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들이 ‘최정화’라는 이름을 특별한 소설가의 이름으로 기억하리라”는 찬사를 받으며 등단한 최정화는 완벽한 소설 구조와 기본기 탄탄한 문장으로 그 작가적 역량을 인정받고 있다. 전염병에 휩싸인 공간에서 벌어지는 예기치 못한 일들을 그린 전작前作 『흰 도시 이야기』에서 존엄성을 상실하지 않기 위해 인간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던진 작가는 이번 소설에서는 공간을 옮겨 새로운 삶을 찾아 지구를 떠난 인간들이 지구를 그리워하며 다시 돌아오고 싶어하는 모습을 SF의 문법을 차용해 그리며 참된 삶의 의미를 또 한 번 심도 깊게 파헤치고 있다.
총 3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작품은 각기 다른 ‘나가 등장해 소설을 끌어가는데 1장은 화성에 도착한 ‘나-니키’의 시점으로, 2장은 니키와 기억을 교환하고 수용소로 간 반다의 시점으로, 마지막 3장은 메모리 익스체인지사에서 체인저로 일하는 도라로 살고 있는, 반다의 기억을 이식받은 니키의 시점으로 서술되어 있다.
더 이상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되어버린 지구를 떠나 화성으로 오게 된 니키와 지구인들은 그곳에서 화성인의 삶을 강요당하고, 가족과 친구를 모두 잃고 수용소에서 외롭게 버티던 니키는 결국 화성인이 되기로 결심한다. ‘화성인 되기’란 경제 사정이 어려운 화성인의 아이디얼 카드를 사는 것으로 이는 단순 신분증 거래가 아닌, 화성인과 이주민 간의 기억 자체를 교환―‘메모리 익스체인지’―하는 일을 뜻한다. 니키는 화성인 반다와 기억을 교환하고 도라라는 이름으로 화성 사회로 진입하고, 니키의 기억을 갖게 된 반다는 수용소에서 감시와 통제 아래 남은 삶을 살게 된다.
수용인 모두가 매일 같은 생각과 행동을 하는 수용소의 삶을 살던 반다는 전파 오류 사고로 그곳을 탈출하고, 자신과 기억을 맞바꾼 니키를 찾아간다. 니키를 마주한 반다는 자신의 기억(=자신에게 이식된 니키의 기억)을 니키에게 이야기해주고, 니키 역시 자신의 유년(=니키에게 이식된 반다의 유년)을 반다에게 들려준다. 무장 경비원에 포위된 건물을 탈출하려던 반다는 자신의 과거를 간직한 채 그 자리에서 사살되고, 니키는 비로소 그동안 도라로 살며 안정적인 삶을 누렸지만 늘 불안했던 자신의 지난날들이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한다.
외계인에 관한 SF이자,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외국인/이방인에 관한 이야기
최정화는 이 소설에서 우리는 존중 받고 있는지, 그리고 서로를 존중하고 있는지에 대해 끊임없는 질문을 던진다. 이는 이 작품을 쓰게 된 이유와 직결되는 물음으로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다음과 같이 집필 동기를 밝히고 있다.
“제주 난민에 대한 우리들의 서툰 반응이 소설을 구상하게 했다. 강연장에서 만난 한 아랍인이 한국에서 사는 곤란함에 대해 들려준 이야기를 기억하면서 썼다. (……) 언젠가 다시 찾아올 그들을, 어쩌면 지금 바로 내 옆에 이미 와 있는 그들을, 어떻게 맞이할 수 있을까?”
소설은 제주 난민과 우리들의 모습이 지구인과 화성인으로 분扮해, 독자들을 낯선 상황으로 몰고 간다. 아이디얼 카드가 없는 지구인은 기본권을 박탈당하고 차별과 혐오에 무방비로 노출되며, 오직 ‘(값싼) 노동력’으로 사용될 수 있을 때에만 화성에서 받아들여진다. 전쟁·기아·탄압 등으로 살던 곳을 떠난 이들이 난민이 되어 이웃 나라의 입국 허가를 기다리지만 많은 경우 추방되고 일부는 난민 캠프에 수용되어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지는, 실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일과 같은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화성에서 하나의 객체로 존중받고 싶어 하던 지구인들이 과연 지금-여기에서 타인을 진정으로 존중하고 있는지…….
