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기발랄하면서도 흡입력 강한 글쓰기로 주목받고 있는 이기호 작가의 첫 장편소설 『사과는 잘해요』가 현대문학에서 출간된다. 차세대 이야기꾼의 대표주자로 꼽히며, 독보적인 소설 어법으로 한국 소설 언어의 새로운 지형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는 작가 이기호는 『사과는 잘해요』에서도 재기 넘치는 서사의 힘을 유감없이 과시하고 있다. 2008년 11월부터 2009년 4월까지 국내 대표 포털 사이트 Daum에 연재된 이 작품은 인간의 어두운 본성과 죄에 대한 철학적 탐구를 문장 곳곳에 숨겨진 ‘풍자’와 ‘유머’로 형상화하여 네티즌으로부터 열렬한 호응을 이끌어내었다. 특히 단행본으로 묶으면서 골격만을 남기고 전면 개작하여 연재 당시의 빠른 호흡과 경쾌한 문체를 살리면서도 주제 의식은 더욱 선명하게 부각시켰다. 대신 사과를 해주는 ‘사과 대행’을 소재로 사람들 속에 숨어 있는 죄와 죄의식 그리고 부조리한 사회와 제도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작품은, 자신의 죄를 외면하며 의식하지 못하고 사는 현대인들에게 죄를 돌아보라고 경종을 울린다. 폭력의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가 된 주인공들을 통해 우리가 짓는 죄의 의미와 죄의식의 본질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게 하는 소설이다.
제1장 죄를 찾다 1. 시설의 기둥들 2. 아는 집 3. 복지사들 4. 시설 5. 우리들의 죄 6. 고백 뒤에 오는 죄 7. 병력(病歷) 8. 시연과 처음 만나다 9. 포장 10. 뿔테안경 남자 11. 구직 12. 약을 찾으러 가다 13. 아줌마의 죄 14. 반장의 임무 15. 우리가 잊고 있었던 것 16. 두 사람 17. 사과의 시작 18. 죄를 찾다 19. 뿔테안경 남자의 사정 20. 작은 변화들 21. 꺼지지 않는 형광등 22. 큰 싸움 23. 죄를 가르치다 24. 죽은 사람들 25. 사과는 잘해요 26. 사과 뒤에 남겨진 것들 제2장 죄를 만들다 1. 면회를 가다 2. 내가 알고 싶은 것 3. 전단지 4. 총무과장과 식당 아주머니 5. 아이의 사과 6. 작은 새 7. 의뢰인 8. 어머니와 아들 9. 자세의 문제 10. 무죄의 경우 11. 죄를 만들다 12. 하지 못한 말 13. 대신할 수 없는 사과 14. 아빠와 아들 15. 기다리다 16. 사과를 돕다 17. 사과를 지켜주다 18. 사과는 사과를 만든다 19. 누군가 또 있다 제3장 죄를 키우다 1. 다시 만난 복지사들 2. 살아 있는 죄 3. 죄를 파헤치다 4. 시봉을 떠나다 5. 거짓말 6. 아무도 없다 7. 내가 알지 못했던 사과 8. 죄를 키우다
사과 대행업이라는 소재로 들여다본 밑바닥 인생 만화경 작가 이기호는 소설집 『최순덕 성령충만기』와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를 통해 앞선 세대가 공유했던 보편적 주제를 작가 특유의 유쾌함과 발랄함으로 완전히 새롭게 버무려내는 탈권위적 화법의 글쓰기로 주목받아왔다. 『사과는 잘해요』에서 작가는 이전보다 좀 더 절제되고 단정한 문장을 구사한다. 그러나 내용 면에서 볼 때 이 소설은 밑바닥 인생들의 비루한 이야기를 작가 특유의 생생한 언어로 형상화해온 전작들의 연장선상에 있다. 『사과는 잘해요』역시 ‘루저’들을 주인공으로 삼아 부조리한 삶과, 인생의 아이러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시설’에서 살다가 뜻하지 않게 사회로 나오게 된 두 청년, 시봉과 진만이다. 어수룩하고 모자란 이들은 사회에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결국 시설에서 배운 것이자 자신들이 가장 잘해온 일인 ‘사과하기’로 돈을 벌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시봉과 진만은 사과를 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감추고 있는 은밀한 죄, 죄의식과 마주친다. 