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여 년 동안 성실히 자신만의 소설 지평을 넓혀온 김서령의 두 번째 소설집『어디로 갈까요』가 현대문학에서 출간되었다. 김서령은 첫 소설집 『작은 토끼야 들어와 편히 쉬어라』로 옛 풍경이 되어버린 도시 서민층의 삶을 세밀한 묘사력과 서정적 문체로 복원했다는 평을 들으며 단숨에 문학상 최종심에 올랐고, 2010년 발표한 첫 장편『티타티타』에서는 아릿한 성장통을 견뎌내며 어른이 되어가는 두 여자의 이야기를 통해 삶에 영원히 아마추어일 수밖에 없는 우리 인생을 따뜻하게 끌어안으며 동시대 소설가군 가운데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이 소설집은『티타티타』를 전후한 시기에 씌어진 단편소설 9편을 엮었다. 하나같이 인생에 서툰, 한없이 외롭고 약하고 착한 수많은 당신들이 맞닥뜨린 이별의 풍경들이 작가 특유의 투명하리만치 섬세한 문체로 펼쳐진다. 표제작 「어디로 갈까요」는 2011년 이효석문학상 최종 후보에 올랐으며, 2011년 작가가 선정한 올해의 소설에 뽑히기도 했다.
이별의 상처를 안은 채 부유하는 존재들의 행로 찾기,
그 도저한 여정에 건네는 위안
『어디로 갈까요』 속 인물들은 변두리표 인생들이다. 농담 같은 불행을 마주한 연약한 인생들이다. 그들은 모두 심각한 이별의 상황에 봉착했거나 봉착해 있다. 「이별의 과정」에서는 청춘을 함께한 남자친구가, 「어디로 갈까요」에서는 빚만 남기고 자살한 남편이, 「내가 사랑한 그녀들」에서는 무능하기 이를 데 없으면서도 바람까지 피운 남편이, 「애플민트 셔벗케이크」에서는 이혼한 전남편이, 「돌아본다면,」에서는 몇 달간 사귀다가 사고로 죽은 대학교 시절 남자친구가, 「오프더레코드」에서는 실종된 신문사 남자동기가, 「산책」에서는 췌장암으로 죽은 남편이, 「거짓말」에서는 꽃다운 나이에 익사한 오빠가, 「캣츠아이 소셜클럽」에서는 자기 편한 대로 이용만 한 박 언니가 이별의 대상이다. 해설을 맡은 이경재의 표현에 의하면 이번 소설집은 흡사 우리 시대의 이별과 그에 대처하는 자세, 즉 애도의 다양한 사례들을 모아놓은 백과사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의 삶 자체가 이별의 연속이고 이별의 과정이며 이별의 작업이라는” 김서령식 이별의 미학은 소설집 전체를 관통한다.
결국『어디로 갈까요』는 무수한 이별의 상처를 안은 채 부유하는 존재들을 향한 위안의 이야기들이다. 저마다 마주한 생의 통증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다독이는 예의 김서령만의 목소리는 이 소설집에서도 오롯이 빛난다. 거기에 상처받은 자들의 연대기와도 같았던 전작들에서 좀더 나아가 이별의 윤리를 터득한 자만의 울림을 선사한다. 쓸쓸하고 막막한 풍경 뒤에 어리는 고요한 온기는 독자들을 위무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어디로 갈까요』에서 김서령만이 가꾸어낸 이 비경이야말로 한국문학의 또 다른 감수성의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내용
이별의 과정_ 나는 열여덟 살부터 연애를 해왔던 남자친구와 서른을 코앞에 두고 끝내 이별한다. 함께 자라며 공유하지 못하는 기억 따위 없지만 이별에는 이유가 없다. 현재 서른다섯 살이 된 나는 젊은 날 아빠가 엄마를 두고 체르니 피아노 교실 선생님과 이별했듯이, 또 나이가 들어 그녀와 영영 이별했듯이, 생은 언제나 이별의 과정임을 이제는 안다.