『메모리 익스체인지』는 화성에 도착한 지구 출신 외계인에 관한 SF이자, 지금 여기 지구 전역의 출입국에 존재하는 외국인/이방인에 관한 이야기라 할 수 있다.
표4
“사람들이 널 어떻게 대하든 간에,
넌 자유롭고 존중받아야 할 인간이야”
‘자유롭고 존중받아야 할 인간’이라는 말은 소설에서 몇 번이나 반복된다. 그런데 이 말은 우리가 자유롭고 존중받아야 할 인간임을 일깨우는 동시에, 그 반대편, 그러니까 자유가 없고 존중받지 못하는 존재는 인간이 아니라는 것, 혹은 자유와 존중은 자격을 갖춘 일부 인간에게만 주어진다는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 이처럼 ‘자유롭고 존중받아야 할 인간’이라는 말에 양면이 있다면, 우리의 세계는 어느 쪽일까?(……) 모두가 자유롭고 존중받는 세계로 나아가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타자를 배제한 대가로 자유와 존중을 특권처럼 향유하고 있는 곳이 되어가고 있을까? 이것이 바로 『메모리 익스체인지』가 지구인에게 던지는 적실하고 긴급한 질문이다.
-이지은, 「작품해설」 중에서
본문 중에서
랄라는 소리 내서 오래 웃었다. 6개월 사이에 내가 허풍선이 거짓말쟁이가 되었다가, 이제
는 철학자나 종교인 행세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했다. 랄라가 지난 내 모습을 기억해주고, 그에 대해 말해줄 때마다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고 기억함으로써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19-20쪽
“지금 막 삼촌이 내게 해줬던 말이 떠올랐어.”
“그 말이 뭐였는데?”
“네가 존중받아야 할 인간이라는 걸 잊지 말아라.”
랄라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내 말을 듣지 못한 게 아닌가 싶었다.
“어때? 아주 따뜻한 말이지?”
“아니, 그건 너무 무서운 말이다, 얘”
(……)
“그건 아마 우리가 인간이 아니게 될 수 있다는 뜻인 거 같은데?”
“아니,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삼촌의 말을 기억하는 한 난 인간일 거야.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말이야.”
-22쪽
자유의지. 그게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거다. (……) 내가 두려워하는 건 죽음이 아니라 환각이야. 착각. 난 늘 내가 착각 속에서 바로 보지 못하고 있다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어. 그건 추위에 떨고 있는 것보다 더 끔찍한 일이었단다. 죽을 때도 환각이 오겠지, 니키? 아마 내가 그 감각을 느낄 겨를도 없이 얼어붙고 말 테고.
니키,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 널 존중할게. 너도 내게 그렇게 해줘.
-30-31쪽
대부분의 지구인들은 내가 보기에, 불필요한 것을 강렬하게 원하고 있었고 결국은 그걸 갖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의지가 매우 강하고, 그 점에서는 우리 화성인들보다 뛰어났어요. 하지만 자기가 뭘 원해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는 것 같았어요. 사고는 복잡했지만 단순한 진리들에는 취약했고 심지어 그것들을 무시하고 있었습니다. 행복해질 수 있는 가까운 길을 놔둔 채 아주 멀리, 마치 일부러 그것에 도착하고 싶지 않은 것처럼 우회하고 있었습니다.
-67쪽
“내 기억을, 그러니까 내 기억을 가져간 다른 이에게 그가 내게 넘겨주었던 기억을 돌려주고
싶어요. 그걸 그에게 주고 싶습니다. 난 그자가 내 기억을 가지고 자신을 잊은 채 살기를 바라지 않아요. 내가 가지고 있는 당신 기억을 당신에게 주고 싶어요.”
-105쪽
월간 『현대문학』이 펴내는 월간 <핀 소설>, 그 스물두 번째 책!
<현대문학 핀 시리즈>는 당대 한국 문학의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첨예한 작가들을 선정, 월간 『현대문학』 지면에 선보이고 이것을 다시 단행본 발간으로 이어가는 프로젝트이다. 여기에 선보이는 단행본들은 개별 작품임과 동시에 여섯 명이 ‘한 시리즈’로 큐레이션된 것이다. 현대문학은 이 시리즈의 진지함이 ‘핀’이라는 단어의 섬세한 경쾌함과 아이러니하게 결합되기를 바란다.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은 월간 현대문학이 매월 내놓는 월간 핀이기도 하다. 매월 25일 발간할 예정이 후속 편들은 내로라하는 국내 최고 작가들의 신작을 정해진 날짜에 만나볼 수 있게 기획되어 있다. 한국 출판 사상 최초로 도입되는 일종의 ‘샐러리북’ 개념이다.
