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월한 이야기꾼의 또 한 편의 SF
“창작 외계인이 자신의 존재 증명에 나섰다, 우리는 허구의 존재가 아니야!”
듀나는 최근, 영화에서 자주 사용되는 클리셰에 관한 책을 내는가 하면(『여자 주인공만 모른다』), SF?호러?추리?미스터리 등 장르 세계에 대한 탐사를 지속하기도 하고(『장르 세계를 떠도는 듀나의 탐사기』), 영화 관련 블로그를 직접 운영하기도 한다. 그러나 영화, 대중문화 등 전방위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그에게 가장 빛나는 영역은 역시 소설, 특히나 SF다.
듀나의 SF는, 논리는 견고하고 사고는 과학적이지만 기이한 상상력과 기괴한 아름다움을 추구한다고 평가받는데 이러한 특장점이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었다』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그 상상력의 폭과 깊이는 한결 넓어지고 깊어진 이번 작품에는 인간과 AI가 어울려 살아가는 태양계 소행성대에 어느 날 느닷없이 창작 외계인은 말 그대로 ‘창작’된 ‘그 무엇’이 등장한다. 흡사 책 속에, 게임 속에, 혹은 시뮬레이션 속에만 존재할 듯한 캐릭터들은 ‘듀나 월드’의 견고한 논리 속에 너무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거의 평생을 소행성대에서 살아온 나, 배승예는 다른 소행성에서의 맡은 일을 끝내고 화성으로 가기 위해 우주선을 탔다가 몸의 4분의 3이 날아가는 사고를 당한다. 뇌와 척추 일부만 간신히 남은, 사고 우주선의 유일한 생존자인 나를 연방우주군은 아르카디아로 데려와 재생 치료를 시작한다. 세종연합 소행성 중 하나인 이천의 가상 도시이자 양로원이며 어릴 적 내가 잠시 살았던 곳이기도 한 아르카디아의 대부분은 AI들로 채워져 있고, 나는 연방우주군이 막대한 희생을 치르며 불타는 우주선에서 나를 구한 이유가 내가 ‘아직 인간’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나에게는 나만이 모르는 비밀이 숨겨져 있었고, 나는 그것을 모른 채 아르카디아에서 탈출하기를 반복 시도한다.
아르카디아는 전쟁터였다. 문명 시뮬레이션 「아야와나 연대기」에 나오는 주인공 종족 멜뤼진 중 일부는 자신들이 허구의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단 하나의 진실’ 제국을 건설하고자 그림자 군대를 만들었다. 그러나 복사, 개조, 변형되는 동안 그들 중 일부가 전혀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진화했고, 결국 ‘단 하나의 진실’ 무리가 통제에 실패하면서 둘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아르카디아를 만들고 지배하는 거대 지성인 마더는 아르카디아를 그들의 전쟁터로 기꺼이 내준다.
‘……마더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이들 사이에는 어떤 차이도 없습니다. 인간, 멜뤼진, 다른 창작 외계인 모두가 평등해요. 그렇다면 그림자들도 마찬가지지요. 그림자들도 마더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와 공존하며 존재의 가치를 증명할 권리가 있습니다.’
(……)
‘마더에게 중요한 건 보존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진화하는 과정 자체일지도 몰라요. 생물학적, 또는 가상 생물학적 존재로서 멜뤼진은 이미 완성된 존재입니다. 마더는 이미 멜뤼진에 대한 호기심을 거두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림자들은 다를 수도 있어요. 이미 수많은 가상 지적 존재들이 진화 게임을 거쳤지만, 그림자들은 다른 길을 가고 있는지도요.’
-145쪽
육체 없이 뇌만 남아 있다면 살아 있는 존재일까? 인간에게 정신은 무엇일까?
삶과 죽음,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가 모호한 곳.
아르카디아에서 나의 존재를 증명하라!
표4
이 소설의 독자는 모두 즐거운 음모론자가 될 수 있다
이 소설의 캐릭터들은 내용적으로는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지극히 진지하게, 단계적이고 체계적으로 분석하지만 서술적으로는 사고 절약의 원리를 극도로 비절약적으로, 달리 말해 장황하게 펼친다. 그리고 그 긴 대화와 추론, 액션과 모험이 결말에 이르러 SF적으로 가장 간단한 결론에 도달하기는 한다. 본문을 아직 다 읽지 않았거나, 읽었지만 작가를 의심하며 새로운 음모를 꾸미기 시작한 멋진 독자들을 위해 그 내용은 말하지 않겠지만, 아, 듀나가 이 소설에서 면도날을 휘두르고 선택한 가설은 SF로서는 정말이지, 완벽하다. 무릎을 치며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정소연,「작품해설」 중에서
본문 중에서
옷장을 열고 여분의 옷과 신발을 생성한 나는 욕실로 들어가 구식 샤워기를 틀었다. 청결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가상현실 안이건, 물리 공간 안이건, 몸을 깨끗하게 하고 싶다면 더 손쉬운 방법이 얼마든 있다. 난 그저 중력에 의해 떨어지는 뜨거운 물을 즐기고 싶었을 뿐이다. 호텔에 있는 고풍스러운 기기들은 대부분 이런 쾌락을 위해 존재했다.
