낚시터 근처에서 작은 가게를 운영하는 엄마와 단둘이 살던 미라에게 엄마의 애인이 생겼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근처 천문대에서 엔지니어로 일하는 엄마의 애인을 미라는 ‘천문대’라고 불렀다. 엄마의 결혼식을 한 달도 채 남겨두지 않았던 어느 날, 셋이 함께 처음으로 나선 나들이에서 교통사고가 났다. 그 사고로 미라는 엄마를 잃고 세상에 홀로 남겨진다.
철저히 혼자인 채 외로이 살아가던 미라는 성인이 된 이후 민혁을 만나 안정된 미래를 꿈꾸지만 프러포즈를 받으리라 짐작한 그날, 프러포즈 대신 민혁의 어두운 과거에 대한 고백을 듣게 된다. 재개발을 앞둔 뒤숭숭한 동네, 어느 빈집에서 본드를 불던 무리 중 하나가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은 죽은 친구를 암매장했고, 그 무리 중 하나가 바로 민혁이었다. 미라는 고민 끝에, 그 사실을 묻고 민혁과의 결혼을 결심한다.
아들 수온을 낳고 평범한 삶을 이어가던 미라에게 ‘공폐가 합동 정리 및 지원’에 관한 통보서가 날아든다. 엄마가 미라에게 남긴 집의 정리를 위해 오랜만에 옛집을 방문한 미라는 집 마당에서 엄마의 애인이었던 ‘천문대’를 만난다. 교통사고로 엄마를 죽게 한 죄책감에 시달리며 무력하게 살던 천문대가, 홀로 남겨진 그 집을 꽃밭으로 가꾸고 있었던 것이다. 미라는 그날 이후 그 폐가 자리에 펜션을 짓기로 마음먹는다.
시골로 내려온 미라는 ‘천문대’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미라펜션’을 열고 얼마 지나지 않아 1994년, 민혁과 함께 친구의 죽음을 묻고 살아온 정명주를 손님으로 만나게 된다. 그리고 연이어 그 펜션에서 의문의 사고사가 일어난다.
그 사고들의 중심에는 불안과 공포 속에서 자신의 우주를 지키고자 한 미라가 있었다. 엄마를 잃고 고독과 증오 속에서 성장한 미라는 누구보다도 안정적인 ‘집’을 갖길 원했다. 성인이 된 그녀는, 친척들과 동네사람들로부터 필사적으로 지켜낸 엄마의 집에 그녀의 방과 그녀의 남편과 그녀의 아이가 함께 지낼 수 있는 그녀의 집을 만든다. 미라펜션은 미라네 ‘집’의 다른 이름이었다. “멈춰버린 성장과 가속페달을 밟아버린 성장이 동시에 존재”(27쪽)하던 미라는 엄마가 아직 살아 있는 세계와 엄마라는 거대한 우주가 통째로 소멸된 쓸쓸한 세계에서 살았던 시간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우주를 만들기 원했다. 그런 연유로 그 우주를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매번 선택을 해야만 했다.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는 어려울 것도 없고, 세 번째부터는 껌이다.”(169-170쪽)
“다시 산다고 해도 나는 수온이를 태어나지 못하게 하는 어떤 선택도 하지 않을 거니까요. 그러려면 나는 다시 태어나도 다시 민혁이라는 남자를 사랑해야 하잖아요. 또 미친 듯이, 또 온 마음으로, 내 운명을 다 바쳐서 사랑해야 하는 거잖아요. 사랑이란 건, 그런 거잖아요.”(197쪽)
본인의 결단이 죄악으로 귀결될 걸 알면서도 선택에 선택을 거듭하는 미라. 불안과 공포 속에 위악적인 인간들의 외로움이 그들만의 세계를 완성하기 위해 선택하는 비애를 그린 소설이다.
표4
사랑, 인간이 거대한 우주에서 발견한 최소한의 법칙!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공간이 유일한 것도 아니고, 이를 관장하는 절대적인 법칙이 존재하지도 않는다면, 광대한 우주 앞에 놓인 먼지와 같은 인간에게 누구도 삶의 의미나 목적을 알려주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은 어디로 가야 하며 어디에서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미라가 암송하는 단 하나의 문장처럼 우주가 “어떠한 계획도 없고 목적도 없으며 선이나 악도 존재하지 않”고, “모든 것에 무관심한 채 주어진 법칙을 따라 운영되고”(193쪽) 있다면, 이 무심한 우주의 서사 앞에서 인간은 어떻게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야 하는 것인가.
