텁텁하고 맛깔진 우리 풍속과 정서를 예리한 사려와 해학에 담아낸 최일남의 열세 번째 소설집. 2001년 이후의 발표작 7편과 1997년에 발표했던 <아침에 웃다>를 더한 8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표제작 <석류>는 폐렴으로 세상을 뜬 누이와 어머니의 석류에 얽힌 가슴 아픈 일화를 통해 인간 내면에 터질 듯 알알이 박혀 있는 '회한'과 추억을 들추어본다. 저자는 개인주의화 되어가는 사회 인습을 비판하고 포용하며, 지금은 거의 사어가 돼버린 우리 언어를 아름답게 세공하여 생생하게 되살려내고 있다.
최일남 1932년 전북 전주 출생으로 서울대 문리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53년에는 『쑥 이야기』가 <문예>에, 그리고1956년에는 『파양』이 <현대문학>에 추천되어 등단했다. 저서로는 소설집 『서울 사람들』『타령』『춘자의 사계』『손꼽아 헤어보니』『너무 큰 나무』『홰치는 소리』『누님의 겨울』『히틀러나 진달래』『그때 말이 있었네』, 장편소설 『거룩한 응달』『그리고 흔들리는 배』『숨통』『하얀 손』『덧없어라, 그 들녘』『만년필과 파필스』등이 있다. 이상문학상, 월탄문학상, 한국소설문학상, 한국창작문학상, 인촌상 등을 수상했다.
■ 이 책은 속도가 버리고 간 텁텁하고 맛깔진 우리 풍속과 정서를 예리한 사려思慮와 해학에 실어 자분자분 거두어두는 손속의 미학… 소설가 최일남의 열세 번째 소설집 『석류』가 출간되었다. 왕성한 작품활동으로 '원로'라는 수식을 아예 불식시키는 최일남의 이번 소설집에는 2001년 이후의 발표작 7편과 1997년에 발표했던 <아침에 웃다>를 더한 8편의 단편을 담고 있다. 소설가 최일남의 열세 번째 소설집 『석류』가 출간되었다. 왕성한 작품활동으로 '원로'라는 수식을 아예 불식시키는 최일남의 이번 소설집에는 2001년 이후의 발표작 7편과 1997년에 발표했던 <아침에 웃다>를 더한 8편의 단편을 담고 있다. 이번 소설집은 "번개처럼 질주"하는 광속의 시대가 떨쳐버려 퇴화되고만 문화, 그렇지만 아직은 시효적절한 문화에 대한 발굴이라 할 만하다. 작가는 거시적이기보다는 미시적인, 국가의 역사 운운이 아닌 역사를 몸으로 살아낸 보통의 소시민들의 일상에 눈길을 주고 그들의 '삶의 질'을 측량해내고, 해낸 그 값을 미구의 잣대로 삼는다. 그 잣대는 예사롭지 않다. "웰빙" "신토불이" 등의 슬로건에 제압된 현실에 대한 예리하고 통렬한 비판이 수반되는 작업, 그러나 그 작업은 시종 근엄할 수가 없다. 최일남 특유의 해학이 물씬한 가락과 감칠맛 나는 어법에 힘입어 때로 강렬하게 다가오는 페이소스가 흥겹기조차 하다. 신구의 경계에 서서 무게중심을 잡는 노대가의 속 깊은 성찰은 그 자신의 문학적 성취 이전에 한국문학의 값진 수확이 될 것이다. <명필 한덕봉>은 이대에 걸친 대서사 집안의 대서일을 통해 글쓰기의 의미를 짚어내고 있다. "세상을 왕창 들었다 놓는 소용돌이"와 같은 해방공간 속에서 "좌우로 갈린 아버지와 아들"의 이념의 대립은 소속 단체의 "선전문건"을 쓰는 행위로 상징되고, 한 개인이 아무리 단순하거나 복잡하더라도 시대에 연루되어 정치적이게 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아들(형)의 글 쓰는 행위는 "작은 틈새로" 세상을 바라보는 행위이며, 그 행위는 "때로는 큰 테두리를 그리는 단서 구실을 한다"며 문학의 존재 근거를 중첩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작가 자신의 작품들은 "세상을 살아낸 어떤 증거나 확신의 흔적"이라고 밝힌다. <물구나무서는 입>은 노부부와 손녀, 맞벌이 주말부부 며느리와의 한때가 배경이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정치 슬로건"이 있던 "옛날 한 옛날"이 지나 "못내 안타까운" 핵가족 시대, 세계화 열풍에 밀어닥친 영어와의 전쟁, 아파트 분양권 쟁탈전, 육아문제에 시달리는 도시 서민들의 일상이 단면적으로 묘사되고, 며느리의 물구나무서기와 할머니의 회상이 이어진다. <멀리 가버렸네>에는 노년에 든 네 사람의 지난 세상사에 대한 소상한 회고이다. 