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언제나 위태롭고 혼란스럽다
“덜 사랑하거나 더 사랑해야 했던 것일까?”
여기 14년 만에 재회한 두 남녀 재훈과 매기가 있다. 이들은 2002년 대학에 입학한 동기였고, 선거 출구조사 아르바이트를 함께한 후 연인이 되었다. 그러나 현실적인 여러 이유들로 헤어졌고, 정확히 14년 후 다시 만나게 된다. 하지만 이미 가정이 있던 매기와 미혼인 재훈은 완벽한 의미의 지속 가능한 관계로 이뤄질 수 없는 상황이다. 한강 변을 걷고 걸으며 그 둘은 숱하게 리비도를 잠재우려 하지만 결국 실패하고 아슬아슬한 연인의 관계를 조심스레 시작해나간다.
“선택이란 가능하지 않았다. 마치 빗물이 손바닥을 적시듯 매기가 내 인생으로 툭툭 떨어져 내렸다”는 재훈은 매기와의 사랑이 거부할 수 없는 운명적인 것임을 고백하지만 매사에 조심할 수밖에 없는 매기는 입장이 달랐다. 매기는 그들이 함께 공유하고 있는 엑스 자 문신을 반복해 그리며 극단의 관계로 가는 대신 새롭게 채워질 그들의 시간과 자리를 재훈이 인정해주길 바라며 거리두기를 한다.
그러나 결국 그들의 사랑은 완성될 수 없었다. 그들에게는 돌아가야 할 자리가 있고 각자의 삶이 있었다. 아름답게 이별하고, 좋은 것만 기억하는 것으로 둘의 사랑을 마무리하려 하지만 마지막까지도 서로에 대한 애틋함은 버리지 못한다. “아무리 동산 수풀은 사라지고 장미꽃은 피어 만발하더라도, 모두 옛날의 노래를 함께 부르고 시간이 지나 나의 사랑, 매기가 백발이 다 된 이후라도” 서로에 대한 기억은 잊지 못할 것이라고 고백한다.
격하게 맞서 쟁취함으로 이뤄지는 사랑이 아닌 묵묵히 서로를 존중하며 응원하는 이별을 택한 재훈과 매기는, 그 아픔 속에서 성장하고 성숙한다. 때를 놓친 그들의 사랑은 슬프고, 권태롭고, 비감하지만 자신의 지난 시간에 대한 믿음과 앞으로에 대한 희미한 희망을 간직한 김금희 식의 따뜻한 인물은 또 이렇게 탄생한다.
표4
사랑은 조화될 수 없는 두 경향이 교차하는 위태롭고 혼란스러운 상황을 정상화하기보다 그런 상황에 감염되어 사랑 그 자체가 위태롭고 혼란스러운 것이 된다.
그러나 이것이 곧바로 사랑에 대한 더 많은 지혜로운 조언과 그에 따른 수정과 보완이 추가로 필요하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차라리 사랑처럼 오래 실천된 신비화된 전략으로도 정상화할 수 없는, 위태롭고 혼란스러운 방황이야말로 인간의 조건이라는 점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 바로 그 생을 충분히 겪어내기 위해서라도 인간은 사랑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권희철, 「작품해설」 중에서
작가의 말 중에서
나는 소설의 매기라는 여자와 재훈이라는 남자가, 한강을 향해 걷다가 걷다가 철새들이 겨울을 나는 너른 만이 있는 지방의 도시까지 갔다가 더는 어디도 갈 수 없을 것 같은 제주까지 와서야 함께 보낸 시절들을 제대로 ‘앓게 된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그때는 서울과 제주까지 동선을 긋고 적당히, 아주 먼 거리라고 만족했는데 사실상 그곳이 끝이 아니었다는 것, 마라도도 있고 그곳보다 압도적으로 생활경제가 갖춰져 있는 가파도가 있어서 육지의 버젓한 남쪽 끝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을 이 가을이 알려주었다. 만들어낸 이야기에서도 나는 완전히 예상하고 있지는 못한 셈이다. (……) 우리는 이렇게 아무것도 예상치 못한 채 살아가지만 그렇게 해서 조금씩 아는 사람이 되어간다고 믿는다. 나중에 백발 할머니가 되어서도 끊임없이 오늘의 당혹스러움을 내일로 미루는 이 습관을 버리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어떤가. 그런데도 기꺼이 겪어내며 살겠다면, 지금의 무게에 대해 아직은 잘 모르지만 알 때까지 분투할 자세만은 취하고 있겠다면.