어디로 갈까요_나는 죽을 때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일을 해도 갚을 수 없을 정도의 빚만 남기고 자살한 남편의 장례식을 마치고, 11년을 일했던 화장품 회사를 그만둔다. 지사장의 노예처럼 일했고, 남편의 쌓여만 가는 빚과 자격지심을 버텨내면서 늘상 그들 곁에서 사라지는 것을 꿈꾸곤 하던 그녀였다. 런던으로 떠나온 나의 배 속에는 이미 새로운 생명이 깃든 후다. 다시 낯선 로마의 민박집에 든 나는 한국에서 신용불량자가 되어 도망쳐 온 주인남자의 외로움을 이해한다. 어디로 갈지 목적지도 정하지 못하고 또다시 떠나는 그녀는 주인남자와 악수한다. 그 손을 놓고 나면 더 외로워질 것을 알기에 조금 더 오래 손을 잡고 있을 뿐이다.
내가 사랑한 그녀들_나는 다시 올 거라 생각 못 했던 한 도시에 친구의 부름을 받고 찾아든다. 그곳에는 한때 노랑머리 여자아이와 바람난 백수 남편과의 기억이 서린 낡은 병원이 자리하고 있다. 그 병원에 머물렀던 동안 함께했던 깁스 언니, 코르셋 언니, 뚱보 언니를 떠올린다.
애플민트 셔벗 케이크_나의 두 번째 애인은 대형학원의 잘나가는 토익 강사다. 그녀와 연애를 시작한 나는 그녀가 사실 전남편의 외도로 이혼했음을 알게 된다. 외도의 증거들을 간직한 채 그 증거들을 곱씹으며 현재를 버텨가는 그녀가 안타깝지만, 언젠가 그녀는 스스로의 결정으로 그 증거들과 헤어질 것이고 반창고로 꽁꽁 싸매지 않아도 살이 아문다는 것을 알게 되리라 믿는다.
돌아본다면,_방송작가인 은주는 드래그레이서인 남자친구의 레이싱 때문에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남쪽 도시에 내려온 참이다. 은주는 어쩔 수 없이 후기대학에 진학해야 했던 그녀의 과거를 떠올린다. 엠티를 간 민박집에서 화재로 죽은 고작 몇 달 사귄 남자친구 준영의 이야기를 드라마와 에세이로 이용한 바 있던 은주는 대학 시절 친구였던 K와 대면한다. 준영에 대한 기억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확인한 은주는 느리고 느린 청춘이 흘러갈 때 잠깐 얼굴 한번 마주쳐본 사람을 건방지게 아는 척했구나, 생각한다.
거짓말_ 입덧에 시달리고 있는 나는 은행 직원이다. 엄마가 키워주고 있는 아들은 김치를 비롯한 고춧가루가 든 음식은 숫제 먹으려 하지 않는다. 이는 제대 후 강원도 겨울 바다로 낚시여행을 떠났던 오빠의 죽음 탓이다. 물에 빠진 고추장 통을 건지려다 방파제에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오빠의 죽음은 가족에게 상처를 남긴다. 십 수 년이 흐른 후 은행에서 마주한 한 여자는 오빠의 죽음에 대해 보잘것없는 진실을 말해준다. 나는 엄마에게 은행에서 만났던 여자 이야기를 하며 거짓말을 한다.
오프더레코드_나는 신문사 입사 동기였던 유신원이 실종된 지 몇 년이 지났음에도 신원의 아내인 지영을 찾아간다. 아직도 신혼집에 그대로 살고 있는 지영에게 스마트폰의 녹음버튼을 누르지만 지영은 도리어 내게 묻는다. 신원은 어떤 사람이었느냐고.
산책_ 몸매 전문 성형외과의 코디네이터인 나는 수술 부작용으로 매번 난동을 피우는 조도로시라는 이름의 스물여섯 살 여자를 상담한다. 나의 스물여섯 시절은 어떠했던가. 4년을 만난 남자친구에 이별을 고하고 선본 지 6개월 후 결혼한다. 신혼 한 달이 지날 무렵 남편은 췌장암 진단을 받고 농담 같은 투병 후 임종실로 옮겨진다. 도로시는 미국 이민국 수용소에서 그녀를 데려가줄 가족을 기다렸으나 아무도 나타나지 않자 한국으로 강제추방된 후 이십대가 된 것이다. 도로시는 영주권을 받은 그녀의 가족들이 있는 곳으로 여행을 떠나고 나는 인천공항으로 배웅을 나간다.