자유당 시절과 50년대의 풍경 속 "서민의 술상에 오르는 이야기" 같은 자잘한 이야기를 네 노년의 입으로 술회한다. 이는 "혼자 떠돌다 소멸하는 것 가운데도 괄목상대해야 할 대상이 없지" 않기 때문이리라. 표제작 <석류>는 폐렴으로 세상을 뜬 누이와 어머니의 석류에 얽힌 가슴 아픈 일화를 통해 인간 내면에 터질 듯 알알이 박혀 있는 '회한'과 추억을 들추어본다. 작품 전체가 그렇지만 이 작품이 갖는 특징은 "벽에 걸린 시래기 소쿠리를 눈으로 쓰다듬으며 솥뚜껑 여닫는 소리를 좇아 슬금슬금 들어선 부엌, 아니 정지는 온갖 평화의 냄새와 소리로 그득" 등등의 표현이 보여주듯 지금은 거의 사어가 돼버린 언어를 아름답게 세공하여 생생하게 되살려내는 데 있다. <돈암동>은 미국의 지기에게 보내는 장문의 서간문 형태를 취한 작품으로, 서울의 변천사와 "우리"에서 "나"라는 개인주의화 되어가는 사회 인습을 비판하고 포용하고 있다. <버선>은 어머니의 바느질방에서 만들어지던 무명옷에서 현재의 나일론 일색인 옷문화에 대한 감칠맛 나는 고찰이다. 어머니에게 타박을 들어가며 버선 짓는 법을 배우던 누이의 이루어지지 못한 연애, 그리고 초겨울 음독자살한 누이의 널 속에 꽃버선을 사 넣어주는 어머니의 이야기는 애잔하기만 하다. <소주의 슬픔>은 친구를 하관하고 묘 앞에서 다른 한 친구와 죽음을 안주삼아 소주를 마시며 술문화의 변천을 주고받는 것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대동아전쟁 당시 줄서서 잔술을 사 마시던 풍경, 일제시대 마사무네(정종), 기린과 삿뽀로로 이어지는 삐루에 이르기까지 근대 한국의 술의 변천사를 일별할 수 있다. 그리고 끝 대목, 묘지 앞에서 이야기를 주고받던 친구가 넉 달 만에 "죽을 날을 기다리"면서 병상에 눕고, 주인공이 술 없이 빈손으로 문병 오자 "한잔 마셨다고 두 번 죽냐. 인정머리 없이 빈손으로" 왔다고 호통치는 대목과 "친구가 죽으면 쓸쓸하지만, 한편 즐겁기도 하다"는 "농반 진반의 해학"은 코끝을 찡하게 만든다. <아침에 웃다>는 서민생활 풍속 중 가장 직접적이고 원색적인 '욕'에 대한 이야기. 인근에 욕쟁이 '할마이'로 명성을 굳힌 콩나물해장국집을 무대로 펼쳐지는 걸쭉한 욕설들, 그 욕설은 누구에게 해코지를 하는 게 아니라 서로에게 입의 "배설"을 허락하는 일종의 카타르시스 작용이다. 하지만 욕쟁이 할마이의 욕설의 종말은 거리에서 안방에서 실제로 "오살 육시를 눈 하나 깜짝 않고 저질"러지는 현대에는 필연이 될 수밖에 없다고 자조하며 세태에 일침을 가한다. 이 소설집 전편에서 소설가 최일남이 천착하고 있는 '과거'는 현대의 가속에 제동을 거는 '반문'인 동시에 현대인들에게 '여유'와 '숨통'을 터줄 수 있는 산소마스크 같은 테제들이다. ■ 본문 중에서 아버지는 언젠가 말했다. "좌익은 말이 많은 만큼 선전문이 길고, 우익은 말이 뜬 만큼 선전문이 짧다"고. 단순한 판독이나마 옳게 보았다고 믿는다. 증명할 재료를 찾아 헤맬 것이 없다. 거리에 흔전만전 나돈 당시의, 크기가 똑같은 삐라 한 장으로 족하다. 대개의 경우 우익 글씨는 크고 좌익 글씨는 잘다. 새삼스럽게 길고 짧은 걸 대어 본다든가 자수를 헤아리기 구차스럽다. 눈대중으로도 대번에 가능한 일이었으니까. -「명필 한덕봉」중에서 "이것도 누군가가 지어낸 난센스의 하나겠지만, 어떤 신문기자가 시골할머니의 딱한 사정을 취재하다 말고 부지불식간에 뜨거운 감자를 만나셨군요 했단다. 하필 그런 자리에서 유식을 떨래서 그랬겠냐. 입에 붙은 말이 그냥 새나온 거야. 