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강숙
1936년 경북 청도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졸업, 미국 미시간 대학교에서 음악교육학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 버지니아 커먼웰스 대학교 조교수,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교수, KBS교향악단 초대 총감독을 역임하였다. 저자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을 시작으로 6년에 걸쳐 음악원을 포함한 6개원(연극원, 미술원, 영상원, 무용원, 전통 예술원)을 개원,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체제를 완성시켜 1992년 초대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장으로, 1998년에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초대 총장으로 취임, 2002년 2월 3대 총장까지 연임하였다. 2005년에는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 주빈국 조직위원장을 맡은 바 있다.
1998년 《현대문학》에 문학적 기질을 발휘하는 명 에세이 「술과 아내」를 발표하면서, 2001년 소설가로서의 제2의 인생을 시작하게 되는 기념비적인 단편 「빈 병 교향곡」으로 65세 등단 신화를 기록하였다. 그 후 혁혁한 문학적 성취와 함께 장편소설 『피아니스트의 탄생』 『젊은 음악가의 초상』, 소설집 『빈 병 교향곡』, 산문집 『술과 아내, 그리고 예술』 등을 출간하고 그 외에도 『열린 음악의 세계』 『한국음악학』『음악 선생님을 위하여』 『음악의 이해』등을 출간하면서 지속적으로 음악의 지평 또한 넓혀왔다. 2013년 단편 「반쯤 죽은 남자」로 제39회 한국소설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살아남을 글들아, 너는 어디에 있느냐. 현재의 삶이 헛삶이 아닌,
참삶일 수 있는 그런 삶들아, 너희 정체는 무엇이냐."
『괄호 속의 시간』은 ‘먼 훗날이라는 말이 좋아 그 먼 훗날을 그리겠다’고 말한 작가의 고백처럼 작가의 지칠 줄 모르는 소설 창작에 대한 열망이 담겨있다. 또한 이번 소설집은 “음악과 문학에 들린 영혼들의 상처와 얼룩진 초상이 늙은 소년의 세상을 보는 눈썰미와 일생의 지적 터득을 바탕으로 그려졌으며”(이문열) “예술을 통해 대지의 척박을 기름지게 하려는”(유준) 이강숙의 작가의 순도 높은 치열함이 투영된 작품집이다.
예술을 통해 회심하려는 이반 일리치들의 이야기
표제작 「괄호 속의 시간」을 비롯하여 「전화기가 운다」,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이름과 이름 사이」, 「시 빠진 소설」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외부 세계의 가시적인 가치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아를 회복하기 위해 힘겨운 내면의 투쟁을 벌이는 인물들이다. 이들은 톨스토이가 이반 일리치의 삶과 죽음을 통해 그려 보인 “자기 진정성의 회복”이라는 소명을 공유하고 있는 인물들이다. 신문사를 그만두고 혼자만의 공간에서 글을 쓰기 위해 낯선 도시의 민박집으로 향하는 B(「괄호 속의 시간」), 작곡을 하기 위해 교사 일을 그만두고 K시로 향하는 창우(「전화기가 운다」), 시력을 잃어가지만 작품을 쓰고자 하는 열망에 사로잡힌 무명작가 김진오(「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등은 음악 혹은 문학이라는 예술의 정령을 좇으며 창작을 통해 자기 자신을 되찾으려 한다. 자기 내면을 정직하게 응시하는 이들의 이야기에서는 나를 잃어버린, 괄호 속에 갇힌 삶에서 벗어나 제대로 살고자 하는 현대적 이반 일리치의 현신들을 엿볼 수 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미궁에 빠진 현대인의 희극
이번 소설집에는 현대인의 문제적 상황을 한 편의 부조리극처럼 풀어내는 이강숙 작가의 태연함을 가장한 시선이 돋보이는 작품들 또한 수록되어 있다. 심장에 이상이 생겨 병원에 입원한의 사내는 자신의 불운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일회용 면도기에 집착한다(「일회용 면도기」). 어지럼증에 시달리는 건우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오랜 고민 중에 학창시절의 친구들을 만나고 돌아오던 건널목에서 그의 운명을 결정지을 결심을 한다(「건널목에서」). 소설가 인호는 천부적 재능을 지닌 열한 살의 천재 괴동 찰리로 인해 소설 쓰기 강박에 시달린다(「아저씨, 그럼 안녕」). 불확실한 세계 속에서 길을 잃고 강박에 시달리는 이들의 모습에서 인간의 불안한 내면을 깊이 응시하는 이강숙 작가의 심도 있는 상상력을 눈여겨볼 만하다.
‘시詩 빠진 소설’ 쓰기: 불완전한 삶에서 새로운 삶을 모색하는 불빛
자전적인 이야기로도 읽힐 수 있는 중편소설 「시 빠진 소설」은 대학교수인 권진이 음악학을 공부하던 미국 유학시절을 회상하는 이야기이다. 한국 유학생들과의 술자리에서 권진과 유학생들은 음악과 학문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고, 권진은 술에 취해 자신이 문청 시절에 쓴 소설 원고를 떠올린다. 그는 그 소설이 걸작이었다고 강변하지만 술에서 깨어난 권진은 깊은 부끄러움을 느낀다. 이 시절을 권진은 기고만장했던 시절이라 회고한다. ‘도레미파솔라시도’의 ‘시’가 음악의 장단음계를 이끄는 음이라 할 때, 그 ‘시’가 있는 삶이 권진이 추구하는 이상이었으나, 그는 그 이상을 실현시킬 수 없음을 인정하고 체념한다. 그는 자신의 삶이 ‘시’ 빠진 삶이지만, 시 빠진 노래가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소설에 집착하던 지난 시간을 벗어버린다. 체념 속에서 새로운 생의 의지를 보여주는 「시 빠진 소설」은 “정결하고 탈속한 삶의 미학”(이문열)으로 그 수준을 끌어올린 이강숙의 작품 세계를 보여주는 수작이다.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희망이 없으면, 목적이 없으면, 죽은 사람이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더 많이 알고 싶다”라 말한 바 있던 작가의 소회처럼, 『괄호 속의 시간』은 “허구적 현실의 스펙터클에 눈먼 채로 자기 소외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우리의 손을 잡고”(유준) 자신의 본질을 고요히 응시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 축하의 글
“쉰이 넘어서야 첫 벼슬길에 오른 당나라의 늙은 소년이 마흔다섯에 겨우 진사시에 입격한 뒤 읊은 득의의 심경을 이 소설집에서 읽게 되는 까닭은 등장인물들의 나이를 잊은 풋풋한 열정과 정결하면서도 탈속한 미학 때문은 아니었을까.”
