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전에 시작되어 9286일 만에 끝낸 여행
마침표를 찍지 못한 모든 여행자들을 위한 이야기
2010년 단편소설 「체이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문지혁의 신작 『나이트 트레인』이 출간되었다. 1999년 유럽으로 3주 간의 배낭여행을 떠났던 20대 청년과, 그 20대 청년이 유럽 여행 기간 중 쓴 소설 속 이야기, 2024년, 자신의 20대를 되돌아보는 40대가 등장하는 세 겹의 층위를 가진 액자소설이다.
소설은 아버지가 보낸 택배 상자가 도착하며 시작된다. 상자 속에는 대학 때 열심히 듣던 은색 소니 CDP와 빛바랜 군복, 다이어리와 대학 교재, 사진, 시집, 원고 묶음 등이 들어 있다. 그 중 가장 눈길을 끈 건 녹슨 은반지였다. ‘나’는 버린 줄 알았던 은반지의 등장으로 희미해진 ‘지난 세기’의 일들을 하나씩 떠올린다.
고등학교 때 만나 ‘나’와 잠시 사귀었던 O는 작별선물로 은반지를 건넨다. 제대로 된 연애를 해보기도 전 O로부터 이별을 당한 나는 그녀가 빈에서 사온 반지를 다시 빈에 버리기 위해 유럽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일종의 애도의 의식이었던 여행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고 결국 니스 어느 바다에 반지를 버리고 돌아오지만, 어찌된 일인지 반지는 아버지가 보낸 짐에 담겨 다시 내게로 온다.
허구적 서사인 소설과 사실적 서사인 여행기 사이에 놓인 문지혁의 소설 ?나이트 트레인?의 독특한 지점은 그 첫 문장에서부터 다시 고찰되어야 한다. '1'로 번호 매겨진 서술이 시작되기 전, 서사에 집중하는 독자가 순간적으로 놓치기 쉬운 그 날짜. 바로 ‘DAY 9200 서울’ 말이다.
그 의미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다시 첫 문장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거기에 비밀이 숨겨져 있다. 여행 아닌 것이 없다는 그의 말은, 그의 서사 전체가 하나의 여행기임을 보여주는 한편, 그의 여행이 이 소설을 쓰기 전까지 종료되지 않았음을 깨닫게 만드는 것이다. 25년 전 3주간의 여행을 기록하고 있음에도 그의 서사가 ‘DAY 9200’에서 시작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그러므로 사실 이 소설은, 아직 끝나지 않은 여행을 현재진행형으로 업로드하는 과정이었다. ‘나’는 무려 9200일 동안 지속된 여행기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류수연(문학평론가)
25년 전에 시작되어 9286일간 지속된 여행은 아내와 함께하는 일상에서 마침내 마침표를 찍는다. 그곳에는 O에게 강제 이별을 당한 ‘나’가 없고, 여행 중 만난 ‘전수진’이 없고, 유럽에서 내 곁을 지켜준 ‘E’도 없다. 더 이상 ‘E’라는 이니셜이 아닌 ‘은혜’라는 이름을 가진 나의 아내와 함께하는 현재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깨닫는다. 오래전 시작된 그 여행의 진짜 목적, 그것은 바로 ‘고잉 홈’이었음을.”(류수연)
「비포 선라이즈」, 유레일패스, 야간열차로 대표되는 세기말 감성을 담아내며 미숙한 젊음과 여행의 목적에 실패한 여행을 통해 성장하는, 사랑을 경험한 사람 누구나 한 번은 겪었음직한 이야기들을 잘 풀어낸 인생이라는 여행 소설이다.
표4
이것은 여행에 관한 기록이다
하지만 인생에 여행 아닌 것이 존재할 수 있나?
