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말
『K의 장례』는 오래전 떠올린 제목과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소설이다. 거듭 다시 쓰기에 실패하면서도 왜 그토록 미련을 버릴 수 없었는지, 완성한 지금도 별다른 답은 떠오르지 않는다. 말할 수 있는 것은 이제라도 이 소설을 마무리할 수 있게 만든 생각에 관한 것뿐인지도 모르겠다. 내 정체성을 구성한다고 믿었던 ‘나’라는 존재에 대한 섬세한 정의들이 그 무엇보다 내게 배타적일 수 있다는 것. 나를 끊임없이 소외시키려는 자기동일성의 환상에 저항하기.
이 소설은 줄곧 ‘자유’를 언급하지만, 나는 단 한 순간도 문학이 자유 그 자체이거나 자유에 가닿는 길이라고 생각한 적 없다. 그러나 나를 속박하는 조건들을 이해해가는 과정이 곧 해방일 수도 있다는 깨달음은 오직 문학만이 내게 줄 수 있었던 것이다. 역설을 통해서만 상상 가능한, 연루되어가는 감각으로서 자유. 결코 결백해질 수 없는 삶을 살아가기.
(……) 장례는 죽은 자와 결별하는 과정이다. 결별은 완전히 떠나보내는 일이기도 하고, 흔적을 간직하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무엇보다 장례가 관념이 아닌, 현존하는 죽음의 자리를 마련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쓴 소설이 한 권의 책으로 묶여 세상에 나갈 때마다 겪는 이 결별을, 이제는 섣부른 기대나 과도한 두려움 없이 겪어낼 수 있을 것 같다.
표4
“우리가 서로의 인생을 훔친다면
그것은 제법 공정한 거래이지 않겠습니까?”
나는 『K의 장례』를 진지한 존경에 관한 이야기로 읽는다. 진지한 존경에는 항상 배반감이 수반되기 때문이다. (……) 인생의 전반부를 지나는 지금 (다소 끔찍하지만 백세 시대라는 것을 전제했을 때의 이야기다) 그간 숭배에 가까운 존경과 사랑으로 표상되어왔던 모든 존재들에 의문을 갖는 것을 넘어서, 딱히 부정하지도 거부하지도 않는 순간 대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도 있다는 것을 배웠다. 죽음과 더불어 이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 ‘자유’다. 작가 천희란이 여태껏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대상을 진지하게 사랑하고 존경하고 그 사랑과 존경에 책임을 지려하고 최선을 다했는지 나는 증언할 수 있다. (……) 언제나 정직하기에 그만큼 농밀한 문장을 끊임없이 써내려가는 작가가 내내 자유롭기를, 그 자신이 늘 원했듯, 실제로 죽지 않고 죽음에 육박하는 작품을 쓰기 위해 용기 내서 책상에 앉아주기를 바란다.
-박민정, 「발문」 중에서
본문 중에서
* 나는 몰랐다. K가 내게 언제든 그를 떠날 수 있는 자유를 주었다 하더라도 그 자유가 내게만 주어지지는 않았다는 것을. K가 나를 배반할 자유 역시 존재했다는 것을. 그리고 나와 K, 둘 중 누구도 아닌 제3의 존재가 우리의 계약을 언제든 파기할 수 있었다는 것을. 그것을 단지 죽음이라고 부를 수는 없었다. 어떠한 제약도 없이 우리의 삶을 쥐고 흔들 수 있었던 존재, 어쩌면 그 운명의 이름이야말로 그도 나도 가질 수 없었던, 자유였다.