-서희원, 「작품해설」 중에서
본문 중에서
1994년이었다. 역사적인 폭염이라는 수식어가 붙게 될 그해 여름은 아직 다가오기 전이었다. 호수의 수면으로 물고기들이 배를 드러낸 채 떠오르고, 축사의 가축들이 점액질처럼 바닥에 달라붙어 마지막 숨을 헐떡이게 될 그 여름, 노인들이 더위를 못 이기고 여기저기서 숨을 놓게 될 그해 여름, 뉴스에서는 폭염으로 인한 사망자 수를 보도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봄이었고, 폭염이 몰려올 기미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늦추위가 몰아닥쳤던 3월의 생일에 미라는 장갑과 목도리까지 하고 꽁꽁 언 벚나무 아래에서 사진을 찍었다. 엄마의 애인이 찍은 그 사진을 미라는 보지 못했다. 그 사진을 떠올리면 하얀 입김만 떠오를 뿐이다. 하나 둘 셋 할 때마다 그의 입가에서 안개처럼 번져나가던. 그래서 흐릿해져가던 그의 얼굴이.
-11-12쪽
미라가 말하고 싶은 건 그런 거였다.
엄마가 돌아가실 때의 이야기, 엄마가 돌아가신 후의 이야기, 아니 어쩌면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의 이야기까지. 그러니까 그녀의 인생 전체에 대해. 미라의 나이 스물아홉 살이 되었을 때였다. 소녀적인 감성을 운운하기에는 많은 나이였지만 평탄하지 못했던 성장 과정이 그녀의 성격을 왜곡시켜버린 부분이 있었다. 멈춰버린 성장과 가속페달을 밟아버린 성장이 동시에 존재했다. 여전히 어린 시절부터 간직해온 더러운 담요를 돌돌 말고서야 잠이 든다거나, 그렇게 잠든 꿈속에서 괴물에 쫓긴다거나. 그러나 잠에서 깨었을 때는 구겨진 담요를 발로 밀어 치우고 차가운 얼굴로 양치를 했다. 꿈속 괴물보다 언제나 더 무서운 건 출근 시간이었고 하루하루 변하지 않는 삶에 대한 염증이었다.
-27-28쪽
그런데…… 네가 온 거야. 네가 봄비처럼 왔어. 네가 내 온몸을 적시고, 네가 내 온 마음을 적셨어. 행복해지고 싶어진 거야. 너랑 같이, 너랑 평생 행복해지고 싶어져버린 거야. 이해할 수 있겠니. 내가 왜 이런 말을 지금 여기서 해야 하는지……. 아니, 안 할 수가 없는 건지……. 죽어 지옥에 가더라도, 언젠가는 정말 천벌을 받더라도, 지금은 너와 함께하고 싶어진 거야. 그렇게 되어버렸다는 거야.
그래, 그 자식을 묻었어. 어떻게 할 수 있었겠니.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거야. 그 자식을 묻는 거밖에는 달리 떠오르는 방법이 없었다는 거야. 묻든가, 더 깊이 묻든가…… 더 깊이 묻든가, 그것보다 더 깊이 묻든가……. 그것보다 더 깊이 묻든가, 아주아주 깊이 묻든가…….
-59-60쪽
혜성이 지나간다고 했던 밤, 혜성이 우주를 가로질러 지구의 하늘을 지나갈 거라고 했던 밤, 그날 그토록 아름다웠다던 초록빛 긴 광선은 어디에 있었을까. 섬광은 또 어디에 있었을까. 아무것도 떨어지지 않고 아름답게 지나가기만 했다는데, 그토록 뜨거웠던 느낌은 무엇이었을까. 그녀는 그때 어떤 우주에 있었던 것일까. 만일 또 다른 그녀가 살고 있는 또 다른 우주가 있다면, 그 평행우주에서 고양이는 살아 있을까, 죽어 있을까.
-112-113쪽
아저씨는 그렇게 물으시면 안 돼요. 아저씨는 아시잖아요. 사랑이라는 걸…….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오랜 세월 꽃을 심을 수 있었겠어요. 그 꽃을 어떻게 그렇게 예쁘게 피어나게 할 수 있었겠어요. 아저씨는 아직도 그리워하고 있는 거잖아요. 우리 엄마를 사무치게 그리워하고 있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아저씨 사랑만 사랑이고 내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시면 안 된다는 거지요.
-165-166쪽
미친놈. 미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모두가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불꽃놀이의 그 밤, 프러포즈를 받을 줄 알았던 그 밤, 누군가 민혁에게 전화를 걸었었다. 그 찬란하고 황홀한 순간에조차 받아야 할 만큼 민혁에게는 중요한 전화 같았었다. 전화를 받고 돌아온 민혁의 표정이 창백했었다. 민혁은 그 전화가 김주희에게서 온 거였다고 나중에 말했다. 정명주는 자기가 했다고 했다. 그런데 최윤재는 이제 그 전화를 자기가 건 거라고 말하기라도 하려는 것일까. 다들 미친것들이었다.