그랬더니 할머니가 뭐라고 대꾸한 줄 아니?" "몰라." "감자는 뜨거울 때 먹어야 혀. 식으면 맛없어." -「멀리 가버렸네」중에서 한 팔로 마루 기둥을 감고 서산에 지는 빨간 햇덩이를 바라보며 흘린 말이 가령 그렇다. '엄마 나는 이런 시간이 가장 좋아' 소리를 나직이 깔자 어머니는 금세 눈이 똥그래졌다. 이윽고 조르르 다가가 누이의 뒤통수에 알밤을 먹였다. '쥐방울만 한 것이 웬 청승이냐' 엄포를 놓았다. 그러나 죽기 며칠 전, 어머니가 건넨 탕약 대접을 본체만체 '석류가 먹고 싶네' 했을 때는 눈물부터 훔쳤다. '이 한겨울에 어디 가서' 했을지언정 어머니는 그 걸음으로 당장 대문을 나섰다. 그날은 허탕을 쳐 빈손으로 돌아왔으나 다음 날은 어디를 어떻게 뒤졌는지 검붉게 말라비틀어진 석류 두 알을, 말라빠지기는 매한가지인 누이 손에 쥐어주었다. 숙진이는 고맙다고 힘없이 웃고, 어머니는 목이 메는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뿐이었다. -「석류」중에서 "버선목처럼 뒤집어보일 수도 없어 답답하다는 말도 있더구만, 쉽기는 쉽네요." "터진 입이라고……." 잠자코 구경이나 하면 될 걸, 그새를 못 참아 나불거린 누이를 어머니는 당장 비꼬았다. "버선도 이제 보니 이쁘네요. 오똑한 버선코가 참." "언제는 밉디. 외씨버선 소리가 왜 나왔깐디. 조붓하고 갸름한 생김새를 어찌 양말에 댄다냐." "근데 양말은 왜 양말이라고 부를까. 양버선이라 하지 않고. 양잿물, 양초는 머리에 모자를 얹듯이 다 갖다 붙임시롱." -「버선」중에서 온 강산이 더러운 밤꽃 냄새로 그득한 꼬락서니다. 어린것들은 어린것들대로, 늙은 사내새끼는 사내새끼들대로 발정난 개들처럼 헉헉댄다. 벌건 대낮의 개 흘레같이 막가는 그 배설은, 그 행위의 잔인성 때문에 수시로 죽음을 부르고 인생 파철의 절망을 사람들의 가슴에 심기도 한다. 뿐인가. 고전적인 욕설은 쪽도 못쓸, 기상천외한 새 욕설이 컴퓨터 속에 낭자한다. 폭력 영화는 게다가 어떻고? 이래저래 할마이 욕설이 종말을 재촉하고 있다. -「아침에 웃다」중에서 ■ 작품 해설 중에서 작가 최일남 씨가 서 있는 자리는 이른바 해방공간에서 철들고, 6·25적에 대학생활을 한 전중戰中세대이지요. 전중세대가 '살아낸 역사'에 주목할 것입니다. '살아냈다'란 무엇인가. 백두대간모양 우뚝한 조리를 세워 말할 수 없는 역사(현실)이지만, 이것만큼 확실한 것이 따로 없다는 것입니다. 어째서? '공유하는 역사'이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이 '공유한다'에 있지요. '살아냈다'와 '공유한다'에 무게중심이 놓인 글쓰기. 이 둘을 관통하는 힘줄이 바로 '고통'이겠지요. 고수답게 최일남 씨는 이를 '곰삭은 것'이라 바꾸어 부르기도 했더군요. -김윤식(문학평론가·서울대 명예교수) 최일남의 소설을 읽는 재미는 너무 크지 않은 사이즈의 국어사전을 꺼내어 그 갈피갈피에 손가락을 넣고 애완견의 털을 애무하듯 페이지를 뒤적이고 쓰다듬으며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처럼 소설의 어휘와 어조와 가락을 느릿느릿 음미하는 데 있다. -김화영(문학평론가·고려대 교수) ■ '작가의 말' 중에서 거시적 담론보다는 소소한 일상에 집착하는 쪽으로 인심이 기운 지 오래다. 기존의 가치관에 물린 때문일까. 단조로운 내리닫이 역사의 틈을 파헤쳐 주석이 본문을 압도하도록 기를 쓰고 있다. 개중에 특기할만한 것이 새로운 현상에 대한 탄핵 차원의 냉소다. 이를테면 '웰빙'이 그런 셈이다. 유행가 같은 '삶의 질' 중심에 돌고 돌아 고작 웰빙을 갖다 놓고 건강을 구가하다니. 시틋하게 바라보던 '신토불이'와는 무엇이 어떻게 다른가를 따질 것 없다. 날로 새롭다고 믿는 현실이야 말로 진부하다는 증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