1999년의 여행이 끝나고, 2024년의 여행에 대한 회상도 끝났다. 이렇게 이야기는 끝났다. ‘나’는 마지막 장면에서 쓰던 소설 뭉치를 버렸으며, 마지막으로 반지를 버리러 간다. “이 여행을 끝내기 위해.” 이것이 소설의 마지막 구절이다. 이로써 0과 1로 이루어진 사이클이 끝나고 ‘나’와 은혜, 두 사람이 남았다. 이제 둘을 1로 세는 새로운 여행이 시작될 것이다. 어디선가 반지가 발견되고, 분실했던 또 다른 소설 뭉치가 손에 들어올 것이다. 이렇게 더 큰 원환이 시작된다. 즐겁고 다정한 쳇바퀴는 이렇게 다시 돌아간다.
―양윤의, 「작품해설」 중에서
작가의 말
어느 고단한 밤에 눈을 감으면 나는 아직도 유럽 어딘가를 향해 가는 야간열차 3등칸 꼭대기 침대에 누워 있다. 온종일 더위 속에 땀 흘린 몸은 찝찝하고, 덜컹이는 열차는 척추 위로 밤새 선로를 그린다. 깊이 잠들지 못한 채 현실과 뒤섞인 꿈 아닌 꿈을 꾸다가, 눈을 뜨면 열차는 언제나 낯선 도시에 들어서는 중이다. 그로부터 27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나는 거기에 있다.
지구 반대편에서 세상의 비밀을 알고 싶었던 시절이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당신과, 나를 사랑하지 않는 당신의 비밀도. 하지만 이제 그럴 수 없다는 걸 안다. 프루스트의 말처럼, 우리가 발견하는 건 세상의 비밀이 아니다. 오직 우리 자신의 비밀뿐.
결국 그 비밀이 우리를 또 다른 여행으로 안내할 것이다. 당신과 내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으로.
Bon voyage.
본문 중에서
* 이것은 여행에 관한 기록이다.
하지만 인생에 여행 아닌 것이 존재할 수 있나?
-11쪽
* 빈의 어느 거리를 지나다가 문득 네 생각이 나서 샀어. 너 은반지 좋아한다고 했잖아? 하지만 나는 어떤 말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고 무엇도 또렷하게 보이지 않았다. 불에 타는 것 같은 화끈함과 정신을 잃을 것 같은 어지러움 속에서 나는 현실과의 가느다란 끈을 붙잡기 위해 그 반지만 쳐다보고 있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눈앞에서 반질반질하게 빛나고 있는 작고 환한 동그라미를.
-27-28쪽
* “커플링이야?”
머그잔 바닥이 보이기 시작할 무렵 누나 중 하나가 물었다. 내 왼손 약지에 억지로 끼워져 있는 반지를 보고서였다. 나는 그건 아니라고 답했다.
“근데 왜 끼고 있어?”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머뭇거리다가, 남은 핫초코를 마저 마신 다음 말했다.
“애도 기간이라서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른 일행이 모두 웃었다. 웃기려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목구멍에서 쓴맛이 올라왔다. 이게 웃기는 말인가?
-45-46쪽
* 영화가 끝나고 나서 O는 조금 울었다. 나는 어설프게 그녀를 감싸주려다가 그만 머리를 가볍게 부딪혔다. 바보 같은 짓이었다. 울다가 웃는, 아프면서 우스운 이상한 상황에서 서로 눈이 마주치자 잠깐 세상이 멈췄고 몇 초 후에는 입을 맞추고 있었다. 키스는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의 입술과 내 입술이 아주 살짝 닿아 있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고 온몸의 피가 일제히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았다. 지금! 지금! 지금! 나는 천천히 입술을 떼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코에서 나오는 숨이 내 코끝을 간지럽혔다.
“우리도 언젠가,”
나는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말했다.
“빈에 가자.”