나쁘지도 이상하지도 않을 것이다. 당연히 그럴 것이다.
-김금희, 「작가의 말」 중에서
본문 중에서
우리가 처음으로 포옹한 장소도 여의도에 면한 한강 둔치였는데 그렇게 해서 매기를 14년 만에 다시 안았을 때, 손을 잡고 입술을 가져다 댔을 때 나는 우리가 왜 그렇게 온 힘을 다해 진을 빼듯이 걷고 있었는가를 깨달았다. 우리는 우리 내면의 어떤 것이 기진맥진해져서 완전히 투항하기를 바라면서 무언가와 싸우듯이 걷고 있었던 것이었다.
-18p
매기를 사랑하고 나서 줄곧 나를 붙잡았던 의문은 왜 내가 이런 관계를 선택했는가, 였다. 그런데 적어도 9호선에 몸을 구겨 넣고 만원의 상태를 견디며 바닥과, 그 바닥의 깊음과, 그래서 겪는 불편과 고통과 힘듦과 귀찮음 모두의 원인인 한강에 대해 생각할 때에는 매기와 나의 관계에서 선택이란 가능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빗물이 손바닥을 적시듯 매기가 내 인생으로 툭툭 떨어져 내렸다는.
-p. 60
우리는 이후에도 여러 번, 그때 조장이 했던 대답에 대해 얘기했는데, 매기와 나의 기억이 서로 달랐다. 나는 그 엑스 자 문신이 상대에게 안 돼, 라고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기억했지만, 매기는 자기 자신에게 안 돼, 라고 하기 위한 것이라고 기억했다. 내가 그런 건 좀 이상하지 않느냐고, 그냥 혼자 안 돼, 라고 생각하면 될 것을 그렇게 문신까지 하겠느냐고 주장했지만 매기는 아니야, 당연해, 라고 했다. 그렇게 눈으로 자신에게 보여주면서 되뇌어야 할 일도 있으니까.
-72p
재훈아, 먹고 싶은 것 먹고, 보고 싶은 사람 보고,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 라고만 했다. 들어보면 환자를 돌보는 사람의 특별할 것 없는 대답이었는데 나는 아주 확실히 절망했다. 매기의 대답에는 말의 진기랄까, 온도랄까, 하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고 그저 사라지고 있는 중인지도 몰라서 나는 용기를 내서, 그러고 있잖아, 라고 답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만나고 있잖아. 만나고 싶어서.”
-103-104p
아이들은 갑자기 내린 눈을 잡는다고 수선스럽게 돌아다니고 어딘가에서 개가 컹, 하고 짖을 때 매기가 드디어 내게 길은 안 미끄러웠어, 밥은, 하고 말을 건넸다. 언제 서울에서 출발했어, 하면서 우리는 되도록 평정을 지키며 대화를 주고받았지만 이내 멈췄고 이윽고 매기가 조용히 자기 손목을 내밀어 이번에는 아무것도 칠해지지 않은 손톱으로, 내가 기억하고 있는지 아닌지도 모르면서 크게 엑스 자를 한번 그렸다. 그리고 불행히도 우리는 그런 기억들을 하나도 잊지 못했으므로 나는 준비해 간 돈 봉투를 주지도, 하고 싶었던 다정하고 따듯한 위로도 못 한 채 다만 알겠어, 라고 하면서 곧장 병원을 빠져나갔다.
-113-114p
공항까지 차로 데려다주면서 나는 이런 질문들은 다행히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우리 이제는 완전히 끝이 난 거지, 안부도 물을 수 없는 것이겠지, 하는. 출국장 입구에 내리면서 매기는 언제 한번 제주로 여행을 오면 연락하라고 했다. 자기만 아는 아주 유명한 순댓국집이 있다고, 거기는 정말 제주 토종의 방법으로 순대를 만드는데 특이하게 산초를 쓴다고.
