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대 초, 내가 결혼해서 시집살이를 한 동네는 좁고 꼬불탕한 골목 안에 작은 조선 기와집들이 처마를 맞대고 붙어 있는 오래된 동네였다. 특별히 가난할 것도 넉넉할 것도 없는 평범한 주택가였지만 전쟁이 막 끝난 때니만큼 사는 모습들은 제각기 치열하고도 남루했다. 출구가 보이지 않고, 막무가내로 답답하기만 한 시절, 어느 날 우리 집에서 멀지 않은 한 동네 낡은 조선 기와집에 ‘現代文學社’란 간판이 붙었다. 워낙 살기가 어려울 때라 살림집도 길목만 좋으면 한쪽 벽을 헐고 구멍가게를 내는 일이 흔했다. 그런 동네 구멍가게와 다름없는 집에 그 간판이 붙자 그 집뿐 아니라 그 골목까지 갑자기 찬란해졌다. 그 남루하고 척박한 시대에도 문학이 있다는 게 그렇게 내 가슴을 울렁거리게 했다.
_5~6쪽
한길에서 그 집을 들여다보면 대문이 보이지 않고 고궁에서나 볼 수 있는 홍예문이 보였다. 홍예문은 사랑마당으로 통하는 문이었고 안채로 통하는 대문은 홍예문이 달린 담장과 기역 자로 꺾인 곳에 달려 있었다. 난 왠지 문지방이 돌로 된 위압적인 솟을대문보다는 단아하고 고풍스러운 홍예문에 더 압도당하고 있었다. 추녀를 나란히 한 고만고만한 조선 기와집하고는 격이 달라 보였다. 마침 짐을 나르던 청년이 우리 곁에서 머뭇대며 아는 척을 하고 싶어 하는 눈치를 보이자 노마님이 우리 막내라고 인사를 시켰다. 서글서글한 미남이었다.
_20~21쪽
나의 모멸감을 아는지 모르는지 박수무당은 둘둘 만 다섯 개의 깃대를 내 앞으로 들이댔다. 영문을 몰라 뒷걸음질을 치는 나에게 시어머니가 우리 새아기는 이렇게 아무것도 모른답니다, 하면서 나에게 깃대를 하나 뽑으라고 일러주었다. 나는 둘둘 만 깃발 쪽은 자기 겨드랑이에 끼고 내민 대 중에서 하나를 뽑았다. 면할 길이 없다고 체념한 뒤였지만 까닭 없이 떨렸다. 펄렁하고 남색 깃발이 딸려 나왔다. 시어머니 안색이 굳어졌다. 좋은 징조는 아닌가 보다. 박수무당도 고개를 갸우뚱하고 나서 한 번 더 뽑으라는 시늉을 했다. 나도 까닭 없이 긴장해서 단박에 뽑지 않고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신중하게 두 번째 기를 뽑았다. 이번에는 초록색이었다. 그것도 길한 색은 아니란 걸 나는 눈치로 알아차렸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떤 색 깃발이 나와야 좋은지 아는 바 없이도 불길한 색깔만 뽑았다는 건 기분 나쁜 일이었다. 나는 잘못한 거 없이도 허물을 뒤집어쓸 수 있다는 미신의 힘에 공포를 느꼈다.
_176~177쪽
첫사랑이란 말이 스칠 때마다 지루한 시간은 맥박 치며 빛났다. 그 남자를 다시 만나기까지는 일주일이나 남아 있었지만 오래간만에 맛보는 기다림의 시간은 황홀했다. 무엇을 입고 나갈까, 첫사랑이 긴 치마를 허리띠로 동여매고 시장바구니를 들고 나타난다면 그 남자가 얼마나 실망할까. 나 또한 그 남자가 첫사랑이거늘. 그건 첫사랑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나는 이것저것 좋은 나들이옷을 꺼내 입고 거울 앞에서 나를 비춰보았다. 어떤 옷은 점잖아 보이고, 어떤 옷은 촌스러워 보이고, 간혹 요염해 보이는 옷도 있었다.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남자가 나에게 해준 최초의 찬사는 구슬 같다는 것이었다. 나는 다시 한번 구슬 같은 처녀이고 싶었다.
