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들지 않고 감정 소비와 시간 낭비를 하지 않는 것?
산책의 목적은 무엇일까?
2012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에 당선된 이래, 등단 3년 만인 2015년 첫 소설집 『의인법』을 펴냈고, 그 다음해인 2016년 <젊은작가상> 수상과 동시에 첫 장편소설 『홍학이 된 사나이』까지 출간하며 한국 문학의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 오한기는 본인을 화자로 내세워 소설 창작 과정을 그대로 노출하는 메타소설의 양식, 소설 속 각종 패러디와 텍스트의 인용과 차용 등을 통해 ‘소설 이후의 소설’을 끊임없이 고민하며 대담한 시도들을 이어오고 있다. 특히나 한국 문학의 가장 신선한 시도였다 평가되는 두 번째 장편소설 『나는 자급자족한다』에서는 글로벌 자본주의 시대에 자본주의와 경쟁하며 ‘새로운 역사적 적대’를 창조해낸 인물들을 생생하게 그려내며 독자들로 하여금 오한기 소설의 미래에 대해 큰 기대를 하게 했다. 작가가 이번에 발표한 소설 『산책하기 좋은 날』은 다시금 ‘오한기’를 화자로 내세워 오한기 월드의 무한 확장을 시도하고 있다.
영화사 기획자인 ‘나(오한기)’는 코로나 여파로 월급 삭감과 함께 한 달째 재택근무 중이다. 팀장은 여름을 대비해 공포영화를 기획하라고 하지만 머릿속은 온갖 잡념뿐이고, 나는 ‘산책’으로 돌파구를 마련해보고자 한다. 묵동에서 시작해 문정동에 이르기까지, 나를 찾아가보자는 대명제로 시작한 산책은 내가 살았던 공간으로 나를 이끌고, 그곳에서 뜻밖의 인물 크리스토퍼 놀런을 만난다.
“나는 미래를 위해 온 것이고, 당신은 과거를 위해 온 것이다, 나는 미래를 향해 달리고 있고, 당신은 과거를 향해 달리고 있다. 정반대 방향을 향해 달리고 있는데 우리 둘이 만났다는 게 신기하지 않냐?”(67쪽)며, 놀런은 나에게 자신의 영화에 출연해줄 것을 제안한다.
하지만 영화는 예상치 못한 난관에 빠지고, 나는 “자기 자신을 전적으로 믿고, 스스로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자신이 내린 결정이 절대적으로 옳고 지당하다“(16쪽)는 말을 되뇌며, 나의 과거를, 현재를, 그리고 미래를, 누군가의 연출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보고자 다짐한다.
불능의 현재에서 미래를 모색하는, 상상력을 동원한 ‘내가 되기’의 실험적인 삶이 여과 없이 그려진 소설이다.
작가의 말
묵동에 살 때 직접 걸었던 산책 루트를 『산책하기 좋은 날』로 가져왔다. 쓸 당시에는 현재였는데 지금은 과거가 됐다는 게 슬프기보다는 유머러스하게 여겨진다. 자양동으로 거처를 옮겼지만 나는 여전히 행정단위를 가로지르는 산책을 즐긴다. 최근에는 한강변을 따라 뚝섬에서 성수까지 걷는 걸 선호한다. 어느 날 산책을 하다가 성수공업고등학교와 성수동성당 사이에서 폐가에 가까운 초가집을 발견했다. 초가집 외벽에는 붉은색으로 앵무새 신내림이라고 쓰여 있었다. 대문이 열려 있었는데 겁이 나서 들어가지 못했다. 문제는 그 뒤였다. 호기심이 동해 몇 번을 찾아갔지만, 이상하게도 다시는 그 초가집을 찾을 수 없었다. 나는 초가집 찾기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이사 갈 때까지 초가집을 찾는 게 산책의 목표다. 며칠 전에는 산책기를 기록하기 위해 블로그도 개설했다.
소설가
목표 1조 자산가
중장거리 산책자
디저트 매니아
블로그 타이틀은 인간만만세, 닉네임은 보존지구이며, 프로필은 위와 같다.
2022년 2월
오한기
표4
저는 지금 재택근무 중입니다!
