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급자족’과 ‘미니멀리즘’이 자본주의의 적?!
CIA 요원이 된 소설가, 글쓰기로 현실을 전복하다
중요한 것은 진실이 아니다,
차라리 진실을 가공해내는 서술의 힘이다
―젊은 작가 오한기의 두 번째 장편소설
지금 시대 한국 문학의 가장 신선한 시도를 담고 있는 소설이라 자부할 만한 작가 오한기의 두 번째 장편소설 『나는 자급자족한다』가 출간되었다.
2012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을 통해 등단한 오한기는 2015년 등단 3년 만에 첫 소설집 『의인법』을 펴냈고, 이듬해 제7회 <젊은작가상>을 수상한 동시에 첫 장편소설 『홍학이 된 사나이』를 출간하며 눈에 띄는 활발한 행보를 이어왔다.
그간 소설 창작 과정을 노출하는 메타소설의 양식을 띠거나 자유롭고도 방대한 텍스트 인용과 차용, 각종 패러디가 종횡무진한 오한기의 소설 세계에서 우리는 ‘소설 이후의 소설’을 끊임없이 고민하는 작가의 대담한 시도를 읽을 수 있었다. 한국 문학에서 가장 “적극적이고 끈질긴 ‘소설가 소설’의 발신처”(문학평론가 한영인)이기도 한 작가 오한기의 문학적 모험은 소설가와 CIA 한국지부 비밀공작처장이 등장해 글로벌 자본주의 시대에 자본주의와 경쟁하며 ‘새로운 역사적 적대’를 창조해낸 두 번째 장편소설에도 흥미진진하게 살아 있다.
“그럼 슬슬 한국에 자급자족을 퍼뜨리고 있는 악당들을 살펴볼까요?”
빈곤하고 비루한 삶을 견뎌내던 소설가,
글쓰기의 권능을 손에 쥐다
“자급자족. 이 단어 꼭 기억하세요. 우리는 이제 범죄자들을 체포하고 교화할 거예요. 인류의 근간이 무너지는 걸 막아야 합니다. 카프카, 우리 어깨에 지구가 걸려 있어요. 마음 단단히 먹으세요.” (p. 126)
미아 모닝스타는 주인공 ‘나’가 신혼집 빌라 건물 틈새에 상추를 심는 것으로 시작한 텃밭 일구기도 체제에 불만을 품은 자급자족의 활동으로 간주해 배격한다. 그러나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하는 프리랜서 ‘나’와 최근 대기업을 퇴사한 아내 해인의 눈앞에 펼쳐진 현실적인 ‘빈곤’은 ‘나’로 하여금 취업에 관한 조급함을 부채질했고, ‘나’는 식비를 조금이라도 아끼기 위해 빈 공간에 상추를 심었을 뿐이었다. 텃밭 일구기가 과연 반자본주의의 실천이자 위협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이 물음이 중요한 것은 소설이 진행될수록 미아 모닝스타의 허황한 논리에 뼈와 살이 붙으면서 실체적 위협으로서의 ‘자급자족단’이 그 형태를 갖추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CIA에 제출하는 보고서를 가공해냄으로써, 다시 말해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적절히 허물어뜨려 허구와 진실을 분간해낼 수 없게 만듦으로써 이 소설을 입체적으로 만들어가는 CIA 요원 코드명 ‘카프카’, 즉 이 소설의 주인공인 ‘나’다.
자유분방한 상상력과 핍진한 서술이 빚어내는,
오한기식 소설 쓰기에 대한 유쾌한 패러디!
가히 ‘오한기 월드’라고 칭할 수 있을 만큼 오한기의 소설에는 이렇듯 글을 쓰는 사람들, 동일인인 듯 아닌 듯한 복수(複數)의 소설가, 시인, 작가 지망생 등이 등장하여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데, 『나는 자급자족한다』도 예외가 아니다. 전작 『의인법』과 『홍학이 된 사나이』에 등장하는 여러 명의 ‘나’와 ‘한상경’처럼 『나는 자급자족한다』의 주인공 역시 작가인 그들의 계보를 잇듯이 “각기 다른 제목의 이야기에 여러 모습으로 이어 나오는” 모양새를 갖추고 있으며, 이는 “세상에서 가장 긴 한 편을 쓰는 매력적인 작가”(산문가 김신식)로 호명되는 오한기식 소설 쓰기의 주요한 특징을 형성한다.
