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인 아내의 그림을 보고 영감을 얻어 미술작품으로부터 소설의 착상을 가져온 작가의 두 번째 소설집. 그물 수선공, 한나절의 수수께끼 등을 비롯한 여덟 편의 단편들은 미술가들의 작품에서 소설의 영감과 기법의 원천을 가지고 왔으며, 미술품 제목을 단편의 제목 그대로 쓴 것이 특징이다. 각각의 제목 밑에 미술가의 작품 기법과 경향을 간략하게 소개하는 글을 달고 있다. 또한 작품 속 인물들은 모두 글, 혹은 그림에 연관된 일에 종사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예술행위와 현실 사이에 놓인 관계에 대한 작가의 깊은 관심이 표출된 것이다.
박정규 1991년 월간 『문학정신』에 단편소설 「니느웨로 가는 길」로 문단에 나왔으며, 창작집 『로암미들의 겨울』과 장편 『흔적』등이 있다. 현재 서울산업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며, 동 대학교 인문사회대학 학장으로 있다.
■ 이 책은 올해로 등단 15년을 맞는 소설가 박정규의 두 번째 창작집 『에코르체 혹은 보이지 않는 남자』가 현대문학에서 출간되었다. 소설가 박정규는 디지털 대중의 감각에 발맞추는 소설 경향과 거리를 유지한 채 정통적인 서사구조를 유지하면서 형식을 실험하고 있는 작가이다. 이 작품집에서 가장 먼저 주목되는 점은 소설과 회화의 접목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체의 피부를 벗겨낸 모습의 조각으로 인간 내면을 육체적(날것)으로 보여주려 하는 등의, 극히 전위적인 미술가들의 작품이 주는 즉물적인 영감을 박정규는 소설로 환치시키고 있다. 이는 인간의 야누스적인 심리상태를 텍스트로 담아내려는 작가의 오랜 노력의 소산이고, 이 창작집이 소설의 새로운 영역을 확장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게끔 하고 있다. 창작집에 담고 있는 8편의 작품제목들은 모두 작가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전위적인 미술작가들의 작품제목을 차용하고 있다. 작가는 그것이 소설의 “안내도면” 역할을 할 것이라고 밝히면서, “변용을 전제로 한 것이기에” 소설에서 “제약”이 아닌 인식의 폭을 넓힐 것으로 기대한고 있다. 「그물 수선공」은 남편을 교통사고로 잃은 한 미망... [ 출판사 서평 더보기 ] ◇이 소설집은… 올해로 등단 15년을 맞는 소설가 박정규의 두 번째 창작집 『에코르체 혹은 보이지 않는 남자』가 현대문학에서 출간되었다. 소설가 박정규는 디지털 대중의 감각에 발맞추는 소설 경향과 거리를 유지한 채 정통적인 서사구조를 유지하면서 형식을 실험하고 있는 작가이다. 이 작품집에서 가장 먼저 주목되는 점은 소설과 회화의 접목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체의 피부를 벗겨낸 모습의 조각으로 인간 내면을 육체적(날것)으로 보여주려 하는 등의, 극히 전위적인 미술가들의 작품이 주는 즉물적인 영감을 박정규는 소설로 환치시키고 있다. 이는 인간의 야누스적인 심리상태를 텍스트로 담아내려는 작가의 오랜 노력의 소산이고, 이 창작집이 소설의 새로운 영역을 확장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게끔 하고 있다. 창작집에 담고 있는 8편의 작품제목들은 모두 작가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전위적인 미술작가들의 작품제목을 차용하고 있다. 작가는 그것이 소설의 “안내도면” 역할을 할 것이라고 밝히면서, “변용을 전제로 한 것이기에” 소설에서 “제약”이 아닌 인식의 폭을 넓힐 것으로 기대한고 있다. 