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만에 내놓은 박완서의 신작 장편소설. '문학과 사회'에 발표한 동명 단편 <그 남자네 집>에 기초한 소설로, 현대문학 창간 50주년을 기념하는 작품이다. 나이를 먹은 주인공이 후배의 집 구경을 갔다가 50년 전 첫사랑인 그 남자가 살았던 기와집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는 것을 발견하면서 소설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시대의 흐름에서 밀려났지만 여전히 건재하게 남아 있는 기와집은 그 남자에 대한 기억으로 주인공을 이끌어간다. 50년 전 어머니의 외가쪽 친척인 그 남자네가 주인공이 사는 동네의 기와집으로 이사를 오고, 겨울 저녁 퇴근하는 전차에서 우연히 마주쳐 서로 집안의 안부를 물으면서 그 남자와의 인연은 시작된다. 그들은 1950년대 폐허의 서울 거리를 누비며 구슬처럼 빛나는 겨울을 보내지만 여러 가지 현실에 부딪히게 되고, 결국 주인공은 은행원인 민호와의 결혼을 결심하며 그 남자에게 이별을 선언하는데…. 미시적 리얼리즘의 농밀한 압축과 일상과 일탈에 대한 팽팽한 대비, 특유의 입심으로 풀어낸 감칠맛 나는 이야기를 통해 순수한 첫사랑에 대한 지나간 기억을 되살려 주는 소설이다.
박완서 1931년 경기도 개풍 출생. 숙명여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국문과에 입학하였으나 한국전쟁으로 학업을 중단하였다. 1970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나목』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작품으로는 소설집 『엄마의 말뚝』 『꽃을 찾아서』 『저문 날의 삽화』 『한 말씀만 하소서』 『너무도 쓸쓸한 당신』 등이 있고, 장편소설 『휘청거리는 오후』 『서 있는 여자』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미망』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아주 오래된 농담』 등이 있다. 또한 동화집 『부숭이의 땅힘』 『보시니 참 좋았다』 등과 수필집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여자와 남자가 있는 풍경』 『살아있는 날의 소망』 『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 『어른노릇 사람노릇』 『두부』 등이 있다. 한국문학작가상(1980), 이상문학상(1981), 대한민국문학상(1990), 이산문학상(1991), 현대문학상(1993), 동인문학상(1994), 대산문학상(1997), 만해문학상(1999) 등을 수상하였다.
■ 이 책은 한국 현대소설사의 연륜을 그대로 담고 있는 거목, 소설가 박완서 선생의 열다섯 번째 신작 장편소설 『그 남자네 집』이 현대문학에서 출간되었다. 저자는 이 작품을 힘들고 지난했던 시절을 견디게 해준 ‘문학에 바치는 헌사'라고 밝히면서 현대문학 창간 50주년을 기념하는 작품이 돼 더욱 기쁘다고 출간 소감을 밝혔다. 전후 50년대 서울의 피폐한 풍경이 눈에 보이듯 그려지고 있는 이 작품은, 현재 나이 든 주인공이 당시의 첫사랑 ‘그 남자'가 살았던 돈암동 안감내를 찾아가는 것으로 시작된다. 어머니의 외가 쪽 친척인 그 남자네가 내가 사는 동네의 홍예문이 달린 기품 있는 기와집으로 이사오고, 그 남자와 만남이 시작된 것은 그로부터 몇 해 후, 대학생 신분으로 미군부대로 일을 다니던 내가 어느 날 겨울 저녁 퇴근하는 전차에서 우연히 만나 서로 집안의 안부를 묻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폐허의 서울 거리 구석구석을 누비며 ‘내 생애의 구슬'처럼 빛나는 행복한 겨울을 보낸다. 그러나 그는 ‘한 푼도 못 버는 백수'였고 나는 ‘다섯 식구의 밥줄'이었다. 그와는 반대로 미군부대에서 만난 전민호는 ‘웬만한 허물을 덮고도 남을 만큼 대단한' 은행원, 나는 결국 민호와 결혼을 결정하고 그 남자와는 이별을 선언한다. 그러나 결혼은 환상이었고, 그 환상은 곧 깨졌다. 당장 생활을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결코 남편은 부자가 아니었다. 남편이 가져다주는 월급으로 어렵게 한 달을 꾸리다보면 가계부는 늘 적자였고, 시어머니와의 갈등은 사사건건 끊이지 않았다. 게다가 시어머니는 나와 종교관까지 달라 집안의 온갖 대소사를 박수무당과 의논하여 결정하였고, 심지어 아이가 들어서는 것까지 무당의 말을 절대적으로 신뢰했다. 결혼생활은 신혼의 재미가 뭔지도 모르는 채 급격히 권태로워졌고, 그 즈음 시장통에서 ‘그 남자'의 누나를 우연히 만나 그의 소식을 듣게 되고, 급기야 첫사랑과의 재회에 이르게 된다. 밀회의 횟수가 늘어갈수록 위기의 순간은 다가왔고, 어느 날 그는 하룻밤의 밀월여행을 제안했고, 나는 ‘짜릿한 기쁨'을 느끼며 그날을 기다린다. 