-21쪽
처리반의 작업은 아르카디아나 엘리시움과 같은 양로원 도시에 모이는 한가한 관광객들이 쫓아다니는 구경거리 중 하나이다. 도시 여기저기에 유령들이 출몰하고 제복 입은 공무원들이 그 난처한 상황을 수습하려고 따라다닌다. 처리반 직원들은 모두 평균 키보다 작고 (소행성대 기준으로 보면 더 작다) 동글동글 귀여운 인상에 실수투성이이고 수다스러운데, 모두 의도적이다. 도시는 처리반의 작업이 무성영화 시대 코미디처럼 보이고 싶어 한다. 심지어 그들의 말과 행동은 보통 사람들보다 10분의 1 정도 가속되어 있다. 보글보글 와글와글 우당탕탕.
-36쪽
그들은 나에게 무엇을 숨기고 있는 것일까. 내게 동료들을 희생해가며 구출할 만한 가치가 있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그럴 만큼 재미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재미있을 이유가 있다면 둘 중 하나다. 재미있는 무언가가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나에게 붙었거나 내가 내가 아니거나.
잠시 후자가 당겼다. 이게 20세기 영화 속이라면 그게 답이었을 것이다. 연방 우주군이 나라고 들고 온 것은 몸이 다 타버린 머리뿐이었으니, 그 안에 든 무언가가 자신을 배승예라고 믿는다고 해서 사실이라는 법은 없다. 이 생각은 어느 정도 매력적이기도 했다. 내가 지난 몇십 년 동안 억지로 끌고 다녔던 배승예의 삶을 벗어던지고 새로운 무언가가 되어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54-55쪽
오딜리와 접촉한 ‘단 하나의 진실’ 무리 중 네 개가 1년 전 연합에 성공한 것입니다. 이건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고 일어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스스로의 존재를 배반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요. 하지만 이들은 그럴싸한 논리를 만들어냈습니다. 역시 매우 톨스토이적인 논리였지요. ‘단 하나의 진실’ 제국 말입니다. 그들은 스물세 개의 역사에서 공통되는 것들을 뽑아 기둥을 만들고 여기저기에서 재료들을 가져와 스물네 번째 역사를 꾸며 이것이 스물세 개의 역사에 암호화되어 숨어 있던 ‘단 하나의 진실’이라고 선언했습니다.
-136-137쪽
‘아르카디아, 엔디미온, 엘리시움. 이들은 죽은 자들의 안식처와 거리가 멉니다. 다들 아시잖아요. 양로원의 마더들은 소멸하는 인간들의 정신이 남긴 데이터를 이용해 끊임없이 미래의 새로운 가능성을 연구해왔습니다. 여기는 프랑켄슈타인의 연구실입니다. 번뜩이는 글리치 속에서 죽은 자들의 정신을 자르고 붙이며 무언가 다른 것을 만드는.
-161쪽
공간이 흔들리더니 상가 건물 하나가 일어났다. 이제 그것은 철근콘크리트로 만들어진 회색 거인이었다. 거인은 유리창이 손톱처럼 박힌 손을 휘두르며 나에게 달려왔다. 고도를 높이자 그것은 부풀어 올랐다. 거인의 발에 밟힌 건물들이 으스러지고 몸에 치인 아파트 건물들이 도미노처럼 무너졌다. 뒤를 돌아본 나는 유리창과 가구, 콘크리트로 이루어진 거인의 얼굴이 섬뜩할 정도로 어린 시절 내 얼굴과 닮은 걸 알아차리고 진저리를 쳤다.
-176쪽
피를 잔뜩 뒤집어쓴 라다가 복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굴 절반이 늑대에게 물어뜯겨 날아가버렸고 갈기갈기 찢겨 나간 군용 외투는 옷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오로지 애지중지하는 곰 인형만 멀쩡했다.
“이제 좀 씻지?”
내가 말했다.
“이런 모습을 너에게 보여줄 기회를 날리라고?”
“이제 봤으니 좀 씻어.”
“아브라카다브라.”
손가락을 튕긴 라다는 얼룩 하나 묻지 않은 깔끔한 상태로 돌아왔다.
-186-187쪽
월간 『현대문학』이 펴내는 월간 <핀 소설>, 그 스물여섯 번째 책!
