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화사회, 노인 혐오, 그리고 자살 유도 프로젝트!
“한 사람을 죽이면 살인이지만 100만 명을 죽이면 혁명이 된다”
독특한 상상력으로 사회문제의 본질과 이면을 첨예하게 꿰뚫는,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소설집 『라면의 황제』와 『골든 에이지』. 세 개의 시공간,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아가는 세 사람이 각각의 세계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과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 장편소설 『무한의 책』. 소위 순문학과 장르문학을 구분하던 시절, 자신만의 문학세계를 확고히 드러내며 문학의 영역을 확장시키고, 그 자장 안에서 대체 불가한 작가로 자리매김한 김희선은 단 세 권의 책으로 더 이상 낯선 작가 아닌, 이즈음 문단이 가장 주목하는 대세 작가가 되었다. 마니아 독자층의 전폭적인 지지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더 많은 독자들의 호응을 이끌어낼 이번 신작 『죽음이 너희를 갈라놓을 때까지』에서는 어쩌면 닥쳐올지도 모를 미래를 ‘예술은 자연을 모방한다’는 명제를 뛰어넘어 김희선만의 독창적인 스타일로 그려내고 있다.
어느 날 팔곡마을의 노인들이 모두 사라지고 이를 알아챈 우체부가 파출소에 사건을 신고한다. 파출소장 박 경위는 우체부와 함께 늦은 저녁, 배를 타고 팔곡으로 들어가나 텅 빈 팔곡의 깊은 어둠과 마주할 뿐이다. 노인들의 흔적조차 찾지 못한 박 경위는 마을회관으로 향하고, 그곳에서 잊고 있던 기억을 떠올린다. 노인들로 가득한 마루, 진동하는 음식 냄새, 웃고 떠들며 즐기는 사람들, 장수 노인 축하연…….
노인들을 찾아 언덕 너머 폐가까지 간 박 경위는 빔프로젝터가 쏘아내던 영상과 ‘고령화사회와 웰다잉’이라는 제목, 깊고 음산한 목소리를 가진 여자의 그윽한 눈초리 등 또 다른 기억들을 떠올리며 무언가가 단단히 잘못되었음을 직감한다. 팔곡으로 들어오는 배 안에서 시청한 비디오 영상의 기시감의 실체를 깨달은 박 경위와 우체부는 그러나 예기치 못한 위기를 맞고 쓰러진다.
정신을 차린 박 경위 앞에 선 선장은 뉴 제너레이션New Generation, 웰다잉협회 등 알 수 없는 이야기를 꺼내며 이 모두가 새로운 세대와 미래를 위해 자신들이 벌인 일이라고 말하고, 자신들 뒤엔 국가가 있다고 큰소리친다. 우체부의 활약으로 박 경위는 죽을 위기에서 구출되고 선장은 체포되지만, 며칠 뒤 무사히 돌아온 팔곡의 노인 중 한 노인의 시체가 호수 위로 떠오른다.
고령화사회를 지나 이미 초고령화사회로 접어들고 있는 우리 사회의 노인 혐오와 배제의 경제학을 섬뜩하도록 서늘하게 그리고 있는 소설이다.
『죽음이 너희를 갈라놓을 때까지』는 노인의 자살이 만연한 재난적 현실에 음모론의 형식을 덧씌움으로써 진실을 더욱 선명히 보이게 하고, 그 선명한 진실에 대한 피로 때문에 망각해온 죽음과 비참한 생의 조건을 바라보게 한다. 한 개인의 선택이라 단정했던 그 죽음들을 혐오와 모멸의 감정 속에서 재생산되는 구조적 재난으로 다시 바라볼 때, 그 죽음을 자연화함으로써 재난 없는 세계로 꾸며졌던 현실의 이면이 적나라한 민낯을 드러내 보인다.
-김요섭(문학평론가)
작가의 말
세상엔 침묵을 강요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때로 그들은 자신들의 목소리가 없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지요.
그들을 대신해서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즐거운 독서가 되길 바랍니다.