결국 『나는 자급자족한다』의 진짜 주인공은 CIA도 자급자족단도 아닌, 따로따로 흩어져 있던 무질서한 단서들이 ‘나’가 가공해내는 보고서를 통해 ‘자급자족단’이라는 실체적 ‘적’으로서 탄생되는 그 과정 자체라고도 할 수 있다. 마주 보고 서 있는 두 개의 거울처럼, 끊임없이 서로를 비추어가는 형태로 소설 『나는 자급자족한다』는 독자를 향해 ‘무엇이 진실이고 진실을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흥미로운 사유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다양한 갈래로 읽힐 수 있는 소설 『나는 자급자족한다』는 작가 오한기가 꾸준히 천착해온 ‘소설 쓰기에 대한 유쾌한 패러디’의 정수를 보여주는 사건이자 문학이 저지를 수 있는 한바탕 시원한 난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은 블로그 포스팅의 형식을 갖춘 서두를 따라가자면 개인의 사적인 기록이 담긴 문서로 읽힐 수 있을 것이고, 시대적 배경으로 설명되는 2017년 봄부터 2018년 봄까지 현실 대한민국에서 벌어졌던 굵직한 사건들―국정농단 사태에서 촉발된 대선과 사드 배치 논란, 동계 올림픽 개최로 이어지는― 속에서 일자리를 잃고 빈곤에 휩싸이는 주인공의 심경을 따라가자면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작금의 세태가 읽히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눈 밝은 독자라면 이 소설을 읽고 나서 신문이나 뉴스를 장식하는 사건들이 과연 진실이라고 선뜻 믿기지 않게 될는지도 모른다. 그만큼 『나는 자급자족한다』가 지니고 있는 다채롭고 흥미로운 에피소드의 층위들은 소설이 마련할 수 있는 재미와 매력을 십분 발휘해 독자들을 독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세계로 이끌어 갈 것이다.
나는 자급자족한다 7
작품해설 360
작가의 말 375
▲ 지은이 오한기는
1985년 경기도 안양에서 태어나 2012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다. 소설집 『의인법』, 장편소설 『홍학이 된 사나이』가 있으며, <2016 젊은작가상>을 수상했다.
▲ 작가의 말
2017년 겨울 눈이 내렸다.
1986년 겨울 눈이 내리는 장면을 상상했다.
1985년 겨울 눈이 내렸다고 들었다.
▲ 해설 중에서
‘자급자족단’은 차라리 글로벌 자본주의의 도도한 흐름에 맞서 주체적이고 대안적인 라이프스타일을 정초하려는 자기생활운동의 느슨한 집합에 가깝다. 겉보기엔 평범한 이들이 자본주의를 위협하는 최대의 적이라는 미아의 말에 덜컥 겁이 난 ‘나’가 “교직과 신도시 아파트 분양권을 포기하고 제주도로 내려가 공방을 연 선배. 한 푼도 없이 세계 일주를 떠난 초등학교 동창. 요가 수련을 위해 인도로 떠난 사촌 형” 등 “자급자족과 약간이라도 관련이 있을 법한 얼굴”을 떠올리는 장면에서 잘 나타나듯 자본의 축적 논리를 비스듬하게 거스르는 사람들의 존재는 우리 사회에서도 이제 낯설지 않다.
문제는 이 삐딱한 거스름을 반체제적 불온으로 승격시키는 편집증적 망상이다. 오한기는 이러한 망상적 주체를 통해 투쟁의 전선을 다시 주체와 세계 사이의 긴장으로 확대시킨다. 이는 첩보물의 문법을 갱신하는 대신 현재의 상황을 과거의 문법으로 재독해하는 것에 가까운데―소설의 또 다른 주인공인 미아가 “시대착오적인 스파이”로 소개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오한기식 첩보 액션물이 적대 없는 시대에 나름의 핍진성을 획득해내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한영인(문학평론가)
▲ 줄거리
각종 글쓰기 아르바이트로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던 프리랜서 작가 ‘나’는 취업을 위해 무턱대고 여러 기관에 입사 지원 메일을 보낸다. 그중 하나가 CIA. 이를 계기로 ‘나’는 CIA 한국지부 비밀공작처장 미아 모닝스타에게 모니터링 요원으로 채용되어 코드명 ‘카프카’를 부여받는다. 스파이 훈련을 받은 뒤 여러 가지 사건을 해결하며 그녀의 신임을 얻는 ‘나’. ‘나’의 주요 업무는 미아 모닝스타로부터 적으로 지목된 사람들을 ‘자급자족단’과 연관 지어 가짜 보고서 작성 및 가짜 뉴스, 괴담을 생성해 유포하는 것이다. 임무 수행을 위해 ‘자급자족단’에 접근해 가던 ‘나’는 대기업을 그만둔 뒤 ‘미니멀리즘’에 심취해 라이프스타일을 바꾸고 있던 아내 ‘해인’을 현장 곳곳에서 맞닥뜨리고 당혹감에 휩싸인다.