「그물 수선공」은 남편을 교통사고로 잃은 한 미망인이 겪는 사건을 추리기법으로 서술한 작품이다. 주인공인 ‘나’는 소설가로 창작에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에 화가이자 여고동창인 은지의 주선으로 서울 근교 전원주택으로 거처를 옮긴다. 그러나 그것은 은지의 치밀한 계산에 의한 각본. 주인공 윗집에는 오래전 프랑스 유학시절 헤어진 은지의 옛애인이 살고 있었는데, 은지는 의도적으로 ‘나’에게 자신의 서명이 된 그림과 자신의 전시회 초대권을 주고, 그것이 옛애인의 손에 들어가게 만든다. 그리고 그 남자는 은지의 전시가 있는 갤러리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그리고 소식이 끊긴 은지는 법성포 근처의 연못에서 익사체로 발견된다. 이 모든 사건을 ‘나’는 미필적고의자처럼 지켜보고 추리하면서 사랑과 욕망과 애증을 되새긴다. 「한나절의 수수께기」의 주인공은 청년시절 화가인 삼촌의 누드모델에게서 느꼈던 최초의 성적욕망에 대한, 그리고 환각의 순간처럼 그녀와 나눈 정사의 기억으로부터 놓여나지 못하는 데, 그것은 때로 어떤 억압과 범죄적 죄의식을 동반한다. 수십 년 만에 재회한 그녀는 무당이 되어 있었고, ‘내’가 어떤 해명이나 고백도 하기 전에 세상을 뜬다. 그리고 그녀가 남긴 눈먼 딸이 삼촌의 자식이 아닌 나의 딸이란 걸 직감하지만, 딸은 이미 흔적도 없이 어디론가 떠버린 뒤이다. 「제단」 역시 중견 여류 연극배우의 어린시절 성적인 상처를 극복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나’는 연극배우로서의 삶에 회의 느끼고 자신의 아픈 체험을 희곡으로 완성하기 위해 시골에 칩거한다. 그런데 그곳에서 만난 자매 역시 어릴 적 성폭력의 기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동병상련의 처지. 거기다 그 언니인 노파는 피해망상에 광장공포증을 가진 탓에 집 창문과 문을 막아버리고 외출은 아예 하지 않는다. 나는 그 노파의 신경증을 치료하기 위해 억지로 노파와 외출한다. 주변에 감시자가 존재하지 않음을 노파에게 확인시켜주지만, 노파는 그것이 화근이 돼 죽음을 맞는다. 그리고 그 집 마당에서 노파의 동생은 자신의 시작노트를 나는 미완의 희곡을 유품과 함께 불사른다. 그리고 둘은 동시에 과거로부터 놓여난다. 밀폐된 그 집을 마치 제단처럼 생각하며. 「안녕, 먼 곳의 친구들이여」는 누드모델과 걸인 행위예술가를 등장시켜 노동의 문제와 예술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삶이 곧 예술이어야 한다는 행위예술가는 걸인으로 일정기간을 살다가 히말라야로 떠나 실종되는 것으로 자신의 퍼포먼스를 완성한다. 주인공인 나는 이제까지 이중직업으로 삼았던 잡지사 기사를 쓰는 매문을 그만두고 본래의 작곡가의 길로 돌아선다. 「작은방」은 주인공이 신문기사를 읽고, 옛 군대시절 인연이 있던 의사 강만석 원장이 노숙자로 삶을 마감한 까닭을 추적하면서 전개되는 미스터리한 이야기. 강만석과 내연관계에 있던 류미숙, 그리고 그녀의 오빠인 류병철을 통해 극단적인 욕망이 각자의 삶을 파탄으로 몰아가는 과정을 추리소설처럼 흥미롭게 서술하고 있다. 「타블로 비방 혹은 비너스의 내부―작품번호 1」의 주인공은 임신한 아내를 따라 산부인과에 갔다가 아내의 혼전 임신 사실을 알게 되고, 배신감을 느끼고 불임수술까지 받는다. 게다가 아내가 집을 비운 사이 아내의 소설을 훔쳐 읽다가 이웃집 남자와의 외도를 의심하기에 이른다. 그러다 그 이웃집 남자를 만나 아내의 소설이 허구에 지나지 않음을 확인하고 허탈해진다. 