그날은 그러나 또다른 이별이 된다. 그날 그는 기차역에 나타나지 않았고, 나는 ‘어딘가로 붕 떠올랐다가' 다시 이 세상에 팽개쳐진 기분에 빠진다. 그 남자가 뇌수술을 했고, 눈이 멀게 됐다는 사실을 들은 나는 얼마 간의 세월이 흐른 후 그에게 전화를 걸어 다시 그와 재회한다. 눈앞에 나타난 그는 ‘시력을 잃고 나는 귀여움을 잃은' 채였다. 나는 그에게 위로의 말보다 육친애적 분노를 느끼며 장님임을 인정하고 새롭게 살아가라고 욕설을 섞어 울부짖듯 충고하는 것으로 첫사랑을 지운다. 그리고 그 남자를 끝으로 다시 만난 건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였다. 그는 그때 중학교 여선생과 결혼하여 아이를 하나 낳고 단란한 가정을 꾸미고 있었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회상하며 점점 더 굵은 눈물을 흘리는 그 남자를 나는 무너지듯 포옹하며 담담하고 완전한 결별을 이루게 된다. 이 작품 역시 박완서만의 독특한 페이소스와 기지 넘치는 문장이 전체를 이루고 있어 읽는 재미는 물론 진한 감동을 선사한다. 중심 줄거리에서 벗어나는 등장인물들 각각도 개성이 두드러져 이 작품의 축을 받쳐준다. 첫사랑이라는 본성에 가까운 감정과 대비를 이루며 전후 피폐한 일상과 그 생활전선을 직접 몸으로 겪어야 했던 여성들의 실상이 가슴 찡하게 그려져 있다. 그것은 이 각박한 현실을 그럼에도 살아내야 한다는 삶의 억척스러운 의욕이며, 삶의 원시적 동력이다. 이 점이 흘러넘치고 있는 이 작품은 때문에 갓 뛰어오르는 등푸른 생선처럼 신선하다. ■ 본문 중에서 한길에서 그 집을 들여다보면 대문이 보이지 않고 고궁에서나 볼 수 있는 홍예문이 보였다. 홍예문은 사랑마당으로 통하는 문이었고 안채로 통하는 대문은 홍예문이 달린 담장과 기역자로 꺾인 곳에 달려 있었다. 난 왠지 문지방이 돌로 된 위압적인 솟을대문보다는 단아하고 고풍스러운 홍예문에 더 압도당하고 있었다. 추녀를 나란히 한 고만고만한 조선 기와집하고는 격이 달라 보였다. 마침 짐을 나르던 청년이 우리 곁에서 머뭇대며 아는 척을 하고 싶어 하는 눈치를 보이자 노마님이 우리 막내라고 인사를 시켰다. 서글서글한 미남이었다.-본문 17p 그해 겨울 퇴근하는 전차 안에서 그 남자를 만났다. 남자가 먼저 반색을 했다. 그는 다짜고짜 나를 누나라고 불렀다. 누나라는 말은 묘했다. 마음을 놓이게도 섭섭하게도 했다. 늦은 시간의 전차 안은 텅 비어 있었지만 그 안에서는 서로 반가워서 어쩔 줄 모르는 것 이상의 감정표현을 하지 못했다. 종점에서 내려서 불빛이 희미한 빵가게로 들어갔다. 가슴이 울렁거리고 발밑의 언 땅이 고무공처럼 나의 온몸에 탄력을 주었다.-본문 29p 포장마찻집에서는 딴 손님이 없을 때에만 그런 객쩍은 짓을 했기 때문에 주인남자도 잠자코 귀를 기울였다. 다 듣고는 분수에 넘치는 사치를 한 것 같다고 고마워했다. 나에겐 그 소리가 박수보다 더 적절한 찬사로 들렸다. 우리에게 시가 사치라면 우리가 누린 물질의 사치는 시가 아니었을까. 그 암울하고 극빈하던 흉흉한 전시를 견디게 한 것은 내핍도 원한도 이념도 아니고 사치였다. 시였다.-본문 42p 그 살벌했던 날, 포성이 지척에서 들리는 최전방 도시, 시민으로부터 버림받은 도시, 버림받은 사람만이 지키던 헐벗은 도시를 그 남자는 풍선에 띄우듯이 가볍고 어질어질하게 들어올렸다. 황홀한 현기증이었다. 이 도시 골목골목에 고인 어둠, 포장마차의 연탄가스, 도처에 지천으로 널린 지지궁상들이 그 갈피에 그렇게 아름다운 비밀을 숨기고 있는 줄은 미처 몰랐었다. 그 남자의 입김만 닿으면 꼭꼭 숨어 있던 비밀이 꽃처럼 피어났다. -본문 66p 청첩장을 내보였다. 내용을 확인하더니 조금 돌아앉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고 중얼거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격렬하게 흐느꼈다. 나는 그의 어깨가 요동치는 걸 보면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를 보듬어 내 품안에 무너져 내리게 하고 싶었다. 그때 그가 바란 건 어머니의 품속 같은 위안이었는지도 모르는데 나는 그렇게 해줄 자신이 없었다. 내가 감추고 있는 건 지옥불 같은 열정이었다. -본문 93p 나는 애처로워서 어쩔 줄 모르겠는 마음으로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스산한 표정이 이해되었다. 자다 말고 절망적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면 저렇게 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그를 치유할 수 있는 신비한 힘이 내 안에서 흘러넘쳐 촉수가 되어 그에게로 뻗혔으면 하는 황당한 열망으로 나는 불화로처럼 달아올랐다. -본문 171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