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에 대하여
당대 한국 문학의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첨예한 작가들을 선정, 신작 시와 소설을 수록하는 월간 『현대문학』의 특집 지면 <현대문학 핀 시리즈>의 열두 번째 소설선, 최은미의 『어제는 봄』이 출간되었다. 2018년 <대산문학상>을 수상하며 문학적 성과를 크게 인정받고 있는 최은미가 내놓은 이번 작품은 2018년 6월호 『현대문학』에 발표한 소설을 퇴고해 발표한 것이다.
경기도 경진시 은정동 해릉마을 10단지에 사는 ‘나’ 정수진은 등단작이 곧 마지막 발표작인 등단 10년차 유령 작가이다. 꾸준히 소설을 쓰고는 있지만 소설가로서의 존재 가치를 가족들에게조차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나는 마지막이란 심정으로 10년째 쓰고 있는 장편을 탈고하겠다 마음먹는다. 그리고 그 소설의 취재를 위해 경진서署 이선우 경사를 만나게 된다.
나는 이선우의 도움으로 오래전 양주에서 일어났던 살인사건을 배경으로 한 소설 집필에 속도를 낸다. 등단 후부터 계속해서 나를 조급하게 만들었던 이야기, 잃어버려진 내 안의 숨겨져 있는 비밀이 담긴 소설.
나는 대학 진학과 함께 집을 떠났다가 교생 실습을 하기 위해 잠시 양주로 돌아와 부모님과 같이 지내게 된다. 그 한 달 동안 나는 부모님의 불화를 알게 되고, 엄마의 부정不貞을 알게 된다. 그리고 갑작스런 아빠와, 엄마의 부정을 내게 알린 엄마 지인의 죽음을 연이어 맞닥뜨리고, 그곳 양주에 아빠의 죽음과 엄마 지인의 죽음을 함께 묻는다. 나는 엄마의 부정이 아빠의 죽음과 가족의 해체를 가져왔다고 믿었다. 그 믿음은 자책과 분노, 결핍으로 나를 옥죄었고, 그 감정은 현재의 가족에게까지 전이되어 남편과 딸 소은이가 있는 지금의 가정 안에서도 나를 결핍의 자리로 자꾸만 내몰았다. 그런 내 앞에 이선우가 나타난 것이다.
몸에 밴 친절함을 바탕으로 대민지원의 일환으로 나를 응대한 이선우는 나를 꼬박 ‘작가님’이라고 부른다. 소설 집필을 위해 만났으니 당연한 것이었지만 사실 나에게 작가로서의 삶은 죽은 삶이었다. 나는 나를 작가로 인정해준 이선우를 통해 새로운 삶의 희망을 갖게 되고, 처음으로 저녁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된 어느 날, 선우는 내게 자신의 어머니에 관한 아픈 이야기를 털어놓았고 나 역시 16년 동안 그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던 엄마의 얘기를 선우에게 건넨다. 그러나 그날 이후 이선우는 나를 조금씩 멀리하고, 나를 두고 망설이는 그의 모습에 실망한 나는 돌연 그의 연락을 차단해버린다. 불행을 끊어내기 위해, 가족과 자기 자신과의 화해를 위해 그 기원을 소설로 써내려고 했으나, 그럴수록 선우에게 매몰되어 부정했던 엄마의 자리로 자꾸만 가버리는 자신을 발견한 나는 선우를 더 깊이 사랑하게 되는 순간 혐오와 증오를 안은 채 스스로 분열되어버릴 것을 깨닫고, 이선우를 떠나기로 마음먹는다.