-42쪽
* ‘강재인 선생께’
발신인의 이름은 없었고 연구실의 주소나 연락처도 적혀 있지 않았다. 나는 봉투를 옆구리에 끼고 바닥에 부려놓았던 나머지 우편물을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 그리고 연구실 옆에 붙은 명패를 확인했다. 강재인 교수. 본명이 적혀 있기야 했지만, 공식적인 문서나 고지서를 제외하면 쓰일 일이 거의 없어진 이름이었다. 동료 교수나 학생들도 나를 강재인이라 부르지 않았다. 손승미, 나는 그 이름을 선택했고, 그 이름으로 내 삶을 꾸렸고, 나와 관계하는 모든 사람들이 나를 승미라 불렀다
-51-52쪽
* “나는 영원히 도망치지 못할 거예요.”
“당신 아버지로부터요?”
“아뇨.”
“그 여자 작가로부터?”
“아니에요.”
“그럼 무엇으로부터요?”
“아마도 나 자신이요.”
-58쪽
* 문학은 인간을 속인다. 다른 모든 예술처럼, 그 어떤 예술보다 현란하게. 언어로 된 정신의 세계를 문학은 교란하고 지배한다. 좀처럼 장악되지 않는 의미의 공간을 논리에 제압되지 않는 본질의 영역인 양 떠받들게 된다. 진정성, 진실성과 같은 단어들이 뛰어난 작품들을 수식한다. 그러나 그것은 수사에 불과하다. 진실함은 좋은 작품의 필요조건이 아니다. 잘 쓰인 작품은 더 압도적으로 인간 정신을 장악하고, 그때 비로소 작품은 진실이라는 착각으로 정신을 눈멀게 하는 것이다. 내게는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와 그의 동료들이 살아온 삶과 그들이 작품 속에 그려낸 삶의 어긋남이 바로 그 기만의 증거였다.
-69-70쪽
* 오랜 고민 끝에 답을 합니다. 궁금했던 사건의 전말을 이렇게 알게 되는군요. 아직도 믿기지 않을 만큼 얼얼하지만, 믿기로 했습니다. 다만 저는 이 이야기를 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전희정 선생님의 이야기도 아닙니다. 이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어떤 유령의 목소리일 뿐이죠. 전희정 선생님의 진짜 목소리는 제가 읽은 것의 그것과는 다르리라고 확신합니다. 파일은 삭제됐고, 제게 남아 있는 파일은 없습니다. 내 아버지는 15년 전에 스스로 세상을 등졌고, 그것이 제가 알고 있는 유일한 진실입니다. 이제 선생님을 묶고 있는 밧줄은 없습니다.
-117-118쪽
월간 『현대문학』이 펴내는 <핀 소설>, 그 마흔다섯 번째 책!
<현대문학 핀 시리즈>는 당대 한국 문학의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첨예한 작가들을 선정, 월간 『현대문학』 지면에 선보이고 이것을 다시 단행본 출간으로 이어가는 프로젝트이다. 여기에 선보이는 단행본들은 개별 작품임과 동시에 여섯 명이 ‘한 시리즈’로 큐레이션된 것이다. 현대문학은 이 시리즈의 진지함이 ‘핀’이라는 단어의 섬세한 경쾌함과 아이러니하게 결합되기를 바란다.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은 월간 『현대문학』이 격월 25일 출간하는 것으로, 내로라하는 국내 최고 작가들의 신작을 정해진 날짜에 만나볼 수 있게 기획되어 있다. 한국 출판 사상 최초로 도입되는 일종의 ‘샐러리북’ 개념이다.
출간되었거나 출간 예정되어 있는 책들은 아래와 같다.