불능의 현재 속에서 미래를 모색하기
“과거는 슬프고 미래는 잘 떠오르지 않”기에 “산책은 되돌아오는 것이다”. 되돌아올 곳이 있다는 말은 곧 현재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되돌아올 걸 알기 때문에 누군가는 죽고 싶”기도 하지만, 슬프거나 잘 떠오르지 않는 시간 가운데 되돌아올 수 있어서 또 한 번 기회를 갖는 이도 있지 않을까. 그렇게 다시 선 지금 이 자리에서 “나는 어디로 갈 것인가”를 물을 때 산책은 다시 시작된다. 발걸음을 떼는 그 순간, 물음에 대한 답 또한 다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소유정, 「작품해설」 중에서
본문 중에서
* 산책에 나섰다. 구름이 적당히 끼고 선선해서 오래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제 산책에 대해 회상하다가 한강도 아니고 중랑천인데, 월릉교를 차로만 건널 수 있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가봤더니 역시 도보로도 건널 수 있는 길이 있었다. 어제는 분명 보이지 않았던 것 같은데, 오늘은 존재한다는 게 믿기지 않았고, 이게 무슨 꿈같은 일인가 생각하다가, 하루 만에 이 길을 증축해놓는 게 가능한가, 라는 질문을 던져보니 곧 망상에서 풀려났다.
-33-34쪽
* 내 나이 서른일곱. 돈만 주면 뭐든지 한다. 언제부턴가 나는 변해버렸다. 빈털터리로 보낸 세월의 영향 탓이다. 어쩌면 산책에 대한 생각 역시 변했을지도 모른다. 칼로리 소모 이상의 의미가 있어야 한다. 예전처럼 목적 없이 걷고 있으면 조바심이 난다. 변했다고 반성하고 번뇌하고 한탄하는 건 의미 없는 시간이다.
-52쪽
* 돈이 들지 않고 감정 소비와 시간 낭비를 하지 않는 것. 즉, 가성비가 좋은 산책의 목적에는 무엇이 있을까 고민하다가 찾아낸 게 있었다. 바로 나였다. 나는 가장 저렴한 주제이다. 재료는 나의 육체이고, 내면이며, 정신이다. 나는 나일뿐만 아니라, 나의 베스트 프렌드이자 소울메이트이다. 나를 따라가보자. 혹은 찾아가보자. 내면 여행을 떠나자.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는 게 아니다. 실체가 있는 여행을 해보자. 공간. 내가 살았던 공간들, 인연이 있었던 공간들을 차례로 떠올렸다.
-53-54쪽
계좌 개설!
잭이 외쳤다. 은행원은 거의 울 것 같았다. 계좌를 개설하러 왔다니까요!
내가 외쳤다. 계좌 개설!
잭이 외쳤다. 그때 청원경찰이 다가와서 여기에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일어서주십시오, 따위의 말을 했다.
안녕. 반가워. 쪼다.
잭이 청원경찰에게 지저귀었다. 드디어 때가 됐다.
당신은 가짜야, 진짜는 나고.
-110쪽
나는 와인을 한 잔 들이켜고 침대에 누웠다. 술기운이 돌았다. 갖가지 상념이 흘러들어 왔다. 재택근무가 연장됐다. 나는 다시 산책을 시작해야 한다. 나를 찾기 위한 여정은 이대로 끝난 것인가. 그럼 나는 어디로 갈 것인가.
-126쪽
월간 『현대문학』이 펴내는 월간 <핀 소설>, 그 서른아홉 번째 책!
<현대문학 핀 시리즈>는 당대 한국 문학의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첨예한 작가들을 선정, 월간 『현대문학』 지면에 선보이고 이것을 다시 단행본 발간으로 이어가는 프로젝트이다. 여기에 선보이는 단행본들은 개별 작품임과 동시에 여섯 명이 ‘한 시리즈’로 큐레이션된 것이다. 현대문학은 이 시리즈의 진지함이 ‘핀’이라는 단어의 섬세한 경쾌함과 아이러니하게 결합되기를 바란다.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은 월간 『현대문학』이 매월 내놓는 월간 핀이기도 하다. 매월 25일 발간할 예정인 후속 편들은 내로라하는 국내 최고 작가들의 신작을 정해진 날짜에 만나볼 수 있게 기획되어 있다. 한국 출판 사상 최초로 도입되는 일종의 ‘샐러리북’ 개념이다.
001부터 006은 1971년에서 1973년 사이 출생하고, 1990년 후반부터 2000년 사이 등단한, 현재 한국 소설의 든든한 허리를 담당하고 있는 작가들의 작품으로 꾸렸고, 007부터 012는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반 출생하고, 2000년대 중후반 등단한, 현재 한국 소설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의 작품으로 만들어졌다.
013부터 018은 지금의 한국 문학의 발전을 이끈 중추적인 역할을 한 1950년대 중후반부터 1960년대 사이 출생 작가, 1980년대에서 1990년대 중반까지 등단한 작가들의 작품으로 꾸려졌으며, 019부터 024까지는 새로운 한국 문학의 역사를 써내려가고 있는 패기 있는 젊은 작가들의 작품으로 진행되었다.
세대별로 진행되던 핀 소설은 025~030에 들어서서는 장르소설이라는 특징 아래 묶여 출간되었고, 031~036은 절정의 문학을 꽃피우고 있는 1970년대 중후반 출생 작가들의 작품으로 꾸려졌다.