다섯 살 소은이 처음으로 숲으로 소풍을 간 날, 소은은 숲에 늑대가 가득하다고 했다. 양주에 묻어둔 내 슬픔이 있는 그곳에서 소은이 느낀 그 감정에 나는 놀라고 내 기억이 혹 딸에게 이식되었을까 불안에 싸인다. 그리고 초등학생이 된 소은이 다시 찾은 그 숲에 불안한 마음으로 동행한 나는 거기서 나와 소은의 기억 속 검은 형체를 목격한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검은 형체에 몰린 내 쪽으로 총구를 겨누고, 총구를 겨눈 그가 선우임을 알아차린 나 는 그가 나를 쏠 것이라 직감한다. “‘나’가 결별을 선언해서가 아니다, 멧돼지를 잡는 행동(기억 속 트라우마를 구제하는 일)이 바로 ‘나’를 잡는 행동(자신의 어두운 기억과 대면하고 극복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 트라우마를 대면하고 그것을 이겨내는 일은 새로운 트라우마를 만드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양윤의)
소설은 내가 선우를 향해 달려갈지, 새로운 삶을 살아갈지 아무것도 정해주지 않는다. 다만 모든 것을 극복한 후 내가 열어갈 길은 적어도 수동적으로 구원을 기다리는 일만은 아닐 것임을 암시할 뿐이다. 상실의 대상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상실한 자로, 하염없이 기다리는 그녀가 아닌, 스스로 찾아나서는 나를 만나게 될 것이라는 희망이 있을 뿐이다.
“내면의 결핍과 슬픔, 아픔을 쓸 수 있다는 것, 혹은 쓰려고 한다는 데에서부터 화해는 시작된다고 믿고 싶다. 비록 그 화해가 지극히 개인적인 방식으로 마무리된다 하여도 그 개인을 전유한 화해는 어떤 방식으로든 새로운 계절을 이끌어낼 수 있으리라. 최은미의 『어제는 봄』은 ‘나’가 달려 나가는 저 ‘유리문 너머’를 쓰고자 한 ‘작가’의 여실한 노력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이병국)
표4
아무것도 알려진 바 없는,
잃어버려진 자의 내면에 관해서 말할 차례
우리는 에우리디케의 입장에서는 이 이야기를 생각해보지 않았다. 영원히 잃어버려야 하는 대상으로서, 그런 한에서 에우리디케는 이중으로 구속되어 있다. 그녀는 한 번 죽었고 오르페우스의 돌아봄을 통해 한 번 더 죽는다. (……) 에우리디케는 최초의 죽음에서도 두 번째 죽음에서도 상실의 대상이 되었다. 아리스타이오스가 그녀를 잃었고 오르페우스가 다시 그녀를 잃었다. 오르페우스에 대해서는, 소중한 대상을 잃어버린 자의 내면에 관해서는 오랫동안 말해왔다. 이제 잃어버려진 자, 상실과 죽음과 망각에 든 자의 내면에 관해서 말할 차
례이다. 아무것도 알려진 바 없는 자, 거듭 망실되어 겨우 ‘돌아봄’이라는 형식 속에서만 간신히 모습을 식별할 수 있는 자에 관해서. 소설의 주인공이 바로 그런 인물이다.
―양윤의, 「작품해설」 중에서
본문 중에서
나는 이선우 경사가 나를 ‘작가님’이라고 부를 때마다 매번 놀랐다. 그것은 내가 등단 10년 만에 처음 들어보는 호칭이었다. 동네 사람 누구도 내가 글을 쓰는 줄 몰랐고 집안 식구 누구도 나를 글 쓰는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다. 나도 나를 작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내 이름으로 된 책 한 권 없었고 이름 옆에 ‘소설’이라는 연관 검색어를 붙여도 포털 사이트에서 검색조차 되지 않았다. 아무런 작가 단체에도 가입돼 있지 않았고 단편소설을 매해 이런저런 문예지에 투고해도 한 번도 회신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나는 10년째 병에 걸려 있었다. 청탁을 받지 못하는 등단 작가라는 저주에,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는 울분에, 장편소설만 당선되면 이 모든 게 한 방에 해결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 고문에.
-18-19쪽
윤소은의 친부 윤지욱. 그는 주위에서 좋은 남편이자 좋은 아빠라는 평을 종종 듣는 사람이었다. 그는 돈이 많이 드는 취미 생활에도 관심이 없었고 못 봐줄 만한 술버릇도 없었다. 같이 사는 가족들을 불편하게 하는 까칠함도 없었고 전전긍긍함이나 의심도 없었다. 철두철미함도 없었고 결벽증도 없었다. 그에겐 없는 게 꽤 있었다. 그중에 제일 없는 것은 성욕이었다.