표4
교차하고 중첩되며 분기되는
무수한 이야기의 가능성
“죽음이 갈라놓을 때” 즉 “Mors sola”는 로마의 시인 유베날리스의 『풍자시집』에 수록된 라틴어 시구에서 연유한 경구다. 오늘날 통용되고 있는 의미와 달리 ‘오직 죽음만이 인간의 신체 자체가 얼마나 미소微小한 것인지를 드러낸다’로 번역될 수 있다. (……) “Mors sola” 자체가 인간의 시작과 끝, 결혼(이라는 생명 탄생의 계기)과 죽음, 영원한 언약과 소멸 등의 상반되는 의미가 상호 교차하고 중첩되며 분기되는 어구라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즉 어떤 어구는, 어떤 문장은, 어떤 이야기는, 나아가 어떤 텍스트는 언제나 이렇게 다중적으로 읽고 쓰며 또한 파생될 수 있는 ‘다른’ 가능성을 내포한다. 김희선의 소설 또한 그렇다. 이 점에서 나에게는 ‘죽음이 너희를 갈라놓을 때까지’라는 소설의 제목이 (스토리와는 별개로) 실로 의미심장하게 읽힌다.
-조형래, 「작품해설」 중에서
본문 중에서
* 거기선 만약 길을 걷다가 유령을 마주쳐도 그게 유령인 줄 모를 것이다. 왜냐하면 마을 노인들이 이미 유령과 별로 다를 바 없는 모습을 하고 있으니까.
-15쪽
* 맞아, 세상 전체의 물은 한 덩어리지. 그 한 덩어리의 거대한 물이 지구 곳곳에 흩어져 있는 거야. 수억 수천만 개의 빗방울도 호수와 합쳐지면 하나가 된다. 그는 지구가 물을 위해 생겨난 것임을 깨달았다. 물, 이라는 물렁물렁하면서도 단단한 덩어리를 담고 있는 거대한 그릇. 그게 지구 아니던가.
-61쪽
* 여기 아무도 없다는 건, 굳이 둘러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누군가가 잠깐 비웠을 때와는 완연히 다른, 오래도록 텅 비어 있던 집 특유의 냄새가 가득했던 탓이다. 일종의 무생물적 냄새라고나 할까.
-81-82쪽
* 첫 장면은 벽면 전체를 뒤덮은 하얀 점들이었다.
커졌다 작아지기도 하고,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기도 하는 수많은 하얀 점들.
그런데 점인 줄 알았던 것을 클로즈업하니, 그건 노인들의 하얗게 세어버린 뒤통수였다. 사실 그건 웃기기도 하고 두렵기도 한 광경이었다. 세상을 가득 채운 것이 노인들의 하얀 머리라니. 일러스트로 표현된 지구에서 흰 점들이 순식간에 증식하여 대륙 전체를 뒤덮었고, 넘쳐나는 노인들은 발 디딜 곳을 찾지 못해 우주 공간 밖으로 튕겨 나가고 있었어.
-88-89쪽
* 노인을 혐오하고 그들을 증오하게 만들려는 거대한 음모. 그 중심에 우리, 뉴 제너레이션이 있단 말이지. 아니, 아직 이야긴 안 끝났어. 잘 들어봐. 우린 타인이 노인을 미워하게 만들려고 이런 일을 하는 게 아니야. 최종 목표는 다른 데 있지. 그건 바로…… 노인들 스스로가 자신을 혐오하게 만드는 것. 스스로를 무용지물로 여기게끔 몰아가는 것. 그리고 잘 알겠지만, 자기에 대한 혐오의 귀결은…….”
-115-116쪽
* 물론 ‘뉴 제너레이션’이란 조직은 없었다. 하지만 없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선장은 분명 그 조직이 비밀 기관이라고 말했다. 오히려 증거는 다른 곳에, 그러니까 평범한 뉴스나 칼럼, 사람들의 댓글 같은 것들 속에 숨어 있었다.
-140-141쪽
월간 『현대문학』이 펴내는 월간 <핀 소설>, 그 스물아홉 번째 책!
<현대문학 핀 시리즈>는 당대 한국 문학의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첨예한 작가들을 선정, 월간 『현대문학』 지면에 선보이고 이것을 다시 단행본 발간으로 이어가는 프로젝트이다. 여기에 선보이는 단행본들은 개별 작품임과 동시에 여섯 명이 ‘한 시리즈’로 큐레이션된 것이다. 현대문학은 이 시리즈의 진지함이 ‘핀’이라는 단어의 섬세한 경쾌함과 아이러니하게 결합되기를 바란다.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은 월간 『현대문학』이 매월 내놓는 월간 핀이기도 하다. 매월 25일 발간할 예정인 후속 편들은 내로라하는 국내 최고 작가들의 신작을 정해진 날짜에 만나볼 수 있게 기획되어 있다. 한국 출판 사상 최초로 도입되는 일종의 ‘샐러리북’ 개념이다.