-84-85쪽
* 빈이 가까워질수록 나는 스스로 점점 더 긴장하는 것을 느꼈다. 일행의 여행 최종 목적지는 여기가 아니지만 내 최종 목적지는 여기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모든 것이 끝난다. 반지를 버리면 그때부터 나는 자유다. 빈은 내 애도 기간이 비로소 끝나는 장소이자, 바야흐로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장소가 될 예정이었다. 나는 왼쪽 네 번째 손가락에 아직은 굳건하게 끼워져 있는 은반지를 만지작거렸다. 피곤했지만 잠이 오지 않아 조는 둥 마는 둥 하며 새벽을 맞았다. 나에게는 오직 하나의 이미지, 하나의 장소, 하나의 단어뿐이었다.
대관람차.
-97-98쪽
* 전수진의 숙소는 내가 가야 할 곳과 반대 방향이었다. 정류장에서 헤어지기 전에 전수진은 나에게 말했다.
“내일은 어디로 가?”
“베네치아요.”
“언제 이동하는데?”
“이제 역으로 가서 야간열차 타야죠.”
“일정 바꾸면 안 돼? 나랑 빈에 하루만 더 있자.
여기 아직 우리가 못 본……”
“정해진 대로 해야 해요.”
“정해진 대로?
-111쪽
* 창밖으로 더는 햇빛이 들어오지 않게 되었을 무렵, E가 한 번 더 들어왔다.
“너 무슨 병 있는 거 아니지?”
그때 나는 나에게 지병이 있고, 병명은 미주신경성 실신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으므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는 왜 왔어?”
“보면 몰라? 너 때문에 왔지.”
E는 두 손바닥을 위로 펴서 누워 있는 나를 가리켰다. 나는 E가 내 말을 오해했다는 것을 알았다.
-129쪽
* 난 반지를 좋아하는 게 아냐. 널 좋아하는 거지. 그러자 갑자기 속에서 뭔가가 튕겨 나오듯 솟아올랐고, 나는 수평선을 향해 있는 힘껏 반지를 던졌다. 작은 은반지는 공기 중에 잠시 먼지처럼 날아올랐다가 곧 흔적도 없이 에메랄드색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154쪽
* “그때 정말 왜 왔던 거야?”
“어딜?”
“유럽.”
“내가 유럽에 갔어?”
아내는 씩 웃더니 내 팔에서 손을 뺀다. 그리고 아파트 입구를 향해 먼저 걷는다.
나는 동그란 가로등 불빛을 벗어나 그림자 속으로 멀어지는 E, 아니 은혜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뒤돌아 한 번 더 수거장으로 향한다.
반지를 버리고, 이 여행을 끝내기 위해.
-190-191쪽
월간 『현대문학』이 펴내는 <핀 소설>, 그 쉰일곱 번째 책!
<현대문학 핀 시리즈>는 당대 한국 문학의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첨예한 작가들을 선정, 월간 『현대문학』 지면에 선보이고 이것을 다시 단행본 출간으로 이어가는 프로젝트이다. 여기에 선보이는 단행본들은 개별 작품임과 동시에 ‘한 시리즈’로 큐레이션된 것이다.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은 월간 『현대문학』이 분기별 출간하는 것으로, 내로라하는 국내 최고 작가들의 신작을 정해진 날짜에 만나볼 수 있게 기획되어 있다.
2026년 첫 출간되는 057번부터는 기존 6권, 4권 단위로 한 명의 표지 작가의 작품으로 묶이던 방식에서 벗어나 한 권 한 권이 한국 문학의 대표성을 가지는 것으로 새롭게 큐레이션되고, 기존 25일이던 출간일을 5일로 바꿔 내놓는다.
현대문학은 이 시리즈의 진지함이 ‘핀’이라는 단어의 섬세한 경쾌함과 아이러니하게 결합되기를 바란다
출간되었거나 출간 예정되어 있는 책들은 아래와 같다.
