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중에서
* 아버지가 나한테 잘못한 건 없잖아요. 잘못한 게 없으니 용서할 수도 없는데, 용서가 안 돼요. 그게 미안해요. 미안하고 죄책감이 들어요. (……) 고작 그런 이유로 유일한 가족인 아버지를 그렇게 평생 혼자, 혼자서 외롭도록 내버려두었다는 게. 지원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상담사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말했다.
그치만, 지원 씨도 외로웠잖아요. (……) ‘고작 그런 이유’라고 하지 않아도 돼요.
-35-36쪽
* 입추가 지날 무렵 401호 남자가 왔다. 그가 들고나는 것을 보지 못한 지 사흘쯤 되었을 때, 주미는 이미 예감하고 있었던 것 같다. 객실 문을 연 순간 주미의 머릿속에는 오래전에 보았던,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장면 하나가 떠올랐다. 인파 사이로 기둥처럼 솟아 있던, 크레인에 매달려 있던 거대한 주검. 경이로운 동시에 참혹했던.
-60쪽
* 아까 그 여자 말야, 하고 주미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렇네, 정말 이상한 여자네, 지원이 그렇게 말해주기를 조금은 기대하면서. 하지만 지원은 가만히 주미의 이야기를 듣고 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난 알 것 같아, 하고 지원이 말했다. (……)
그러고 보니 지원의 말이 맞았다. 그 먼 곳에서 아는 이도 하나 없는 이곳에 와서, 그렇게 혼자 씩씩하게 밥을 먹고. 아마도 누군가를, 무언가를 이해해보겠다고 여자는 애쓰고 있을 것이었다. 그러자 자신은 그 무엇에도 그렇게 애써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70쪽
* 필요하면 아무 때나 연락하라고. 그렇게 적으면서 주미는 생각했다. 남겨진 사람이 아니라 그냥 여기 있는 사람. 누군가 나 왔어, 하고 돌아왔을 때 거기 있는 사람. 아무 때나 연락해도 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은 세상에 드물고, 주미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72쪽
* 어려서는 서핑 선수가 꿈이었지만, 자신이 그 정도로 잘하는 건 아니란 걸 다행히도 일찍 깨달아 그냥 취미로 즐기기로 했다고. 대학에 입학한 후에는 서핑 동아리를 만들기까지 했는데, 동아리 이름은 ‘Ding’이었다. 보드에 뭔가에 부딪혀 상처가 나면 그걸 ‘딩’이라고 부른다고 P가 말해주었다. 왜 하필 동아리 이름을 그렇게 지었느냐고 재인이 묻자 P는 대답했다.
서핑을 하면 딩 나는 건 당연한 거니까.
그렇게 말하고 P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덧붙였다.
그건…… 내가 오늘도 파도에 뛰어들었다는 증거니까.
-85-86쪽
* 영식이 술에 취한 채로 테트라포드 위에 앉아 있을 때 누군가 뒤에서 ‘아저씨, 아저씨’ 하
고 큰 소리로 불렀다. 돌아보니 주미였다. 일고여덟 살쯤 되었을 것이다. 주미가 영식에게 어서 이쪽으로 나오라고 손짓했다. 영식이 멍하니 반응이 없자, 그 어린 게 영식을 직접 끌고 가기라도 할 셈인지 테트라포드 위로 넘어오려고 자세를 낮추는 거였다. 정신이 번쩍 났다. 안 돼! 오지 마! 영식이 외쳤다.
영식이 비틀거리며 방파제 위로 올라서는 순간, 주미가 영식에게 달려와 덥석 안겼다. 조그맣고 따뜻한 몸이. 그때 영식은 주미에게 안긴 채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주미는 잊었을지도 모르지만, 영식은 잊지 않았다. 영식이 술을 끊은 건 그때부터였다.
-128-129쪽
* 쑤언에게 운이 좋다는 건 그런 뜻이었다. 내가 아니라 너인 것. 불행의 화살이 내가 아닌 네게 날아가 꽂힌 것. 능력도, 성실함도, 나이도 아무 상관 없었다. 왜 내가 아니라 너인가. 쑤언은 궁금했다. 신만이 그 답을 알 거라고 생각한 적도 잠시 있었다. 그전까지 쑤언은 신이란 건 없다고 생각했지만, 기도하는 마수드를 가만히 지켜보자면 내 믿음 따위와 별개로 신은 있을지도 몰라,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144-145쪽
월간 『현대문학』이 펴내는 <핀 소설>, 그 마흔여섯 번째 책!
<현대문학 핀 시리즈>는 당대 한국 문학의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첨예한 작가들을 선정, 월간 『현대문학』 지면에 선보이고 이것을 다시 단행본 출간으로 이어가는 프로젝트이다. 여기에 선보이는 단행본들은 개별 작품임과 동시에 여섯 명이 ‘한 시리즈’로 큐레이션된 것이다. 현대문학은 이 시리즈의 진지함이 ‘핀’이라는 단어의 섬세한 경쾌함과 아이러니하게 결합되기를 바란다.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은 월간 『현대문학』이 격월 25일 출간하는 것으로, 내로라하는 국내 최고 작가들의 신작을 정해진 날짜에 만나볼 수 있게 기획되어 있다. 한국 출판 사상 최초로 도입되는 일종의 ‘샐러리북’ 개념이다.