-190-191쪽
아저씨. 그날 만일 주사위가 다르게 던져져서 사고가 나지 않았다면 나는 훨씬 더 행복할 수 있었을까요? 나는 아저씨를 걱정시키지 않는 딸로 자라날 수 있었을까요? 그러면 민혁이라는 남자를 만나지 않게 되었을까요? 그런 건 상상하고 싶지도 않아요. 아무 의미도 없는 상상이잖아요. 게다가 그러면 우리 수온이가 태어나지 못했을 테니까요. 다시 산다고 해도 나는 우리 수온이를 태어나지 못하게 하는 어떤 선택도 하지 않을 거니까요. 그러려면 나는 다시 태어나도 다시 민혁이라는 남자를 사랑해야 하잖아요. 또 미친 듯이, 또 온 마음으로,
내 운명을 다 바쳐서 사랑해야 하는 거잖아요. 사랑이란 건, 그런 거잖아요.
-197쪽
이튿날, 자기 집에서조차 쫓겨 나와야 했던 날의 아침에도 벚꽃이 마당에서 난분분 흩날리고 있었다. 바람이 훅 불어와 머리와 어깨에 벚꽃이 가득 내려앉았다. 열일곱 살 상처를 입은 여자아이는 벚꽃을 잔뜩 뒤집어쓰고도 아름답지 않았다. 이장의 말마따나 미친년 같아 보였을 뿐이다. 사실이기도 했을 것이다. 한여름이었으므로 벚꽃 같은 건 없었을 테니. 미친년 같아 보이든 아니든 미라가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만큼은 사실이었을 테니.
-244-245쪽
월간 『현대문학』이 펴내는 월간 <핀 소설>, 그 열세 번째 책!
<현대문학 핀 시리즈>는 당대 한국 문학의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첨예한 작가들을 선정, 월간 『현대문학』 지면에 선보이고 이것을 다시 단행본 발간으로 이어가는 프로젝트이다. 여기에 선보이는 단행본들은 개별 작품임과 동시에 여섯 명이 ‘한 시리즈’로 큐레이션된 것이다. 현대문학은 이 시리즈의 진지함이 ‘핀’이라는 단어의 섬세한 경쾌함과 아이러니하게 결합되기를 바란다.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은 월간 현대문학이 매월 내놓는 월간 핀이기도 하다. 매월 25일 발간할 예정이 후속 편들은 내로라하는 국내 최고 작가들의 신작을 정해진 날짜에 만나볼 수 있게 기획되어 있다. 한국 출판 사상 최초로 도입되는 일종의 ‘샐러리북’ 개념이다.
001부터 006은 1971년에서 1973년 사이 출생하고, 1990년 후반부터 2000년 사이 등단한, 현재 한국 소설의 든든한 허리를 담당하고 있는 작가들의 작품으로 꾸렸고, 007부터 012는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반 출생하고, 2000년대 중후반 등단한, 현재 한국 소설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의 작품으로 만들어졌다.
013부터 018은 지금의 한국문학의 발전을 이끈 중추적인 역할을 한 1960년대 출생 작가, 1980년대 등단한 작가들의 작품으로 이어질 예정이다.
발간되었거나 발간 예정되어 있는 책들은 아래와 같다.
001 편혜영 『죽은 자로 하여금』(2018년 4월 25일 발간)
002 박형서 『당신의 노후』(2018년 5월 25일 발간)
003 김경욱 『거울 보는 남자』(2018년 6월 25일 발간)
004 윤성희 『첫 문장』(2018년 7월 25일 발간)
005 이기호 『목양면 방화 사건 전말기』(2018년 8월 25일 발간)
006 정이현 『알지 못하는 모든 신들에게』(2018년 9월 25일 발간)
007 정용준 『유령』(2018년 10월 25일 발간)
008 김금희 『나의 사랑, 매기』(2018년 11월 25일 발간)
009 김성중 『이슬라』(2018년 12월 25일 발간)
010 손보미 『우연의 신』(2019년 1월 25일 발간)
011 백수린 『친애하고, 친애하는』(2019년 2월 25일 발간)
012 최은미 『어제는 봄』(2019년 3월 25일 발간)
013 김인숙 『벚꽃의 우주』(2019년 4월 25일 발간)
014 이혜경(근간)
015 임철우(근간)
016 최 윤(근간)
017 이승우(근간)
018 하성란(근간)
현대문학 × 아티스트 정희승
<현대문학 핀 시리즈>는 아티스트의 영혼이 깃든 표지 작업과 함께 하나의 특별한 예술작품으로 재구성된 독창적인 소설선, 즉 예술 선집이 되었다. 각 소설이 그 작품마다의 독특한 향기와 그윽한 예술적 매혹을 갖게 된 것은 바로 소설과 예술, 이 두 세계의 만남이 이루어낸 영혼의 조화로움 때문일 것이다.
정희승
1974년 서울 출생. 홍익대 회화과 졸업. 런던컬리지 오브 커뮤니케이션London College of
Communication 사진학과 학사와 석사과정 마침. 삼성미술관 리움, 서울시립미술관, 아트선재센터를 비롯한 국내와 뉴욕, 런던 등지에서 수차례 전시 개최. <송은미술대상 우수상> <박건희문화재단 다음작가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