_203~204쪽
종희 년이 그래도 제일 언니 생각을 한다우. 지 첫딸 이름을 내 이름에서 따왔대. 영어로 동백꽃이 카멜리어라나 봐. 그 얘긴 했다고? 미안 미안 한 얘기 또 들어주면 좀 안 되우? 내가 내 이름자는 동백 아가씨가 아니라 봄 아가씨라고 해도 동백 아가씨가 나한테 어울린대. 아무튼 이모 이름을 제 딸에게 붙여주고 싶어 하는 건 이모를 무시하지 않는다는 증거 아뉴. 얼마나 고마워. 근데 그 카멜리 년이 공부를 그렇게 잘해서 명문대학에서도 장학금 받고 다닌다더니 무슨 박사를 하는지는 몰라도 한국전쟁 중에 섹스 산업이 한국 경제에 얼마나 기여했나, 그런 걸 가지고 연구해서 논문을 준비한다나 봐. 걔 얘기를 들으면 한국에 산업이라고는 전무했을 시기에 무상 원조 말고는 유일한 외화벌이였을 거라는 거야. 그걸 구체적으로 산출할 건가 봐. 나야 기껏 피에프씨 아니면 콜포의 100불 미만의 월급에서 뜯어다가 우리 식구 먹여 살리고, 그 사이사이 똥갈보 소리 들어가며 주로 검둥이한테 더 싸구려로 몸 팔고. 아, 엠병, 그게 몇 푼 될까 싶은데 합치면 그렇지도 않은가 봐. 난 내 부끄러운 과거가 학문이 된다는 게 이상해. 카멜리가 자랑스러워. 걘 나를 수치스러워할 아이가 아냐. 남동생들이 가끔가다 내 지난날을 깔보는 눈치를 보일 때마다 얼마나 서러웠는지, 엠병, 5달러도 그만, 10달러도 그만, 달러만 보면 가랑이 벌려서 저희들 안 굶긴 게 억울하기만 하더니, 그게 국가 경제를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었을 거라는 연구 결과가 나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한풀이를 한 것처럼 통곡이 나오려고 하는 거 있지, 엠병.
_365~366쪽
우리 엄마 돌아가실 때도 내 헌 빤스 입고 돌아가셨다우. 내 내복 찌들어서 버리면 멀쩡한 거 왜 버리냐고 주워다가 껴둔다고 와이프가 구시렁거리는 소리 들었어도 그 정돈 줄은 몰랐어. 와이프도 몰랐겠지. 돌아가시고 새 옷 갈아입혀드릴 때 와이프가 그걸 보고는 내 손을 끌어다가 억지로 남자 빤스 고추 구멍을 만져보게 하는 거야. 내가 그것만은 꼭 봐둬야 한다나. 정말 내 빤스였어. 혹시 해진 데는 없나 해서 손으로 골고루 더듬어보았어. 어머니가 장사 다닐 때 내 해진 런닝구 입고 다니던 생각이 나서. 해진 데는 없었지만 우리 엄마 너무 말랐더라. 그 남자가 말끝을 흐렸다. 울고 있었다. 점점 더 심하게 흐느끼면서 볼을 타고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나도 애끓는 마음을 참을 수 없어 그 남자를 안았다. 그 남자도 무너지듯이 안겨왔다. 우리의 포옹은 내가 꿈꾸던 포옹하고도 욕망하던 포옹하고도 달랐다. 우리의 포옹은 물처럼 담담하고 완벽했다.
우리의 결별은 그것으로 족했다.
_374~375쪽
박완서 문학의 가장 아름다운 결정체
그리운 작가의 마지막 장편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나목』 『엄마의 말뚝』 등 수많은 걸작들을 탄생시킨 소설가 박완서. 일제강점기에서 한국전쟁, 고도성장으로 이어지는 격동의 시기를 온몸으로 겪으며, 삶의 크고 작은 질곡들과 이를 견디게 해준 문학에의 열정을 바탕으로 따뜻하고 생동감 넘치는 작품들을 써낸 그는 명실상부한 ‘한국문학의 어머니’이다. 1970년 마흔 살이라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등단하여, 2011년 1월 타계하기까지 40여 년간 15편의 장편과 80여 편의 단편, 동화와 산문집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작품들을 발표했는데, 그중에서도 《현대문학》 창간 50주년을 기념하는 소설이자 마지막 장편소설이 된 2004년 작 『그 남자네 집』은 일흔을 훌쩍 넘기고 생의 끝자락에 선 박완서 작가가 수십 년간 가슴에 소중히 품어온 ‘첫사랑’의 기억을 풀어놓은 특별한 작품이다. 현대문학은 작가 스스로가 “힘들고 지난했던 시절을 견디게 해준 ‘문학’에 바치는 헌사”라고 의미를 부여한 이 소설을 10주기를 맞이해 새롭게 단장하여 선보인다. 타계 직후인 2011년 3월 《현대문학》 ‘박완서 추모특집’에 실었던, 유종호, 김화영, 구효서, 구본창, 이해인 등 한국 문단과 문화예술계 인사들의 추모 메시지와 함께, 작가의 딸인 호원숙 씨가 어머니를 추억하며 어머니의 10주기에 바치는 헌사로 쓴 에세이 「그 남자네 집을 찾아서」를 특별 수록하였다.