“내가 제주까지 가서 순댓국을 먹어야겠어?”
내가 장난으로 그렇게 묻자 매기는 하기는 그렇다, 하며 웃었다.
-120-121p
나는 제주의 오름을 오르고 바다를 보고 해변을 달리며 제주를 여행한 마지막 날에, 그러면 안 되지만 스토커 같기는 하지만, 약간 멍청이 같지만 맞은편 베이커리에 앉아 한동안 가게를 지켜보았다. 여러 번 트럭이 오가고 배추나 무 같은 것이 내려졌으며 사람들이 와서 장을 봐 가는 장면을. 그렇게 그들이 들고 있는 장바구니에 담긴 것들의 무게를 가늠해보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렇게 다른 사람들은 살고 있다는 것, 그들의 일상이 돌아가고 있다는 것, 그들에게는 집이 있고 먹어야 할 저녁이 있고 내일을 위해 오늘 확보되어야 할 밤의 숙면이 있다는 것, 매기 역시 내가 보지 못하는 어느 영역에서 자기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 장바구니 위로 어느 푸성귀의 푸른 잎이 보일 때마다, 비닐봉지를 묵직하게 누르는 야채의 부피감이 느껴질 때마다 나는 그런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122-123p
현대문학 × 아티스트 허은경
<현대문학 핀 시리즈>는 아티스트의 영혼이 깃든 표지 작업과 함께 하나의 특별한 예술작품으로 재구성된 독창적인 소설선, 즉 예술 선집이 되었다. 각 소설이 그 작품마다의 독특한 향기와 그윽한 예술적 매혹을 갖게 된 것은 바로 소설과 예술, 이 두 세계의 만남이 이루어낸 영혼의 조화로움 때문일 것이다.
월간 『현대문학』이 펴내는 월간 <핀 소설>, 그 여덟 번째 책!
<현대문학 핀 시리즈>는 당대 한국 문학의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첨예한 작가들을 선정, 월간 『현대문학』 지면에 선보이고 이것을 다시 단행본 발간으로 이어가는 프로젝트이다. 여기에 선보이는 단행본들은 개별 작품임과 동시에 여섯 명이 ‘한 시리즈’로 큐레이션된 것이다. 현대문학은 이 시리즈의 진지함이 ‘핀’이라는 단어의 섬세한 경쾌함과 아이러니하게 결합되기를 바란다.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은 월간 현대문학이 매월 내놓는 월간 핀이기도 하다. 매월 25일 발간할 예정이 후속 편들은 내로라하는 국내 최고 작가들의 신작을 정해진 날짜에 만나볼 수 있게 기획되어 있다. 한국 출판 사상 최초로 도입되는 일종의 ‘샐러리북’ 개념이다.
001부터 006은 1971년에서 1973년 사이 출생하고, 1990년 후반부터 2000년 사이 등단한, 현재 한국 소설의 든든한 허리를 담당하고 있는 작가들의 작품으로 꾸렸다.
007부터 012는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반 출생하고, 2000년대 중후반 등단한, 현재 한국 소설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의 작품으로 꾸려질 예정이다.
발간되었거나 발간 예정되어 있는 책들은 아래와 같다.
001 편혜영 『죽은 자로 하여금』(4월 25일 발간)
002 박형서 『당신의 노후』(5월 25일 발간)
003 김경욱 『거울 보는 남자』(6월 25일 발간)
004 윤성희 『첫 문장』(7월 25일 발간)
005 이기호 『목양면 방화 사건 전말기』(8월 25일 발간)
006 정이현 『알지 못하는 모든 신들에게』(9월 25일 발간)
007 정용준 『유령』(10월 25일 발간)
008 김금희 『나의 사랑, 매기』(11월 25일 발간)
009 김성중(12월 25일 발간 예정)
010 손보미(2019년 1월 25일 발간 예정)
011 백수린(2019년 2월 25일 발간 예정)
012 최은미(2019년 3월 25일 발간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