출간되었거나 출간 예정되어 있는 책들은 아래와 같다.
001 편혜영 『죽은 자로 하여금』(2018년 4월 25일 출간)
002 박형서 『당신의 노후』(2018년 5월 25일 출간)
003 김경욱 『거울 보는 남자』(2018년 6월 25일 출간)
004 윤성희 『첫 문장』(2018년 7월 25일 출간)
005 이기호 『목양면 방화 사건 전말기』(2018년 8월 25일 출간)
006 정이현 『알지 못하는 모든 신들에게』(2018년 9월 25일 출간)
007 정용준 『유령』(2018년 10월 25일 출간)
008 김금희 『나의 사랑, 매기』(2018년 11월 25일 출간)
009 김성중 『이슬라』(2018년 12월 25일 출간)
010 손보미 『우연의 신』(2019년 1월 25일 출간)
011 백수린 『친애하고, 친애하는』(2019년 2월 25일 출간)
012 최은미 『어제는 봄』(2019년 3월 25일 출간)
013 김인숙 『벚꽃의 우주』(2019년 4월 25일 출간)
014 이혜경 『기억의 습지』(2019년 5월 25일 출간)
015 임철우 『돌담에 속삭이는』(2019년 6월 25일 출간)
016 최 윤 『파랑대문』(2019년 7월 25일 출간)
017 이승우 『캉탕』(2019년 8월 25일 출간)
018 하성란 『크리스마스캐럴』(2019년 9월 25일 출간)
019 임 현 『당신과 다른 나』(2019년 10월 25일 출간)
020 정지돈 『야간 경비원의 일기』(2019년 11월 25일 출간)
021 박민정 『서독 이모』(2019년 12월 25일)
022 최정화 『메모리 익스체인지』(2020년 1월 25일)
023 김엄지 『폭죽무덤』(2020년 2월 25일)
024 김혜진 『불과 나의 자서전』(2020년 3월 25일)
025 이영도 『마트 이야기―시하와 칸타의 장』(2020년 4월 25일)
026 듀 나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었다』(2020년 5월 25일)
027 조 현 『나, 이페머러의 수호자』(2020년 6월 25일)
028 백민석 『플라스틱맨』(2020년 7월 25일)
029 김희선 『죽음이 너희를 갈라놓을 때까지』(2020년 8월 25일)
030 최제훈 『단지 살인마』(2020년 9월 25일)
031 정소현 『가해자들』 (2020년 10월 25일)
032 서유미 『우리가 잃어버린 것』 (2020년 12월 25일)
033 최진영 『내가 되는 꿈』 (2021년 2월 25일)
034 구병모 『바늘과 가죽의 시詩』 (2021년 4월 25일)
035 김미월 『일주일의 세계』 (2021년 6월 25일)
036 윤고은 『도서관 런웨이』 (2021년 8월 25일)
037 우다영 『북해에서』 (2021년 10월 25일)
038 김초엽 『므레모사』(2021년 12월 25일)
039 오한기 『산책하기 좋은 날』(2022년 2월 25일)
040 서수진 『유진과 데이브』(2022년 4월 25일)
041 한정현 『마고麻姑―미군정기 윤박 교수 살해 사건에 얽힌 세 명의 여성 용의자』(2022년 6월 25일)
042 이주란 『어느 날의 나』(2022년 8월 25일)
043 천선란 『랑과 나의 사막』(2022년 10월 25일)
044 이서수 『몸과 여자들』(2022년 12월 25일)
045 천희란 『K의 장례』(2023년 2월 25일)
046 문진영 『딩』(2023년 4월 25일)
047 임솔아 근간
048 강화길 근간
049 이장욱 근간
050 김지연 근간
현대문학 × 아티스트 이연미
<현대문학 핀 시리즈>는 아티스트의 영혼이 깃든 표지 작업과 함께 하나의 특별한 예술작품으로 재구성된 독창적인 소설선, 즉 예술 선집이 되었다. 각 소설이 그 작품마다의 독특한 향기와 그윽한 예술적 매혹을 갖게 된 것은 바로 소설과 예술, 이 두 세계의 만남이 이루어낸 영혼의 조화로움 때문일 것이다.
이연미
국민대 미술대학 회화과 및 동 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도쿄갤러리 개인전을 시작으로 갤러리 현대, 서울시립미술관, 상하이미술관 등 국내외에서 개인전과 단체전에 참가했다.
자신만의 정원을 구축하고, 현실과 판타지 사이의 간극을 극대화시키며 거칠게 날이 선 나무와 신비롭고 낯선 형상의 동식물이 뒤섞인 서정적 조형세계를 구축하며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