■ 책 소개
가까이 있었으나 끝내 손에 닿지 않았던 ‘그 남자’
박완서의 ‘첫사랑’에 관한 자전적 소설
“이 소설을 쓰는 동안은 연애편지를 쓰는 것처럼 애틋하고 행복했다.”
1950년대 전후 서울의 피폐한 풍경이 눈에 보일 듯 그려지는 『그 남자네 집』은, 노년에 접어든 주인공이 첫사랑 ‘그 남자’가 살았던 돈암동 안감천변을 찾아가 옛 기억을 떠올리면서 시작된다. 먼 친척뻘인 그 남자네 가족이 내가 사는 동네로 이사를 오면서 고등학생이던 나와 그 남자는 처음 만난다. 그리고 몇 년 후, 전쟁 통에 미군부대에서 일하던 나는 퇴근길 전차 안에서 그 남자와 우연히 다시 만나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인연을 맺는다. 전쟁으로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황폐하고 남루해진 그 겨울, 나와 그 남자는 폐허가 된 서울 거리 구석구석을 누비며 ‘구슬’처럼 빛나는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생존’만이 가치 있던 시절에 음악과 문학을 즐기는 낭만적인 그 남자의 존재는 나에게 잠시 현실에서 눈을 돌릴 수 있는 탈출구가 되어준다. 그러나 그는 ‘한 푼도 못 버는 백수’에다 세상 물정 모르고 노쇠한 어머니를 괴롭히는 ‘철부지 막내아들’이었고 나는 ‘다섯 식구의 밥줄’이었기에, 나는 작지만 번듯한 집과 안정적인 직장을 가진 은행원과 결혼하기로 결심하고 그 남자에게 이별을 통보한다. 첫사랑의 단꿈에서 깨어나 시집살이를 시작한 나는 남편이 가져다주는 그리 많지 않은 월급으로 근근이 살림을 꾸리고, 집안의 온갖 대소사를 박수무당에게 의존하는 시어머니와 갈등을 겪으면서 결혼이라는 현실에 조금씩 무뎌져간다. 신혼의 재미도 모르는 채 일상은 급격히 권태로워졌고, 그즈음 시장통에서 ‘그 남자’의 누나를 우연히 만나 그의 소식을 전해 들은 나는 그 남자와 재회하며 또 한 번 현실로부터의 일탈을 꿈꾼다. 남편과 시어머니의 눈을 피해 은밀한 만남을 이어가던 어느 날, 그는 하룻밤의 밀월여행을 제안한다. 나는 짜릿한 기쁨을 느끼며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지만, 약속 당일 그는 기차역에 나타나지 않았고, ‘어딘가로 붕 떠올랐다가’ 다시 세상으로 내팽개쳐진 나는 크게 앓고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오지만, 그 남자가 뇌수술을 했고 시력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나는 얼마간의 세월이 흐른 후 그와 재회하게 된다. 이미 모든 것이 달라진 뒤였다. 여전히 청년 시절의 낭만과 철없음을 간직한 그와 달리, 나는 네 아이를 둔 엄마이자 억척스러운 아줌마가 되어버렸으므로. 나는 그에게 첫사랑의 설렘이 아닌 육친애적 분노를 느끼며, 이제 그만 장님임을 인정하고 새롭게 살아가라고 욕설을 섞어 충고하는 것으로 그와의 관계를 끊어버린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그 남자를 마지막으로 다시 만난다. 그 무렵 그는 중학교 교사인 아내를 만나 아이를 낳고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있었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회상하며 점점 더 굵은 눈물을 흘리는 그 남자를 나는 무너지듯 포옹하며 마침내 담담하고 완전한 그와의 결별을 이루게 된다.