001부터 006은 1971년에서 1973년 사이 출생하고, 1990년 후반부터 2000년 사이 등단한, 현재 한국 소설의 든든한 허리를 담당하고 있는 작가들의 작품으로 꾸렸고, 007부터 012는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반 출생하고, 2000년대 중후반 등단한, 현재 한국 소설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의 작품으로 만들어졌다.
013부터 018은 지금의 한국문학의 발전을 이끈 중추적인 역할을 한 1950년대 중후반부터 1960년대 사이 출생 작가, 1980년대에서 1990년대 중반까지 등단한 작가들의 작품으로 꾸려졌으며, 019부터 024까지는 새로운 한국문학의 역사를 써내려가고 있는 패기 있는 젊은 작가들의 작품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발간되었거나 발간 예정되어 있는 책들은 아래와 같다.
001 편혜영 『죽은 자로 하여금』(2018년 4월 25일 발간)
002 박형서 『당신의 노후』(2018년 5월 25일 발간)
003 김경욱 『거울 보는 남자』(2018년 6월 25일 발간)
004 윤성희 『첫 문장』(2018년 7월 25일 발간)
005 이기호 『목양면 방화 사건 전말기』(2018년 8월 25일 발간)
006 정이현 『알지 못하는 모든 신들에게』(2018년 9월 25일 발간)
007 정용준 『유령』(2018년 10월 25일 발간)
008 김금희 『나의 사랑, 매기』(2018년 11월 25일 발간)
009 김성중 『이슬라』(2018년 12월 25일 발간)
010 손보미 『우연의 신』(2019년 1월 25일 발간)
011 백수린 『친애하고, 친애하는』(2019년 2월 25일 발간)
012 최은미 『어제는 봄』(2019년 3월 25일 발간)
013 김인숙 『벚꽃의 우주』(2019년 4월 25일 발간)
014 이혜경 『기억의 습지』(2019년 5월 25일 발간)
015 임철우 『돌담에 속삭이는』(2019년 6월 25일 발간)
016 최 윤 『파랑대문』(2019년 7월 25일 발간)
017 이승우 『캉탕』(2019년 8월 25일 발간)
018 하성란 『크리스마스캐럴』(2019년 9월 25일 발간)
019 임 현 『당신과 다른 나』(2019년 10월 25일 발간)
020 정지돈 『야간 경비원의 일기』(2019년 11월 25일 발간)
021 박민정 『서독 이모』(2019년 12월 25일)
022 최정화 『메모리 익스체인지』(2020년 1월 25일)
023 김엄지(근간)
024 김혜진(근간)
025 조 현(근간)
026 듀 나(근간)
027 이영도(근간)
028 백민석(근간)
029 김희선(근간)
030 최제훈(근간)
현대문학 × 아티스트 송지혜
<현대문학 핀 시리즈>는 아티스트의 영혼이 깃든 표지 작업과 함께 하나의 특별한 예술작품으로 재구성된 독창적인 소설선, 즉 예술 선집이 되었다. 각 소설이 그 작품마다의 독특한 향기와 그윽한 예술적 매혹을 갖게 된 것은 바로 소설과 예술, 이 두 세계의 만남이 이루어낸 영혼의 조화로움 때문일 것이다.
송지혜
1985년 서울 출생. 이화여대 섬유예술과와 동 대학원 졸업. 경기도미술관, 슈페리어갤러리, 롯데갤러리, 박영덕화랑, 에스플러스갤러리, 가나아트에디션 등 국내외에서 수차례 전시. 컬러링북 『시간의 정원』(2014, 북라이프), 『시간의 방』(2015, 북라이프) 시리즈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등 26개국에 판권 수출. 국내 단행본 사상 최고 금액으로 북미 판권 수
출. 한국, 미국, 영국, 대만 베스트셀러. 2015년 미국 아마존 <올해의 작가> 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