001 편혜영 『죽은 자로 하여금』(2018년 4월 25일 출간)
002 박형서 『당신의 노후』(2018년 5월 25일 출간)
003 김경욱 『거울 보는 남자』(2018년 6월 25일 출간)
004 윤성희 『첫 문장』(2018년 7월 25일 출간)
005 이기호 『목양면 방화 사건 전말기』(2018년 8월 25일 출간)
006 정이현 『알지 못하는 모든 신들에게』(2018년 9월 25일 출간)
007 정용준 『유령』(2018년 10월 25일 출간)
008 김금희 『나의 사랑, 매기』(2018년 11월 25일 출간)
009 김성중 『이슬라』(2018년 12월 25일 출간)
010 손보미 『우연의 신』(2019년 1월 25일 출간)
011 백수린 『친애하고, 친애하는』(2019년 2월 25일 출간)
012 최은미 『어제는 봄』(2019년 3월 25일 출간)
013 김인숙 『벚꽃의 우주』(2019년 4월 25일 출간)
014 이혜경 『기억의 습지』(2019년 5월 25일 출간)
015 임철우 『돌담에 속삭이는』(2019년 6월 25일 출간)
016 최 윤 『파랑대문』(2019년 7월 25일 출간)
017 이승우 『캉탕』(2019년 8월 25일 출간)
018 하성란 『크리스마스캐럴』(2019년 9월 25일 출간)
019 임 현 『당신과 다른 나』(2019년 10월 25일 출간)
020 정지돈 『야간 경비원의 일기』(2019년 11월 25일 출간)
021 박민정 『서독 이모』(2019년 12월 25일)
022 최정화 『메모리 익스체인지』(2020년 1월 25일)
023 김엄지 『폭죽무덤』(2020년 2월 25일)
024 김혜진 『불과 나의 자서전』(2020년 3월 25일)
025 이영도 『마트 이야기―시하와 칸타의 장』(2020년 4월 25일)
026 듀 나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었다』(2020년 5월 25일)
027 조 현 『나, 이페머러의 수호자』(2020년 6월 25일)
028 백민석 『플라스틱맨』(2020년 7월 25일)
029 김희선 『죽음이 너희를 갈라놓을 때까지』(2020년 8월 25일)
030 최제훈 『단지 살인마』(2020년 9월 25일)
031 정소현 『가해자들』 (2020년 10월 25일)
032 서유미 『우리가 잃어버린 것』 (2020년 12월 25일)
033 최진영 『내가 되는 꿈』 (2021년 2월 25일)
034 구병모 『바늘과 가죽의 시詩』 (2021년 4월 25일)
035 김미월 『일주일의 세계』 (2021년 6월 25일)
036 윤고은 『도서관 런웨이』 (2021년 8월 25일)
037 우다영 『북해에서』 (2021년 10월 25일)
038 김초엽 『므레모사』(2021년 12월 25일)
039 오한기 『산책하기 좋은 날』(2022년 2월 25일)
040 서수진 『유진과 데이브』(2022년 4월 25일)
041 한정현 『마고麻姑―미군정기 윤박 교수 살해 사건에 얽힌 세 명의 여성 용의자』(2022년 6월 25일)
042 이주란 『어느 날의 나』(2022년 8월 25일)
043 천선란 『랑과 나의 사막』(2022년 10월 25일)
044 이서수 『몸과 여자들』(2022년 12월 25일)
045 천희란 『K의 장례』(2023년 2월 25일)
046 문진영 근간
047 임솔아 근간
048 강화길 근간
현대문학 × 아티스트 이연미
<현대문학 핀 시리즈>는 아티스트의 영혼이 깃든 표지 작업과 함께 하나의 특별한 예술작품으로 재구성된 독창적인 소설선, 즉 예술 선집이 되었다. 각 소설이 그 작품마다의 독특한 향기와 그윽한 예술적 매혹을 갖게 된 것은 바로 소설과 예술, 이 두 세계의 만남이 이루어낸 영혼의 조화로움 때문일 것이다.
이연미
국민대 미술대학 회화과 및 동 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도쿄갤러리 개인전을 시작으로 갤러리 현대, 서울시립미술관, 상하이미술관 등 국내외에서 개인전과 단체전에 참가했다.
자신만의 정원을 구축하고, 현실과 판타지 사이의 간극을 극대화시키며 거칠게 날이 선 나무와 신비롭고 낯선 형상의 동식물이 뒤섞인 서정적 조형세계를 구축하며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