이 소설은 박완서만의 세밀한 묘사와 기지 넘치는 문장으로 이루어진 한 편의 애틋한 연애소설이자, 한 여성의 삶, 나아가 한 시대의 모습을 속속들이 엿볼 수 있는 완벽한 기록물이기도 하다. 전쟁 통에도 광주리장사를 하고 하숙을 쳐서 자식을 먹여 살린 어머니들, 가족을 위해 손가락질도 무릅쓰고 양공주 노릇을 했던 젊은 여성들, 전쟁과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이 된 남자들. 중심인물인 나와 그 남자뿐 아니라 주변인들도 제각각 개성이 두드러져 이야기를 탄탄하고 풍성하게 받쳐준다. 전후의 피폐한 일상과 그 생활전선을 직접 몸으로 겪어야 했던 이들의 실상이 첫사랑이라는 더없이 순수한 감정과 대비를 이루며 가슴 찡한 울림을 선사한다. “온몸에 겨울과 같은 독한 상처를 품었으되 당당한 나목처럼 봄의 언어로 따뜻하게 우리 곁에 서 있던”(구효서) 박완서 작가. 그가 남긴 마지막 장편이자, 그의 삶 자체이기도 한 이 소설이 어느 때보다도 힘들고 지난했던 한 해를 보내고 2021년을 맞이한 오늘날의 독자들에게도 변함없이 따뜻한 온기와 위로를 안겨줄 것이다.
■ 추모의 글 (《현대문학》 2011년 3월호 ‘박완서 추모특집’에서 발췌)
6.25의 파괴적인 충격과 그 여파의 꼼꼼한 관찰과 묘사가 박완서 선생이 추구하신 줏대 되는 주제였습니다. 당대 현실에 더없이 충실하면서도 재미있게 읽히는 소설은 생동하는 인물, 설득력 있는 세목, 감칠맛 나는 지문, 실감 나는 대화로 차 있습니다. 문학으로서 뛰어날 뿐 아니라 20세기 후반의 사회사로서도 압권이지요. 우수한 문학 작품이 사회 증언적 가치도 풍요하다는 문학사회학의 명제를 시퍼렇게 구현하고 있습니다. _유종호(영문학자, 문학평론가)
박완서 선생님이 말이나 글에서 남을 비판하는 일은 거의 없다. 남보다는 자신에 대한 비판, 비판보다는 우리 모두가 지닌 속물근성을 꿰뚫어 보는 해학적 시선, 그리고 거기에 대한 연민과 이해를 거쳐 궁극적인 사랑에 이르려는 노력, 그것이 선생의 삶이요 문학이었다. _김화영(불문학자, 고려대 명예교수)
전후의 가난한 아낙들 곁에 말없이 서 있던 박수근의 겨울 나목을 보며 늠름하고도 숨 쉬는 듯한 정겨움을 느꼈다던 선생님. 온몸에 겨울과 같은 독한 상처를 품었으되 당당한 나목처럼 봄의 언어로 따뜻하게 언제나 우리 곁에 서 계시던 선생님. 당신의 마지막이 조용하고 완벽한 ‘붕괴’이기를 희망하셨던 선생님이셨으나, 선생님의 천성적인 겸손을 받아들일 수 없어 나는 한 글자를 빼고 그것을 ‘붕(崩)’이라 부른다. _구효서(소설가)
박 선생님의 글에 등장하는 가족 이야기나 소소한 일상의 기쁨과 서글픔은 내 기억 속의 1960년대와 1970년대를 되돌아보게 하기에 더욱 귀하게 생각된다. 박 선생님께서는 항상 다소곳하시지만 당당한 모습으로 내게 그런 삶을 실천하시는 분으로 느껴졌다. 눈에 뜨이지 않는 사소한 것에 눈길을 돌리고 사랑을 베푸셨던 박완서 선생님은 그 시대를 살아왔던 우리 모두의 어머니가 아니셨나 생각한다. _구본창(사진작가)
글에서도 삶에서도 늘 부족하고 미흡하기 그지없는 저를 그토록 알뜰히 챙겨주셨던 선생님, 당신의 신간을 제게 증정하실 적엔 서명과 함께 ‘사랑합니다’라는 글귀를 꼭 넣어주셨던 선생님, (……) 병석의 저를 대신하여 초대된 성당에서 특강사례비로 받아 오신 봉투를 저에게 내밀며 ‘수녀님 대신 내가 간 것이니 당연히 나누어야 한다’며 유쾌한 웃음 속에 건네주신 기억도 새롭습니다.
_이해인(수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