거 날 아침이다, 오늘 나에게, 누군가가 선뜻 말을 걸고, 부라보콘도 사줄 거다, 이후로 벌어질 일들이, 기다려진다, 무섭기도 하다, 라고 쓴다. 또 누군가는, 휴대폰 문자로, 손가락 한 마디 분량으로, 지금 나는 너무 무섭다고, 짧은 묵시록을 쓰기도 한다.
-187쪽
이페머러의 수호자들은 또한 모든 시대의, 모든 문명의, 모든 인민人民이 토해내는 묵시들의 수호자라는 것을. 그리고, 이제, 나 역시, 이페머러의 수호자.
-198-199쪽
월간 『현대문학』이 펴내는 월간 <핀 소설>, 그 스물일곱 번째 책!
<현대문학 핀 시리즈>는 당대 한국 문학의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첨예한 작가들을 선정, 월간 『현대문학』 지면에 선보이고 이것을 다시 단행본 발간으로 이어가는 프로젝트이다. 여기에 선보이는 단행본들은 개별 작품임과 동시에 여섯 명이 ‘한 시리즈’로 큐레이션된 것이다. 현대문학은 이 시리즈의 진지함이 ‘핀’이라는 단어의 섬세한 경쾌함과 아이러니하게 결합되기를 바란다.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은 월간 『현대문학』이 매월 내놓는 월간 핀이기도 하다. 매월 25일 발간할 예정인 후속 편들은 내로라하는 국내 최고 작가들의 신작을 정해진 날짜에 만나볼 수 있게 기획되어 있다. 한국 출판 사상 최초로 도입되는 일종의 ‘샐러리북’ 개념이다.
001부터 006은 1971년에서 1973년 사이 출생하고, 1990년 후반부터 2000년 사이 등단한, 현재 한국 소설의 든든한 허리를 담당하고 있는 작가들의 작품으로 꾸렸고, 007부터 012는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반 출생하고, 2000년대 중후반 등단한, 현재 한국 소설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의 작품으로 만들어졌다.
013부터 018은 지금의 한국 문학의 발전을 이끈 중추적인 역할을 한 1950년대 중후반부터 1960년대 사이 출생 작가, 1980년대에서 1990년대 중반까지 등단한 작가들의 작품으로 꾸려졌으며, 019부터 024까지는 새로운 한국 문학의 역사를 써내려가고 있는 패기 있는 젊은 작가들의 작품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발간되었거나 발간 예정되어 있는 책들은 아래와 같다.
001 편혜영 『죽은 자로 하여금』(2018년 4월 25일 발간)
002 박형서 『당신의 노후』(2018년 5월 25일 발간)
003 김경욱 『거울 보는 남자』(2018년 6월 25일 발간)
004 윤성희 『첫 문장』(2018년 7월 25일 발간)
005 이기호 『목양면 방화 사건 전말기』(2018년 8월 25일 발간)
006 정이현 『알지 못하는 모든 신들에게』(2018년 9월 25일 발간)
007 정용준 『유령』(2018년 10월 25일 발간)
008 김금희 『나의 사랑, 매기』(2018년 11월 25일 발간)
009 김성중 『이슬라』(2018년 12월 25일 발간)
010 손보미 『우연의 신』(2019년 1월 25일 발간)
011 백수린 『친애하고, 친애하는』(2019년 2월 25일 발간)
012 최은미 『어제는 봄』(2019년 3월 25일 발간)
013 김인숙 『벚꽃의 우주』(2019년 4월 25일 발간)
014 이혜경 『기억의 습지』(2019년 5월 25일 발간)
015 임철우 『돌담에 속삭이는』(2019년 6월 25일 발간)
016 최 윤 『파랑대문』(2019년 7월 25일 발간)
017 이승우 『캉탕』(2019년 8월 25일 발간)
018 하성란 『크리스마스캐럴』(2019년 9월 25일 발간)
019 임 현 『당신과 다른 나』(2019년 10월 25일 발간)
020 정지돈 『야간 경비원의 일기』(2019년 11월 25일 발간)
021 박민정 『서독 이모』(2019년 12월 25일)
022 최정화 『메모리 익스체인지』(2020년 1월 25일)
023 김엄지 『폭죽무덤』(2020년 2월 25일)
024 김혜진 『불과 나의 자서전』(2020년 3월 25일)
025 이영도 『마트 이야기―시하와 칸타의 장』(2020년 4월 25일)
026 듀 나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었다』(2020년 5월 25일)
027 조 현 『나, 이페머러의 수호자』(2020년 6월 25일)
028 백민석(근간)
029 김희선(근간)
030 최제훈(근간)
현대문학 × 아티스트 구본창
<현대문학 핀 시리즈>는 아티스트의 영혼이 깃든 표지 작업과 함께 하나의 특별한 예술작품으로 재구성된 독창적인 소설선, 즉 예술 선집이 되었다. 각 소설이 그 작품마다의 독특한 향기와 그윽한 예술적 매혹을 갖게 된 것은 바로 소설과 예술, 이 두 세계의 만남이 이루어낸 영혼의 조화로움 때문일 것이다.
구본창
연세대 경영학과 졸업. 독일 함부르크 조형미술대 사진 디자인 전공, 디플롬 학위 취득. 국내외 40여 회 개인전.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 필라델피아 박물관, 보스톤 미술관, 휴스턴 뮤지엄 오브 파인 아트,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삼성 리움 등 다수의 박물관에 작품 소장. 작품집 한길아트 『숨』 『탈』 『백자』, 일본 Rutles 『白磁』 『공명의 시간을 담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