001부터 006은 1971년에서 1973년 사이 출생하고, 1990년 후반부터 2000년 사이 등단한, 현재 한국 소설의 든든한 허리를 담당하고 있는 작가들의 작품으로 꾸렸고, 007부터 012는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반 출생하고, 2000년대 중후반 등단한, 현재 한국 소설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의 작품으로 만들어졌다.
013부터 018은 지금의 한국 문학의 발전을 이끈 중추적인 역할을 한 1950년대 중후반부터 1960년대 사이 출생 작가, 1980년대에서 1990년대 중반까지 등단한 작가들의 작품으로 꾸려졌으며, 019부터 024까지는 새로운 한국 문학의 역사를 써내려가고 있는 패기 있는 젊은 작가들의 작품으로 진행되었다.
세대별로 진행되던 핀 소설은 025~030에 들어서서는 장르소설이라는 특징 아래 묶여 새롭게 출간 중이다.
발간되었거나 발간 예정되어 있는 책들은 아래와 같다.
001 편혜영 『죽은 자로 하여금』(2018년 4월 25일 발간)
002 박형서 『당신의 노후』(2018년 5월 25일 발간)
003 김경욱 『거울 보는 남자』(2018년 6월 25일 발간)
004 윤성희 『첫 문장』(2018년 7월 25일 발간)
005 이기호 『목양면 방화 사건 전말기』(2018년 8월 25일 발간)
006 정이현 『알지 못하는 모든 신들에게』(2018년 9월 25일 발간)
007 정용준 『유령』(2018년 10월 25일 발간)
008 김금희 『나의 사랑, 매기』(2018년 11월 25일 발간)
009 김성중 『이슬라』(2018년 12월 25일 발간)
010 손보미 『우연의 신』(2019년 1월 25일 발간)
011 백수린 『친애하고, 친애하는』(2019년 2월 25일 발간)
012 최은미 『어제는 봄』(2019년 3월 25일 발간)
013 김인숙 『벚꽃의 우주』(2019년 4월 25일 발간)
014 이혜경 『기억의 습지』(2019년 5월 25일 발간)
015 임철우 『돌담에 속삭이는』(2019년 6월 25일 발간)
016 최 윤 『파랑대문』(2019년 7월 25일 발간)
017 이승우 『캉탕』(2019년 8월 25일 발간)
018 하성란 『크리스마스캐럴』(2019년 9월 25일 발간)
019 임 현 『당신과 다른 나』(2019년 10월 25일 발간)
020 정지돈 『야간 경비원의 일기』(2019년 11월 25일 발간)
021 박민정 『서독 이모』(2019년 12월 25일)
022 최정화 『메모리 익스체인지』(2020년 1월 25일)
023 김엄지 『폭죽무덤』(2020년 2월 25일)
024 김혜진 『불과 나의 자서전』(2020년 3월 25일)
025 이영도 『마트 이야기―시하와 칸타의 장』(2020년 4월 25일)
026 듀 나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었다』(2020년 5월 25일)
027 조 현 『나, 이페머러의 수호자』(2020년 6월 25일)
028 백민석 『플라스틱맨』(2020년 7월 25일)
029 김희선 『죽음이 너희를 갈라놓을 때까지』(2020년 8월 25일)
030 최제훈(근간)
현대문학 × 아티스트 구본창
<현대문학 핀 시리즈>는 아티스트의 영혼이 깃든 표지 작업과 함께 하나의 특별한 예술작품으로 재구성된 독창적인 소설선, 즉 예술 선집이 되었다. 각 소설이 그 작품마다의 독특한 향기와 그윽한 예술적 매혹을 갖게 된 것은 바로 소설과 예술, 이 두 세계의 만남이 이루어낸 영혼의 조화로움 때문일 것이다.
구본창
연세대 경영학과 졸업. 독일 함부르크 조형미술대 사진 디자인 전공, 디플롬 학위 취득. 국내외 40여 회 개인전.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 필라델피아 박물관, 보스톤 미술관, 휴스턴 뮤지엄 오브 파인 아트,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삼성 리움 등 다수의 박물관에 작품 소장. 작품집 한길아트 『숨』 『탈』 『백자』, 일본 Rutles 『白磁』 『공명의 시간을 담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