_ 이문열(소설가)
“음악가로서, 작가로서 뮤즈에 사로잡혀 일생을 보내온 전기적 삶도 그렇거니와, 이번 작품집 역시도 예술에 헌신하고, 그 헌신 속에서 천국을 맛보려는 자의 정열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 물론 정열만으로 탄생하는 명작은 결코 존재할 수 없겠지만, 그 정열 자체가 하나의 작품처럼 빛나는 순간은 때로 존재하기도 한다. 나아가 그 정열이야말로, 불멸의 형식 아니겠는가.”
_ 유준(문학평론가)
■ ‘작가의 말’ 중에서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이 노래 소월이 불렀던 노래 같네요. 말기 암 환자에게 먼 훗날이 있을리 없지요. 그러나, 그러나 말이에요. 그 먼 훗날이라는 말이 좋아, 당신이 찾으시면이라는 말이 또 너무나 좋아 죽어도 나는 그 먼 훗날을 그리겠어요.
■ 본문에서
p.22「반쯤 죽은 남자」: 창작의 뿌리는 그것이 어떤 것이든 간에 흔들림의 힘이다. 나에게도 그런 흔들림이 있다. 제대로 알고 했던 말인지 알 수가 없지만 미학이 흔들림의 힘 이상으로 중요한 창작의 씨앗은 없다는 말을 어느 책을 인용하면서 주절대던 기억이 났다. 지곡은 청소년처럼 대망을 가지라고 외친다. 그래 맞아. 나는 너가 아니야. 나는 어디까지나 나란 말이야. 작곡이 나를 버릴지는 몰라도 H ! 너 때문에 내가 작곡을 버릴 수는 없지. 맞아, 내가 죽을 때까지 잡고 있기만 하면 되는 거야.
p.60 「땅은 아무것도 모른다」: “조성음악의 경우 출발은 중심축의 예가 되는 주화음이지요. 도, 미, 솔 중의 어느 한 음에서 출발하지요. 그렇지 않은 노래는 없어요. 그러고는 다시 ‘도’로 돌아오지요. 노래가 시작에서 끝까지 흐르는 과정에서 중심축에서 조금 벗어나는 음 활동도 있고 많이 벗어나는 음 활동도 있어요. 그러나 결국 ‘도’에서 마무리 짓는 것을 볼 수 있지요. (…) 인간의 삶과 음악의 삶의 뿌리는 그러니까 결국 ‘집에서 집으로’라는 결론을 얻었다는 것이지요.”
p.150 「아저씨, 그럼 안녕」: 나는 왜 이 세상에 없는 것을 만지려고 하는가. 이 세상에 있는 것,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것들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볼 수 있는 것, 만질 수 있는 것을 통해서, 이 세상에 없는 것을 그릴 수 있다는 사실, 아니 그려야 한다는 사실을 내가 모르고 있었던 탓일까.
pp.324-325 「플랫폼에서 놓친 여자」: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브람스는 위대한 작곡가가 아닙니까. 그런 위대한 작곡가가 창작을 하지 않고 남의 곡을 베끼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니겠어요. 그런데 믿거나 말거나 그런 일이 있었대요. 무엇이 꼭 같고, 무엇이 다르냐가 핵심 개념이라나요. 궁극적으로는 자기의 삶이다, 자기를 베끼는 것이다, 자기가 누군지 몰라서, 자기의 뼈를 찾고, 그 뼈에 자기의 살을 붙이는 삶을 사는 것이 인간이다, 삶의 결과로 특정 형태로 탄생된 것이 ‘만들어진 것’ 즉 작품作品이다,라는 거래요.”
p.388 「아까운 꽃」: 음악회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가 들릴 때만큼 행복한 시간은 없다. 입장 신호음이 들리자 로비에서 북적거리던 관객은 음악회장 안으로 스르르 밀려든다. 음악회장 안의 불이 꺼진 후 벌어질, 음으로만 이루어질 불가사의한, ‘음들의 얽힘이 낳는 비밀스러운 사건’에 대한 재수의 기대감은 아버지의 지상 목표인 돈이나 출세와는 거리가 멀다. 일상과는 아주 다른 참으로 멀고도 먼 세계다. 재수는 객석 제일 뒤 구석 자리를 선호한다. 객석이 백 프로 차는 음악회가 확률적으로 적다는 것을 아는 재수는 그날도 객석의 제일 뒤쪽의 구석 자리에 앉았다.
p.504 「시 빠진 소설」: 지금 내가 쓴 글이 내가 죽은 후에 살아남을 글이 아니고 10년 후에 아무도 읽지 않는, 사장되고 말 글들이라면 지금의 글들 역시 모두 그때의 기고만장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살아남을 글들아, 너는 어디에 있느냐. 현재의 삶이 헛삶이 아닌, 죽은 후에도 살아남을 참삶일 수 있는 그런 삶들아, 너희 정체는 무엇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