캣츠아이 소셜클럽_나는 마이너 방송국의 라디오 PD다. 대학교 시절 박 언니라 불렸던 풍만한 몸매의 푸근한 그녀를 끌어들여 광고를 따내기 위한 잔꾀임이 분명한 프로그램을 만든다. 박 언니는 프로그램을 활성화시키며 청취율을 높이지만 점점 변해가는 그녀와 함께 이후 방송도 막을 내린다. 박 언니에게 일말의 부채감을 느끼지만, 나는 잊을 건 골라 잊고, 기억할 건 골라 읽는 서른일곱 살이 되었다.
■ 추천의 글
김서령의 소설을 읽을 때는 섬세한 위로를 기대하게 된다. 이름은 없으나 우리가 명백히 마주한 상처에 대해 작가는 이야기한다. 자기부정과 피해의식, 죄의식과 연민이 얽힌, 아주 흐릿하고 모호하여 하소연하기도 어려운 생의 통증을 들여다본다. ‘사람은 누구나 속으로 묵혀야 하는 쓸쓸함이 있고, 밖으로 까발려야 하는 우울이 있다’고 표현된 세계로 소설의 인물들은 대책 없이 뛰어든다. 김서령은 기억이 풍부한 작가이다. 인생은 최소한 두 번은 걸어봐야 한다고 믿는 사람처럼 기억을 되짚고 재구성하는 일에 집요하다. 화해도 없는 세계에서 인생에 서툰 주인공이 흔들리며 걸어 나올 때 우리는 삶의 민얼굴을 보게 된다. 그게 제 얼굴이라는 자각에 이르러 몸이 통째로 떨린다. 간지러운 소리 한 마디 없이 시원한 문장으로 미세한 세계까지 아우르는 품 탓에 그의 위로는 더욱 뜨겁다. _전성태(소설가)
상처받은 자들의 연대와 말하기는 김서령 문학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이번 소설집을 포함해서 김서령의 대다수 작품들은 우리 사회의 변두리표 인생들을 다루고 있다. 김서령은 상처의 치유는 바로 그 못난이들의 조촐한 연대를 통해서 가능하다고 말한다. 이것이야말로 그의 문학이 보여주는 위안이 결코 값싼 대중성으로 떨어지지 않으며 사회적 파장을 형성시키는 근본적인 이유이다. 김서령은 주밀하고 감각적인 문체로 이 시대의 현실적인 문제를 인간 삶의 근본적인 문제로까지 확장시켜 형상화할 줄 아는 한국문학의 귀중한 자산임에 분명하다. _이경재(문학평론가)
■ 본문 중에서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내가 K라는 한 남자와 이별을 했던 과정이다.
나의 아빠도 피아노 선생님과 젊은 날 이별을 했고, 또 나이가 들어 그녀를 영영 더 먼 곳으로 보냈다. 나의 엄마는 내가 알 도리 없지만 어떤 식인가의 이별을 겪었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속으로 묵혀야 하는 쓸쓸함이 있고, 밖으로 까발려야 하는 우울이 있는 법이다. 무얼 묵히고 무얼 까발릴 것인지는 아무도 짐작할 수 없다. _ 「이별의 과정」 33-34쪽
“어디로 가요?”
“잘 모르겠어요.”
그가 주먹을 쥐고 가슴을 퉁퉁 쳤다.
“그런 말이 아니고! 지금 어디로 가느냐고요. 베네치아로 가는 건지, 파리로 가는 건지, 런던으로 가는 건지! 아니면 한국으로 가는 건지 말이에요!”
나도 가슴을 칠 노릇이다.
“그러게 말이에요. 저도 그걸 잘 모르겠어요.”
일부러 입을 다무는 것이 아닌데,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알았어요, 알았어. 마음대로 하세요. 나도 몰라.”
“들어가세요. 저도 생각을 좀 해봐야겠어요.”
그제야 내려다보니 그는 슬리퍼 바람이다. 저걸 신고 뛰어왔구나. 나는 주머니를 뒤져 동전을 꺼냈다. 자판기에서 콜라 한 캔을 뽑아 그에게 내밀었다. 겉절이와 부추김치와 삼겹살과 또 홍어에 대한 보답치고는 초라하기 짝이 없다. 차가운 캔을 만지작거리던 그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손을 내미니 콜라를 덥석 바지 주머니 안에 집어넣는다.
“잘 가고요, 기차 거꾸로 타지 마세요.”