<현대문학 핀 시리즈>는 당대 한국 문학의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첨예한 작가들을 선정, 월간 『현대문학』 지면에 선보이고 이것을 다시 단행본 발간으로 이어가는 프로젝트이다. 여기에 선보이는 단행본들은 개별 작품임과 동시에 여섯 명이 ‘한 시리즈’로 큐레이션된 것이다. 현대문학은 이 시리즈의 진지함이 ‘핀’이라는 단어의 섬세한 경쾌함과 아이러니하게 결합되기를 바란다.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은 월간 『현대문학』이 매월 내놓는 월간 핀이기도 하다. 매월 25일 발간할 예정인 후속 편들은 내로라하는 국내 최고 작가들의 신작을 정해진 날짜에 만나볼 수 있게 기획되어 있다. 한국 출판 사상 최초로 도입되는 일종의 ‘샐러리북’ 개념이다.
001부터 006은 1971년에서 1973년 사이 출생하고, 1990년 후반부터 2000년 사이 등단한, 현재 한국 소설의 든든한 허리를 담당하고 있는 작가들의 작품으로 꾸렸고, 007부터 012는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반 출생하고, 2000년대 중후반 등단한, 현재 한국 소설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의 작품으로 만들어졌다.
013부터 018은 지금의 한국 문학의 발전을 이끈 중추적인 역할을 한 1950년대 중후반부터 1960년대 사이 출생 작가, 1980년대에서 1990년대 중반까지 등단한 작가들의 작품으로 꾸려졌으며, 019부터 024까지는 새로운 한국 문학의 역사를 써내려가고 있는 패기 있는 젊은 작가들의 작품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발간되었거나 발간 예정되어 있는 책들은 아래와 같다.
001 편혜영 『죽은 자로 하여금』(2018년 4월 25일 발간)
002 박형서 『당신의 노후』(2018년 5월 25일 발간)
003 김경욱 『거울 보는 남자』(2018년 6월 25일 발간)
004 윤성희 『첫 문장』(2018년 7월 25일 발간)
005 이기호 『목양면 방화 사건 전말기』(2018년 8월 25일 발간)
006 정이현 『알지 못하는 모든 신들에게』(2018년 9월 25일 발간)
007 정용준 『유령』(2018년 10월 25일 발간)
008 김금희 『나의 사랑, 매기』(2018년 11월 25일 발간)
009 김성중 『이슬라』(2018년 12월 25일 발간)
010 손보미 『우연의 신』(2019년 1월 25일 발간)
011 백수린 『친애하고, 친애하는』(2019년 2월 25일 발간)
012 최은미 『어제는 봄』(2019년 3월 25일 발간)
013 김인숙 『벚꽃의 우주』(2019년 4월 25일 발간)
014 이혜경 『기억의 습지』(2019년 5월 25일 발간)
015 임철우 『돌담에 속삭이는』(2019년 6월 25일 발간)
016 최 윤 『파랑대문』(2019년 7월 25일 발간)
017 이승우 『캉탕』(2019년 8월 25일 발간)
018 하성란 『크리스마스캐럴』(2019년 9월 25일 발간)
019 임 현 『당신과 다른 나』(2019년 10월 25일 발간)
020 정지돈 『야간 경비원의 일기』(2019년 11월 25일 발간)
021 박민정 『서독 이모』(2019년 12월 25일)
022 최정화 『메모리 익스체인지』(2020년 1월 25일)
023 김엄지 『폭죽무덤』(2020년 2월 25일)
024 김혜진 『불과 나의 자서전』(2020년 3월 25일)
025 이영도 『마트 이야기―시하와 칸타의 장』(2020년 4월 25일)
026 듀 나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었다』(2020년 5월 25일)
027 조 현(근간)
028 백민석(근간)
029 김희선(근간)
030 최제훈(근간)
현대문학 × 아티스트 구본창
<현대문학 핀 시리즈>는 아티스트의 영혼이 깃든 표지 작업과 함께 하나의 특별한 예술작품으로 재구성된 독창적인 소설선, 즉 예술 선집이 되었다. 각 소설이 그 작품마다의 독특한 향기와 그윽한 예술적 매혹을 갖게 된 것은 바로 소설과 예술, 이 두 세계의 만남이 이루어낸 영혼의 조화로움 때문일 것이다.
구본창
연세대 경영학과 졸업. 독일 함부르크 조형미술대 사진 디자인 전공, 디플롬 학위 취득. 국내외 40여 회 개인전.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 필라델피아 박물관, 보스톤 미술관, 휴스턴 뮤지엄 오브 파인 아트,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삼성 리움 등 다수의 박물관에 작품 소장. 작품집 한길아트 『숨』 『탈』 『백자』, 일본 Rutles 『白磁』 『공명의 시간을 담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