그리고 이제까지 아내의 혼전 임신으로 둘 사이에 쌓여져 있던 벽이 허물어지는 것을 느낀다. 「에코르체 혹은 보이지 않는 남자」는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를 살해한 혐의를 받고 정신병원에 입원중인 아내와 출세욕에 사로잡혀 있던 나의 이야기. ‘나’는 출세를 위해 결혼을 수단으로 삼을 만큼 속물적인 인물인데, 입원중인 아내의 노트북 파일 속에 들어 있는 아내의 일기를 통해 아내가 자신의 그런 속물근성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음을 확인한다. 그리고 아내의 사려 깊은 내면을 만나게 된다. 결국 아내는 새로운 증인에 의해 범죄 혐의를 벗지만, ‘나’는 아내를 정신병원에서 퇴원시킬 수도 있는 노트북을 들고 병원으로 향할지 출세를 위해 없애버릴지 갈등하며 집을 나선다. 「내가 달려간다」는 ‘청교도적’ 결벽증을 가진 주인공이 지하철 부역장으로 근무하며 지하 터널에서 겪는 환각과, 그에 따른 심리적 변화와 폐쇄적 기억에 대한 서술이 줄거리를 이룬다. ‘나’의 결벽증은 자신이 아닌 아내의 순결을 강요하는 것에 보다 비중이 크다. ‘나’는 아내의 혼전 임신 사실의 충격에 따른 성불능과 장애아를 둔 것, 그리고 폐갱도에서 자살한 아버지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빚어지는 혼란으로 삶의 무력증에 시달린다. 그러다 지하 선로 점검을 나갔다 달려오는 열차를 피해 대피소에 들어갔다 깜빡 잠이 든다. 그리고 일어난 시간은 다음 날 아침 일곱 시, ‘나’는 생식능력을 포함한 모든 것이 “소생”한 기분을 느끼며 지하 선로를 달려나간다. ■ 추천의 글 박정규의 소설들은 화가나 행위예술가들이 자신의 삶을 화폭으로, 혹은 자신의 몸으로 살아낸 결과물로서의 예술을, 문학적 언어를 통해 다시 삶의 세계로 되돌려주려는 작업이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그가 기존의 회화기법이나 미술사적 관습에 도전하는 새로운 예술형식을 창출해낸 작업들에 주목하는 것은, 그러한 예술형식이 기법의 혁신이라는 단순한 형식 실험의 차원을 넘어, 기존의 삶과 갈등하고 대결하는 치열한 반성적 자의식을 통해 삶이 지닌 허구적 현실로부터 벗어나려는 고통을 지불하지 않고는 얻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 박혜경 (문학평론가) ■ 본문 중에서 노인의 흔적도 내 미완성의 연극대본도 그리고 그녀의 수천 편의 시들도 재가 되어 빗물에 씻기고 있었다. 노인의 골분도 반짝이는 조약돌들 틈새로 스며들었다. 우리는 쏟아지는 빗속에 서서 젖은 눈으로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그리고 교미하는 개처럼 혀를 길게 뽑아 서로의 슬픔을 아픔을 눈물을 그리고 빗물을 핥았다. 천둥과 번개와 붓듯이 쏟아져 내리는 빗속에서 우리는 무슨 제의를 행하듯 서로를 핥고 또 핥았다. ―「제단」中에서 늙어간다는 것과 육체가 시들어간다는 것은 분명 다르리라. 육체에의 탐닉이 없는 젊음은 얼마나 커다란 에너지인가. 그러나 그 에너지가 다른 욕구로 전환되어질 때 인간은 얼마만큼 탐욕스러워질 것인가. 나는 아주 가까이에서 그 모델을 보고 있다. 명예와 지위는 동일한 위상에 놓일 수 있는 어휘가 아니다. 정당하게 획득한 지위만이 명예가 된다. 그런데 다만 지위에 급급해하는 모습이 안타깝다. 아내는 그 온순한 눈길 어디에 이런 비수 같은 눈빛을 숨기고 있었을까. 깜빡이는 커서에 아내의 눈빛이 담겨 있는 듯해서 섬뜩한 느낌조차 들었다. ―「에코르체 혹은 보이지 않는 남자」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