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과 첫 문장에서부터 찰스 디킨스의 동명 소설과 헨리 제임스의 『나사의 회전』을 떠올리게 하는 이 소설은 크리스마스 전야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 유령 이야기라는 점에서 두 소설과 닮아 있다. 무엇보다 액자 구성의 연쇄적이고 반복적인 서사 등이 앞 두 작품과 몹시 흡사한 이 소설은 ‘나’의 막냇동생의 이야기를 파편적인 기록으로 옮긴 후, 그날 밤을 반추하는 ‘나’의 기억으로 재구성되어 있다.
소설 속 ‘나’는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날, 한 잡지사의 기자로부터 크리스마스에 관련된 짤막한 글을 써달라는 청탁받는다. 크리스마스에 관해서라면 뻔한 이야기밖에 떠오르지 않던 나는 모처럼 가족이 다 모인 크리스마스 전야, 막내가 갑작스레 꺼낸 이야기를 소설 모티프로 삼으려 경청한다. 그러나 막상 막내가 전한 이야기는 그 자리에 있던 우리 모두를 숨죽이게 만들었다.
일확천금을 노리던 막내 제부가 인수 예정이던 낯선 리조트에서 홀로 열흘을 머물게 된 막내. 모두가 믿지 않던, 허허벌판일 거라 짐작했던 그 산골에 정말 리조트가 있었고, 그곳에 머무는 동안 알 수 없는 일들이 계속 벌어진다. 처음 리조트에 도착했을 때 막내의 눈에 어둠 속에서 희끗하게 빛나던 건 버섯처럼 생긴 리조트의 지붕이었다가 나중에는 누군가의 무덤이 되었다. 커튼 없는 방, 창 밖에서 느껴지는 시선은 나방이었으나 어느 순간 작은 여자애로 바뀌고, 다시 나방에서 여자애로 거듭 바뀐다. 막내의 진위를 가릴 수 없는 이런 서술의 번복은 우리를 미궁으로 빠져들게 한다. 리조트로 안내한 사람부터 직원들까지 모두 유령에 가까운 존재들의 이야기들 가운데, 화자인 막내가 ‘10박’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는 기상천외한 유령 이야기. 소설 속 막내가 들려주는 ‘나의 이야기’는 믿지 못할 화자가 들려주는 유령들이 이야기이다.
“이야기는 끝났다. 지난 시간을 돌아본 막내는 리조트에서 잃어버린 손목시계가 있던 자리를 매만진다. 시계는 막내의 짧은 결혼생활을 증명해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시계를 잃어버렸던 리조트에서의 알 수 없는 시간들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막내의 오른손이 왼손을 잠시 감았다 놓는다. 가볍게 돌아가는 나사의 회전처럼. 어쩌면 막내의 습관과 같은 이 행위는 견뎌야 했던 어떤 시간들을 기억하며, 견뎌야 하는 지금의 삶에 나사를 조이는 것일지도 모른다.”(소유정)
표4
언제라도 좋을 시간에,
몇 번이고 반복되는 크리스마스캐럴처럼!
유령 이야기의 역사를 짚어볼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아마도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캐럴』과 헨리 제임스의 『나사의 회전』이 아닐까. 망자의 유령이 등장하여 깨달음을 주는 이야기, 유령을 보았다고 주장하는 이가 있기는 하나 그것이 실제 유령이었는지는 불확실하기에 해석의 다양성을 남기는 이야기가 두 소설을 비롯한 고전에서의 유령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여기, 하성란의 『크리스마스캐럴』은 두 소설과의 유사성을 내포하면서도 또 다른 의미에서 유령 이야기의 명맥을 잇는다. (……) 고전의 형식을 빌려 유령 이야기로의 뼈대를 만들고 도입부의 강한 몰입을 이끌어 효과적인 읽기를 가능하게 했다면, 하성란은 이에 자신만의 표식처럼 ‘유령’이라는 기표를 정교하게 세공한다. 보다 다면적이고 다성적이게, 보고도 믿을 수 없고 듣고도 확신할 수 없는 기표의 연쇄를 직조하는 것, 그것이 그의 고유한 작업이자 이 소설이 유령 이야기로서 갖는 독자적인 타당성일 것이다.