그리고 의뢰인들의 사건을 해결하면서 자신들의 마음에 숨어 있는 욕망까지도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죄는 많고도 많고, 대신할 사과도 산처럼 가득하다. 세상 모든 일은 죄가 될 수 있으며, 심지어는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죄’가 되는 것이다. 경쾌한 스토리 속에 담긴 죄에 대한 묵직한 성찰 이 소설의 주인공 시봉과 진만은 이미 이기호 소설에 여러 차례 등장한 캐릭터로, 작가의 페르소나이자 항상 사회와 제도로부터 무시당하고 조롱당하며 고난을 겪는 인물들이다.『사과는 잘해요』에서도 이들은 ‘시설’로 대표되는 사회에 의해 주체적이며 독립적인 삶에 대한 의지를 상실한 상태, 다시 말해 미성숙한 아이와 같은 상태로 감금되어 있다. 이들은 시설을 벗어나서도 여전히 시설에서 먹던 ‘약’을 먹으며 심지어 ‘세상 모두가 다 병원 안이길’ 바란다. 작가가 바라보는 사회는 이처럼 무력과 공허감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희망은 있다. 소설의 화자인 ‘진만’은 그 뿌연 안개 같은 현실 속에서도 조금씩 삶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회복해간다. 또한 이 소설은 무엇보다도 죄의 속성과 본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를 잊은 채, 혹은 죄가 죄인지도 모르는 채 살아간다. 죄를 지어도 속죄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남들에게 미루기까지 한다. 죄를 대신 속죄하는 것, 즉 ‘대속’이라는 측면으로 볼 때 이 소설은 종교적인 함의까지 띠고 있다. 『사과는 잘해요』의 세계는 현실과 비슷하나 현실과는 한 뼘 거리를 두고 있는 우화의 세계이자, 우화가 현실처럼 느껴지는 세계이다. 조롱과 연민, 아이러니와 페이소스로 빚어낸 이 세계를 탐구하면서 독자들은 ‘원죄’로 대표되는 죄와 죄의식, 그리고 교양 뒤에 감추어진 문명의 민얼굴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소설이 선사하는 가장 큰 즐거움은 한땀 한땀 치밀하게 조직된 이야기의 힘을 맛볼 수 있는 점이라 할 것이다. ■ 줄거리 ‘시설’에서 처음 만난 시봉과 나는 시설의 복지사들에게 함께 매를 맞으며 친해졌다. 복지사들이 준 알약을 매일 먹으며, 양말 포장 일을 하는 우리에게 복지사들은 “네 죄가 뭔지 아냐”고 매질을 한다. 우리의 죄가 뭔지 모르는 우리는 매를 맞지 않기 위해서 복지사들에게 죄를 지었다고 거짓말로 먼저 사과부터 한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꼭 거짓말로 고백했던 그 죄를 저지른다. 그래야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다. 복지사들은 우리에게 다른 원생들의 죄를 찾아내 대신 사과하기를 담당하는 ‘반장’의 임무까지 맡기는데, 연달아 원생들이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우리의 ‘반장’ 임무는 종료된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원장선생님과 복지사들이 잡혀가는 사건이 발생하고, 시봉과 나는 시설을 떠나 사회로 나오게 된다. 과거를 기억 못하는 나는 시봉과 함께 시봉의 여동생 시연의 집에 찾아가 얹혀살기 시작한다. 임대 아파트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시연에게 우리는 버거운 존재다. 결국 시봉과 나는 돈을 벌기 위해 우리가 가장 잘하는 일을 하기로 마음먹는다. 시설에서 배운 ‘사과’하기가 바로 그것이다. 죄 많은 세상에서 우리는 죄지은 사람을 찾아 나서고, 우리의 사과 대행업은 하나하나 완수되어간다. 그런데 우리 앞에 복지사들이 다시 나타나면서 모든 일이 틀어진다. 우리에게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죄라고, 그 죄를 사과하라고 말하는 복지사들. 나는 우리의 죄를 갚기 위해 아주 중대한 결심을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