001 편혜영 『죽은 자로 하여금』(2018년 4월 25일 출간)
002 박형서 『당신의 노후』(2018년 5월 25일 출간)
003 김경욱 『거울 보는 남자』(2018년 6월 25일 출간)
004 윤성희 『첫 문장』(2018년 7월 25일 출간)
005 이기호 『목양면 방화 사건 전말기』(2018년 8월 25일 출간)
006 정이현 『알지 못하는 모든 신들에게』(2018년 9월 25일 출간)
007 정용준 『유령』(2018년 10월 25일 출간)
008 김금희 『나의 사랑, 매기』(2018년 11월 25일 출간)
009 김성중 『이슬라』(2018년 12월 25일 출간)
010 손보미 『우연의 신』(2019년 1월 25일 출간)
011 백수린 『친애하고, 친애하는』(2019년 2월 25일 출간)
012 최은미 『어제는 봄』(2019년 3월 25일 출간)
013 김인숙 『벚꽃의 우주』(2019년 4월 25일 출간)
014 이혜경 『기억의 습지』(2019년 5월 25일 출간)
015 임철우 『돌담에 속삭이는』(2019년 6월 25일 출간)
016 최 윤 『파랑대문』(2019년 7월 25일 출간)
017 이승우 『캉탕』(2019년 8월 25일 출간)
018 하성란 『크리스마스캐럴』(2019년 9월 25일 출간)
019 임 현 『당신과 다른 나』(2019년 10월 25일 출간)
020 정지돈 『야간 경비원의 일기』(2019년 11월 25일 출간)
021 박민정 『서독 이모』(2019년 12월 25일)
022 최정화 『메모리 익스체인지』(2020년 1월 25일)
023 김엄지 『폭죽무덤』(2020년 2월 25일)
024 김혜진 『불과 나의 자서전』(2020년 3월 25일)
025 이영도 『마트 이야기―시하와 칸타의 장』(2020년 4월 25일)
026 듀 나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었다』(2020년 5월 25일)
027 조 현 『나, 이페머러의 수호자』(2020년 6월 25일)
028 백민석 『플라스틱맨』(2020년 7월 25일)
029 김희선 『죽음이 너희를 갈라놓을 때까지』(2020년 8월 25일)
030 최제훈 『단지 살인마』(2020년 9월 25일)
031 정소현 『가해자들』 (2020년 10월 25일)
032 서유미 『우리가 잃어버린 것』 (2020년 12월 25일)
033 최진영 『내가 되는 꿈』 (2021년 2월 25일)
034 구병모 『바늘과 가죽의 시詩』 (2021년 4월 25일)
035 김미월 『일주일의 세계』 (2021년 6월 25일)
036 윤고은 『도서관 런웨이』 (2021년 8월 25일)
037 우다영 『북해에서』 (2021년 10월 25일)
038 김초엽 『므레모사』(2021년 12월 25일)
039 오한기 『산책하기 좋은 날』(2022년 2월 25일)
040 서수진 『유진과 데이브』(2022년 4월 25일)
041 한정현 『마고麻姑―미군정기 윤박 교수 살해 사건에 얽힌 세 명의 여성 용의자』(2022년 6월 25일)
042 이주란 『어느 날의 나』(2022년 8월 25일)
043 천선란 『랑과 나의 사막』(2022년 10월 25일)
044 이서수 『몸과 여자들』(2022년 12월 25일)
045 천희란 『K의 장례』(2023년 2월 25일)
046 문진영 『딩』(2023년 4월 25일)
047 임솔아 『짐승처럼』(2023년 6월 25일)
048 강화길 『풀업』(2023년 8월 25일)
049 김지연 『태초의 냄새』(2023년 10월 25일)
050 이장욱 『뜨거운 유월의 바다와 중독자들』(2024년 1월 25일)
051 김 솔 『행간을 걷다』(2024년 4월 25일)
052 김멜라 『환희의 책』(2024년 7월 25일)
053 안보윤 『세상 모든 곳의 전수미』(2024년 10월 25일)
054 예소연 『영원에 빚을 져서』(2025년 1월 25일)
055 박지영 『복미영 팬클럽 흥망사』(2025년 7월 25일)
056 위수정 『fin』(2025년 10월 25일)
057 문지혁 『나이트 트레인』
058 조해진(근간)
059 장강명(군간)
060 이주혜(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