-소유정, 「작품해설」 중에서
본문 중에서
불과 2년 8개월이었다. 그 짧은 시간에 막냇동생은 정상에 올랐다가 밑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롤러코스터를 탄 것 같은 시간이었다고 그 애가 말한 적이 있었는데 정말 그 애는 얼떨떨해 보였다. 한 남자가 죽자 사자 그 애를 쫓아다니고 직장 앞에까지 찾아와 동료들이 보는 앞에서 꽃다발을 내밀며 사랑한다고 고백한 날로부터 정확히 3년 반 만이었다.
-27쪽
“작은언니, 왜 참아? 그냥 말해. 그냥 화내.”
둘째가 남편과 내 얼굴을 번갈아 봤다.
“얘 술 주지 마, 응? 형부든 언니든 얘 술 더 주는 사람 난 안 봐.”
(……)
“작은언니 뭐랬어? 아무것도 없을 거랬지? 허허벌판이랬지?”
막내가 억울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있었다고, 리조트. 정말 있었다고. 팸플릿에서 본 그 리조트가 거기 있었다고.”
-58-59쪽
모임의 반은 아는 사람이었고 반은 모르는 사람이었다. 다음 날이면 모르는 사람은 아는 사람이 되고 그들이 또 자신들이 아는 사람들을 데리고 나타나서,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비율은 늘 비슷했다. 나도 그렇게 그런 자리에 나가 김을 알게 되었다. 우연히 연락이 된 옛 직장 동료들 따라갔다 김과 어울리게 되었는데 나중에 들어보니 그의 경우도 나와 비슷했다. 얼마 뒤 그 동료는 발길을 끊었고 내가 내 친구를 데리고 그 자리에 나갔다. 차수가 이어지고 모임이 끝날 때쯤이면 친화력이 뛰어난 김은 거의 모든 사람을 자신의 형 동생으로 삼곤 했다.
-71쪽
거짓말이 아니었다. 작은 연못의 바위에는 거북이들이 달라붙어 있다. 울긋불긋한 나뭇잎들
사이로 휘리릭 움직이는 것은 카멜레온이다.
“황량한 그곳까지 누가 올까 싶겠지만요, 동화 같은 리조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나비생태박물관이 있어요. 주말이면 아이들을 데리고 갈 수 있지요.”
거긴 황량한 벌판뿐인데, 나비생태박물관은커녕 나비박물관도 없는데, 살아 날아다니는 나비는 물론이고 나비 표본도 없는데. 모두모두 김과 최의 거짓말인데, 둘이 작당해서 나이 든 남자의 돈을 빼앗으려는 속셈인데, 그런데도 나는 이야기를 멈출 수가 없었다. 언젠가 작은 무대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춤을 추던 그때처럼, 엉덩이를 밀면서 무대 안으로 들어가려 애를 쓰고 있었다.
-81-82쪽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던 서은순이 무심하게 물었다.
“한유정, 너 김진호 아니?”
김진호가 누구인가, 잘 기억나지 않았다.
“김진호? 김진호가 왜?”
“아는구나, 역시 너라면 알 줄 알았지.”
그렇게까지 말을 하는데 이제 와서 김진호가 누구냐고 잘 모른다고 할 수도 없었다. 김진호가
누구인가. 잘 모르는데 모른다고 말할 수 없었다.
잠깐 사이를 두고 은순이가 말했다.
“김진호가 죽었다.”
(……)
김진호가 죽었다고 말할 때처럼 서은순이 전했다.
“김진호는 한유정 너를 좋아했다. 여름캠프에서 너랑 말을 했다면서 기뻐했다. 너는 몰랐을 거다. 김진호는 누굴 좋아하면서도 끝내 말 못 하는 애다. 한유정, 김진호는 그런 애다.” -125-128쪽
그 뒤로 한참 동안 우리에게는 2017년의 크리스마스 전야 같은 날이 일어나지 않았다. 단출하다면 단출한 그 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다. 그러나 그날 우리는 그런 밤이 가까운 시기에 또 오리라 생각했다.
막내의 이야기는 그날 밤 식탁에 둘러앉은 우리 모두를 숨죽이게 하기에 충분했다. 막내가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도 빙 크로스비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불렀다.