발간되었거나 발간 예정되어 있는 책들은 아래와 같다.
001 편혜영 『죽은 자로 하여금』(2018년 4월 25일 발간)
002 박형서 『당신의 노후』(2018년 5월 25일 발간)
003 김경욱 『거울 보는 남자』(2018년 6월 25일 발간)
004 윤성희 『첫 문장』(2018년 7월 25일 발간)
005 이기호 『목양면 방화 사건 전말기』(2018년 8월 25일 발간)
006 정이현 『알지 못하는 모든 신들에게』(2018년 9월 25일 발간)
007 정용준 『유령』(2018년 10월 25일 발간)
008 김금희 『나의 사랑, 매기』(2018년 11월 25일 발간)
009 김성중 『이슬라』(2018년 12월 25일 발간)
010 손보미 『우연의 신』(2019년 1월 25일 발간)
011 백수린 『친애하고, 친애하는』(2019년 2월 25일 발간)
012 최은미 『어제는 봄』(2019년 3월 25일 발간)
013 김인숙 『벚꽃의 우주』(2019년 4월 25일 발간)
014 이혜경 『기억의 습지』(2019년 5월 25일 발간)
015 임철우 『돌담에 속삭이는』(2019년 6월 25일 발간)
016 최 윤 『파랑대문』(2019년 7월 25일 발간)
017 이승우 『캉탕』(2019년 8월 25일 발간)
018 하성란 『크리스마스캐럴』(2019년 9월 25일 발간)
019 임 현 『당신과 다른 나』(2019년 10월 25일 발간)
020 정지돈 『야간 경비원의 일기』(2019년 11월 25일 발간)
021 박민정 『서독 이모』(2019년 12월 25일)
022 최정화 『메모리 익스체인지』(2020년 1월 25일)
023 김엄지 『폭죽무덤』(2020년 2월 25일)
024 김혜진 『불과 나의 자서전』(2020년 3월 25일)
025 이영도 『마트 이야기―시하와 칸타의 장』(2020년 4월 25일)
026 듀 나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었다』(2020년 5월 25일)
027 조 현 『나, 이페머러의 수호자』(2020년 6월 25일)
028 백민석 『플라스틱맨』(2020년 7월 25일)
029 김희선 『죽음이 너희를 갈라놓을 때까지』(2020년 8월 25일)
030 최제훈 『단지 살인마』(2020년 9월 25일)
031 정소현 『가해자들』 (2020년 10월 25일)
032 서유미 『우리가 잃어버린 것』 (2020년 12월 25일)
033 최진영 『내가 되는 꿈』 (2021년 2월 25일)
034 구병모 『바늘과 가죽의 시詩』 (2021년 4월 25일)
035 김미월 『일주일의 세계』 (2021년 6월 25일)
036 윤고은 『도서관 런웨이』 (2021년 8월 25일)
037 우다영 『북해에서』 (2021년 10월 25일)
038 김초엽 『므레모사』(2021년 12월 25일)
039 오한기 『산책하기 좋은 날』(2022년 12월 25일)
040 서수진 근간
041 한정현 근간
042 이주란 근간
043 천선란 근간
현대문학 × 아티스트 이동기
<현대문학 핀 시리즈>는 아티스트의 영혼이 깃든 표지 작업과 함께 하나의 특별한 예술작품으로 재구성된 독창적인 소설선, 즉 예술 선집이 되었다. 각 소설이 그 작품마다의 독특한 향기와 그윽한 예술적 매혹을 갖게 된 것은 바로 소설과 예술, 이 두 세계의 만남이 이루어낸 영혼의 조화로움 때문일 것이다.
이동기
한국 현대 미술에 만화 이미지를 본격적으로 도입했으며, 1993년에 창조한 캐릭터 ‘아토마우스’가 등장하는 일련의 현대 미술 작품들로 알려진 작가이다. 2000년대 세계 미술의 ‘네오 팝neo-pop’적 흐름을 예견한 그의 작품들은 현대 사회의 다양한 요소들을 다루고 있는데, 만화, 광고, 인터넷부터 고전 회화와 추상 미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각적, 문화적 요소 들을 통해 실재와 허구, 무거움과 가벼움, 물질과 정신, 동양과 서양 등 이질적 영역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암시하고 있다.
베를린의 마이클슐츠갤러리, 암스테르담의 윌렘커스 붐갤러리, 서울의 일민미술관 등에서 30여 회의 개인전을 가졌으며, 2011년 베니스비엔날레 부대전시 ‘퓨처 패스Future Pass’, 2005년 후쿠오카아시아미술관의 ‘애니메이트Animate’등의 전시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