-35-36쪽
아이가 유치원에 들어간 다섯 살 때였다. 처음으로 가는 소풍이었다. 코코몽 도시락에 꼬마 김밥을 싸서 아이를 유치원 버스에 태워 보냈다. 경진시의 많은 교육기관에서 그러는 대로 아이의 유치원에서 소풍을 간 곳은 능이었다.
소풍을 다녀온 그날 오후 유치원 담임이 전화를 걸어왔다. 아이가 능에 들어서서부터 내내 울었다고 했다. 그냥 운 것도 아니고 바들바들 떨면서 울었다고 했다. 벌도 나무도 흙도 다 무섭다며 울음을 그치지 않아서 소풍 내내 부담임이 안고 있었다고 했다. (중략)
그날 저녁 아이는 거실에 앉아서 무언가를 그리고는 주방으로 걸어와 나에게 내밀었다. 나는 아이의 그림을 보고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스케치북엔 형체를 알기 힘든 검은 선들이 가득했다. 아이가 스케치북 한 면을 검은 물감으로 채운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굳어가는 내 얼굴을 올려다보며 아이가 말했다.
“엄마. 이게 오늘 갔던 숲이야. 늑대가 가득해.”
-55-58쪽
하지만 내가 정말로 역겨워하는 단어는 따로 있다. 나는 1만 매가 넘는 소설을 쓴다 해도 ‘섞다’라는 동사를 단 한 번도 쓰지 않을 것이다. 나는 ‘섞다’라는 말이 역겹다.
-86쪽
나는 웃고 싶어진다. 테이블이 부서지도록 웃고 싶어진다. 답가로 내 엄마 외도 얘기를 한다. 다른 말은 하지 않는다. 한마디만 한다. ×××고. 나는 내 엄마가 ××워.
그 말을 하자마자 나는 깨닫는다. 지난 16년 동안 내가 그 말을 얼마나 하고 싶었었는지. 소나무 숲에 들어가 땅에 구멍을 파고 얼마나 외치고 싶었었는지 그 말을!
-106-107쪽
순찰차가 지나간다. 똑같은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 서넛이 길을 건너고, 만 원짜리 지폐 다발을 들고 신문 구독을 권유하는 사람 옆에, 회양목 화단 앞에, 누군가가 서 있는 것이 보인다. 이선우다. 이선우가 서서 나를 올려다보고 있다. 통나무처럼 서서 나를 보고 있다. 밥을 이틀쯤 굶은 것 같은 표정으로. 불면과 원망이 뒤범벅된 얼굴로.
나는 이선우를 똑바로 내려다보면서 천천히, 블라인드의 끈으로 손을 가져간다. 이선우가 선 채로 메시지를 보낸다. ‘블라인드 내리지 마요.’ 하지만 나는 눈앞에 있는 이선우를 못 견디겠어서, 못 참겠어서, 블라인드를 내린다. 완전히 내려버린다.
-114-115쪽
검은 형체가 거칠게 숨을 뿜는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것을 본다. 늑대가 아니다. 돼지다. 검은 형체가 멧돼지라는 걸 알아차린 순간 나는 내 앞에 나타난 사람이 이선우가 맞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처음 본 그날처럼 청록색 근무복 셔츠를 입고 있다. 이제는 반팔로 바뀐 셔츠가 땀으로 다 젖어 있다. 이것은 꿈이 아니다. 아닐 것이다. 멧돼지가 땅에 코를 박고 점점 내 쪽으로 이동한다. 내 딸이 계속 운다. 뺨에 총을 밀착시킨 채 다가오던 이선우의 눈빛이 흔들린다. 나라는 걸 알아본 것이다. 은정초등학교의 한 학부모가 아니라 나, 정수진이라는 걸 알아본 것이다. 나는 숨을 쉴 수가 없을 것 같다. 이제 너는 나를 쏘겠지. 사격마스터니까 아주 명중을 시키겠지. 확인사살은 필요도 없을 거야. 나는 비틀거리며 이선우 쪽으로 한 발을 뗀다. 멧돼지의 기척이 달라진다. 땀이 눈을 찌른 순간 이선우의 총구에서 마취탄이 날아온다. 멧돼지와 나는 동시에 흔들린다. 이선우가 더 다가온다. 다시 한 발. 이선우가 더 가까이 온다. 또 한 발.