꿈에서 깬 듯 남편이 우리의 잔에 와인을 따랐고 우리는 잔을 들어 부딪쳤다. 메리 크리스마스, 그렇게 말한 게 둘째였는지 막내였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149-150쪽
월간 『현대문학』이 펴내는 월간 <핀 소설>, 그 열여덟 번째 책!
<현대문학 핀 시리즈>는 당대 한국 문학의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첨예한 작가들을 선정, 월간 『현대문학』 지면에 선보이고 이것을 다시 단행본 발간으로 이어가는 프로젝트이다. 여기에 선보이는 단행본들은 개별 작품임과 동시에 여섯 명이 ‘한 시리즈’로 큐레이션된 것이다. 현대문학은 이 시리즈의 진지함이 ‘핀’이라는 단어의 섬세한 경쾌함과 아이러니하게 결합되기를 바란다.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은 월간 현대문학이 매월 내놓는 월간 핀이기도 하다. 매월 25일 발간할 예정이 후속 편들은 내로라하는 국내 최고 작가들의 신작을 정해진 날짜에 만나볼 수 있게 기획되어 있다. 한국 출판 사상 최초로 도입되는 일종의 ‘샐러리북’ 개념이다.
001부터 006은 1971년에서 1973년 사이 출생하고, 1990년 후반부터 2000년 사이 등단한, 현재 한국 소설의 든든한 허리를 담당하고 있는 작가들의 작품으로 꾸렸고, 007부터 012는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반 출생하고, 2000년대 중후반 등단한, 현재 한국 소설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의 작품으로 만들어졌다.
013부터 018은 지금의 한국문학의 발전을 이끈 중추적인 역할을 한 1950년대 중후반부터 1960년대 사이 출생 작가, 1980년대에서 1990년대 중반까지 등단한 작가들의 작품으로 이어질 예정이다.
발간되었거나 발간 예정되어 있는 책들은 아래와 같다.
001 편혜영 『죽은 자로 하여금』(2018년 4월 25일 발간)
002 박형서 『당신의 노후』(2018년 5월 25일 발간)
003 김경욱 『거울 보는 남자』(2018년 6월 25일 발간)
004 윤성희 『첫 문장』(2018년 7월 25일 발간)
005 이기호 『목양면 방화 사건 전말기』(2018년 8월 25일 발간)
006 정이현 『알지 못하는 모든 신들에게』(2018년 9월 25일 발간)
007 정용준 『유령』(2018년 10월 25일 발간)
008 김금희 『나의 사랑, 매기』(2018년 11월 25일 발간)
009 김성중 『이슬라』(2018년 12월 25일 발간)
010 손보미 『우연의 신』(2019년 1월 25일 발간)
011 백수린 『친애하고, 친애하는』(2019년 2월 25일 발간)
012 최은미 『어제는 봄』(2019년 3월 25일 발간)
013 김인숙 『벚꽃의 우주』(2019년 4월 25일 발간)
014 이혜경 『기억의 습지』(2019년 5월 25일 발간)
015 임철우 『돌담에 속삭이는』(2019년 6월 25일 발간)
016 최 윤 『파랑대문』(2019년 7월 25일 발간)
017 이승우 『캉탕』(2019년 8월 25일 발간)
018 하성란 『크리스마스캐럴』(2019년 9월 25일 발간)
019 임 현(근간)
020 정지돈(근간)
021 박민정(근간)
022 최정화(근간)
023 김엄지(근간)
024 김혜진(근간)
현대문학 × 아티스트 정희승
<현대문학 핀 시리즈>는 아티스트의 영혼이 깃든 표지 작업과 함께 하나의 특별한 예술작품으로 재구성된 독창적인 소설선, 즉 예술 선집이 되었다. 각 소설이 그 작품마다의 독특한 향기와 그윽한 예술적 매혹을 갖게 된 것은 바로 소설과 예술, 이 두 세계의 만남이 이루어낸 영혼의 조화로움 때문일 것이다.
정희승
1974년 서울 출생. 홍익대 회화과 졸업. 런던컬리지 오브 커뮤니케이션London College of
Communication 사진학과 학사와 석사과정 마침. 삼성미술관 리움, 서울시립미술관, 아트선재센터를 비롯한 국내와 뉴욕, 런던 등지에서 수차례 전시 개최. <송은미술대상 우수상> <박건희문화재단 다음작가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