미아 모닝스타가 ‘나’에게 숨기고 있는 사실은 무엇이며 아내 ‘해인’은 어째서 ‘자급자족단’에 관련돼 있는 것일까? 아니 도대체 ‘자급자족단’은 어떤 단체이며 뒤이어 나타난 새로운 CIA 요원 ‘주’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또 무엇인가. 모든 진실이 밝혀진 지금, 이제 ‘나’는 아내 ‘해인’을 구하기 위해 진짜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 본문 중에서
이 글은 유서다. 유언을 적은 글이라기보다 죽음을 각오하고 쓴 글이다. 그런 만큼 가급적 명료하게 쓰기 위해 노력하겠다. 초고 삼을 만한 글을 써둬서 당시 정황이나 심경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던 게 그나마 다행이다. 그래도 기억이라는 게 늘 그렇듯 비논리적이고 비약적일 수 있으니 미리 양해 부탁한다. 혹시 몰라 보고서 사본을 모아두었던 것도 큰 도움이 됐다. 출판사에 투고할 생각도 해봤는데, 일단 인터넷에 올려 다수에게 무료 배포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인도 내 결정을 듣는다면 동의할 것이라 믿는다.
(pp. 8-9)
자급자족단은 글로벌 캐피털리즘에 역행하며 시대정신을 저해하는 반체제 조직이다. 자급자족이라는 가치를 핑계 삼아 세계 주도권 탈취를 목표로 테러와 범죄를 자행하고 발전을 방해하며, 문명 및 문화유산 파괴, 좌파 정부/진보정당/독립지원국 지원, 시민사회 및 무정부주의 단체 설립 등으로 자본주의가 안정기에 접어든 현재 국가를 전복하고 국경을 해체하는 등 세계 질서에 위해를 가하고 있다. SNS를 적극 이용,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기 때문에 강경하고 조속한 대응이 필요하다. (pp. 108-109)
쉽게 말하면 그들은 일종의 마케팅 홍보 전략을 사용하고 있는 거예요. 이미 그들은 우리 삶에 침범한 상태예요. 도시 농부. 태양열. 전기차. 유기농. 주말농장. 핸드메이드. 마르쉐. 대체에너지. 생태주의. 에코백. 팬시하고 쿨하게 포장된 상품들. 이 상품들은 사람들의 내면을 자극하고 그래서 생긴 틈에 자리 잡죠. 의식하지 못한 사이 몸집은 키우고 우리를 지배하는 구조예요. 비트코인 채굴장을 해킹해서 이딴 짓거리를 하다니. 비트코인 자체가 자본주의를 거스르는 거예요. 애송이들. 화폐제도를 비아냥대기 위해 설치는 거라고요. 자급자족단의 근본이 그렇다고! 근본부터 틀려먹은 거예요! (p. 116)
그때 어디선가 미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총알이 빗발치듯 날아오고 있었다. 비명을 지르지 않으려고 해도 비명이 새어 나왔다. 그때 미아가 내게 달려오는 게 보였다. 미아는 나를 팔로 휘감으며 오수처리장으로 뛰어들었다. 물속은 생각보다 깨끗했고 냄새도 나지 않았다. 한동안 숨이 막혔다. 시간이 흘렀다. 고통이 가시자 지난 삶이 눈앞에 흘러갔다. 지루한 인생을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에는 이대로 죽는가 싶었다.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미아도 함께 빠졌으니 이제 해인은 무사할 것이다. 그때 누군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나는 눈을 떴다. 미아였다. (p. 209)
우리 삶이 급격하게 변한 걸 보니 이런 생각이 들더라. 우리는 불행을 자급자족하고 있었다고. 우리가 원하는 건 행복이었지만 마음속에는 불행이 도사리고 있었어. 꿈을 가꾸고 있는 듯 보였지만 열리는 건 갈등이라는 열매뿐이었어. 미아 모닝스타의 논리대로라면 이 세상 모두가 다 자급자족단일걸. 조심해야겠어. 미아한테 잡힐지도 모르니. 농담이야, 농담. 자급자족. 나는 이 단어를 증오해. (p. 353)
블로그에 올리기로 결심한 건 당신을 영원히 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예감 때문이야. 언제 어디서 잘못될지 모르는데 작별 인사라도 남겨야지. 여기 남기면 내가 이 세상에 없어도 당신이 이 글을 읽을 수 있으니까. 물론 당신이 잘못될 가능성도 있지만 그건 너무 슬퍼서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아. 예전에 얘기했던 것처럼 다음 생에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걸로 만나자. 나무와 고양이. 벌과 튤립. 커피와 오로라. 그게 아니면, 당신 생각대로 텃밭과 작물도 괜찮고. (p. 3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