-146-147쪽
나를 극복하고 너에게 가는 길은 이렇게도 멀어서, 나는 여전히 매일매일 1층으로, 엘리베이터 밖으로, 유리문 너머로, 니가 나를 기다리던 곳으로, 힘을 다해 달려 나간다.
-153쪽
월간 『현대문학』이 펴내는 월간 <핀 소설>, 그 열두 번째 책!
<현대문학 핀 시리즈>는 당대 한국 문학의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첨예한 작가들을 선정, 월간 『현대문학』 지면에 선보이고 이것을 다시 단행본 발간으로 이어가는 프로젝트이다. 여기에 선보이는 단행본들은 개별 작품임과 동시에 여섯 명이 ‘한 시리즈’로 큐레이션된 것이다. 현대문학은 이 시리즈의 진지함이 ‘핀’이라는 단어의 섬세한 경쾌함과 아이러니하게 결합되기를 바란다.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은 월간 현대문학이 매월 내놓는 월간 핀이기도 하다. 매월 25일 발간할 예정이 후속 편들은 내로라하는 국내 최고 작가들의 신작을 정해진 날짜에 만나볼 수 있게 기획되어 있다. 한국 출판 사상 최초로 도입되는 일종의 ‘샐러리북’ 개념이다.
001부터 006은 1971년에서 1973년 사이 출생하고, 1990년 후반부터 2000년 사이 등단한, 현재 한국 소설의 든든한 허리를 담당하고 있는 작가들의 작품으로 꾸렸다.
007부터 012는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반 출생하고, 2000년대 중후반 등단한, 현재 한국 소설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의 작품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발간되었거나 발간 예정되어 있는 책들은 아래와 같다.
001 편혜영 『죽은 자로 하여금』(2018년 4월 25일 발간)
002 박형서 『당신의 노후』(2018년 5월 25일 발간)
003 김경욱 『거울 보는 남자』(2018년 6월 25일 발간)
004 윤성희 『첫 문장』(2018년 7월 25일 발간)
005 이기호 『목양면 방화 사건 전말기』(2018년 8월 25일 발간)
006 정이현 『알지 못하는 모든 신들에게』(2018년 9월 25일 발간)
007 정용준 『유령』(2018년 10월 25일 발간)
008 김금희 『나의 사랑, 매기』(2018년 11월 25일 발간)
009 김성중 『이슬라』(2018년 12월 25일 발간)
010 손보미 『우연의 신』(2019년 1월 25일 발간)
011 백수린 『친애하고, 친애하는』(2019년 2월 25일 발간)
012 최은미 『어제는 봄』(2019년 3월 25일 발간)
013 김인숙(근간)
014 이혜경(근간)
015 임철우(근간)
016 최 윤(근간)
017 이승우(근간)
018 하성란(근간)
현대문학 × 아티스트 허은경
<현대문학 핀 시리즈>는 아티스트의 영혼이 깃든 표지 작업과 함께 하나의 특별한 예술작품으로 재구성된 독창적인 소설선, 즉 예술 선집이 되었다. 각 소설이 그 작품마다의 독특한 향기와 그윽한 예술적 매혹을 갖게 된 것은 바로 소설과 예술, 이 두 세계의 만남이 이루어낸 영혼의 조화로움 때문일 것이다.
허은경
1964년 서울 출생. 서울대 서양화과 졸업. 미국 캘리포니아주 패서디나에 위치한 아트센터Art Center College of Design, Pasadena, CA에서 학사와 석사 학위 취득. 1992년 첫 개인전 「After Myth」로 활동을 시작, 미국과 한국, 독일, 중국을 오가며 다수의 개인전, 단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