나는 끄덕인다. 추리닝 바지가 콜라캔 때문에 축 처졌다. 그가 돌아서고 나면 나는 지금보다 훨씬 더 외로워질 것이었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결정하지 못해 그의 손을 조금 더 오래 잡고 있었다. _「어디로 갈까요」 67-68쪽
세상에는 사라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숱했다. 어이없는 일이지만 신원이는 수많은 그들 중의 하나일 테다. 우리는 신원이의 이후를 증언해줄 그 어떤 단서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여전히 지영은 신원이가 무엇을 원했는지 궁금했고, 나는 신원이가 어디로 가버렸는지 궁금했다.
그러므로 신원이를 뺀 우리의 이야기는 기사화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목소리만으로는 어떠한 기사도 쓸 수 없었다. 냄새도 없이, 소리도 없이 아무렇게나 사라져버린 신원이가 남겨둔 나머지 세상에서 지영과 나는 여전히 살아가게 될 것이다. 영영 오프더레코드로 남을 이야기들. 신원이의 모든 이후가 오프더레코코드가 되었듯 말이다.
“언니.”
신발을 신다가 지영을 바라보았다.
“……자고 갈래요?”
그녀는 조금 민망한 듯 눈길을 돌렸다. 나는 무어라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지영을 쳐다만 보았다. 미처 제대로 신지 못한 신발 때문에 휘청대다 한 손으로 신발장을 짚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목을 간질였다. 못 들은 척하는 편이 나았을까. 신발을 마저 신고 가방을 고쳐 멨다. 뒤에서 지영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물소리 같았다.
“자고 갈래요?”_「오프더레코드」 227-228쪽
도로시와 헤어지는 길이면 나는 동네를 혼자 산책하곤 했다. 테헤란로 뒷길은 조용하고 어두웠다. 막다른 골목인 듯 싶어 들여다보면 음악 한 점 흘러나오지 않는 술집이 있었고 또 하나 골목을 돌면 엇비슷하게 생겨 처음 것과 구분이 어려운 또 다른 술집이 나타나곤 했다. 하나같이 닮은꼴이었다. 가끔 누군가가 창 안에서 나를 손짓해 불러주었으면, 했지만 그곳의 술집들은 모두 창문이 없었다. 역삼동 뒷골목을 돌며 나는 내가 가져보지 못한 것, 그리고 내가 가보지 못한 곳들에 대해 종종 생각했다.
열일곱 평 오피스텔의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올 때면 침대에서 누가 팔 벌리고 기다리기도 하는 것처럼 풀썩 몸을 날렸다. 아무도 나를 안아주지 않았다. 하루치의 먼지만 날릴 뿐, 빈 침대였다. _「산책」 242쪽
생애의 어느 과정을 건너뛴 사람들. 어디가 아픈지도 모르고, 그러니 당연하게도 어떻게 치료받아야 하는지도 모르고 살아온 사람들. 나는 내가 한 번쯤 온전한 생애의 과정을 가질 수 있기를 소망한 적이 있었다. _「산책」 256쪽
미로 같은 테헤란로 뒷골목을 하나씩 돌아나갈 때마다 점점 어두워졌다. 맞은편에서 재킷을 손에 말아쥐고 걸어오는 남자가 있었다. 사박사박 흔들리지 않는 걸음걸이. 고개를 숙인 채였지만 취한 사람은 아닌 듯 보였다. 이상한 일이었지만 나는 그가 가까이 오기를 기다려 안기고 싶었다. 나를 한 번만 안아줄래요? 그렇게 말을 건네고 싶었다.
그래서 그가 나를 안아준다면, 아무 설명 없이 잠시만 저 어깨뼈에 이마를 갖다댈 수 있다면 이 피로가 조금은 가실 듯했다. _「산책」 256쪽
소설을 쓸 때면 내 등 뒤에서 가만히 나를 쳐다보는 당신이 있다는 것을 안다. 괜찮아, 괜찮아, 등을 토닥이기도 하고 괜찮니, 괜찮니, 말을 걸기도 한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나는 새침하게 앉아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쯤, 나는 당신을 안아보고 싶다. 당신이 나처럼 이별에 서툰 사람이라면 더 안아보고 싶다. 아니라면, 잘 헤어지는 방법을 모르는 애인을 둔 당신이라도 좋겠다. 이번에는 새침하게 등 돌리고 선 당신을 내가 뒤에서 가만가만. 다정하게. _????작가의 말????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