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엇을 꿈꾸는가?
심사위원 만장일치를 끌어내며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한 서수진의 등단작 『코리안 티처』는 한국어학당에서 일어나는 네 명의 여성 시간 강사의 이야기를 담은 이 소설이다. 좁게 보면 오늘을 살아가는 비정규직 여성들의 이야기인 듯 보이나, 각 인물들이 봉착한 위기와 그 극복의 과정을 통해 “인간은 마땅히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라는 근원적 고민 앞에 독자들을 세운다는 평을 받았다. 서수진의 이번 신작 『유진과 데이브』 역시 좁게 보면 국적과 인종을 달리하는 두 연인의 사랑과 갈등을 둘러싼 이야기인 듯 보이나, 결국에는 ‘나답게 사는 것은 무엇인지’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존재론적 화두를 다시 한 번 독자들에게 던지고 있다.
한국에서 미술을 전공했으나 여러 번의 좌절을 경험하고 도망치듯 호주로 간 유진은 시드니의 한 펍에서 건축 프로젝트 매니저 데이브를 우연히 만난다. 처음 본 유진에게 담배를 얻어 피우며 데이브는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 왜 그걸 해야 하는지를 모르겠다는 선문답을 유진에게 던진다. 그날 이후 연인으로 발전한 유진과 데이브는 호주와 서울을 오가며 양가에 인정받는 사이가 되지만 인생의 중요한 결정 앞에서 여전히 의견차를 좁히지 못한다. 둘이 함께 정착한 호주의 최남단 섬 태즈메이니아에서 유진은 그림을 다시 그리며 새로운 삶을 꿈꾸지만 그녀에게 돌아오는 건 소외와 배제, 자기부정의 슬픔뿐이었다. 데이브의 여동생이 동성의 파트너와 결혼을 하던 날, 둘 사이의 갈등은 최고조을 향해 치닫고, “자신이 왜 우는지 도무지 알 수 없”고 “삶이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이유를 찾을 수 없”는 유진은 데이브에게 삶의 답을 찾아 떠나겠다 선언한다.
성장 배경과 과정이 다른 두 연인의 각자 다른 듯 닮은 고민과 그것을 풀어가는 과정을 통해 인간의 삶이 마땅히 추구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그 과정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찰을 하게 만드는 소설이다.
소설가에게 과녁을 정확히 그려달라는 요구는 사실 온당치 않으며, 반대로 그런 요구 앞에서 적당히 미끄러져나갈 수 있는 소설적 기법도 있다. 그러나 부사를 용납하지 않고 인물을 함부로 구원하지 않는 직설적인 작가는 얕은수를 쓰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우리뿐이잖아”라는 데이브의 하소연은 결연하지도, 낭만적이지도 않다. “정말 우리한테는 우리뿐인 거야? 그게 답이야?”라는 유진의 반문이 훨씬 더 단단하다. (장강명)
작가의 말
나는 호주인과 결혼했다. 이 책을 나와 남편의 연애 이야기로 읽을 독자들을 위해 몇 가지 항변을 적어둔다.
1. 내 남편은 내 눈에는 잘생겼지만 객관적으로 데이브처럼 수려하지 않다.
2. 나는 유진보다 성격이 더 지랄 맞다. 남편은 한동안 나를 앵그리 코리안이라고 불렀다.
3. 우리는 우산을 던지며 싸운 적은 있지만 밀치며 싸운 적은 없다.
4. 우리는 재정 분담을 한 적이 없다. 둘 다 돈 개념이 전혀 없다.
5. 나의 엄마는 게장을 만들 줄 모른다.
6. 남편에게는 여동생이 없다. 형이 있는데 게이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사랑하는 남편, 패트에게 바쳐져야 한다. 그가 나를, 내가 그를 사랑했던 시간이 이 소설을 낳았다는 것은 부정할 수가 없다.
고마워, 자기야.
앵그리 코리안이랑 같이 살아줘서.
2022년 봄
수진
표4
국적과 인종을 달리하는 두 연인의 사랑의 불가능성과
어떤 ‘그리기’에 관한 이야기
소설의 결말, 그녀가 보게 된 풍경은 어떤 것이었던가. 그녀의 눈에 비친 풍경은 처음부터 모두 뭉개져버린 풍경, 아무리 눈을 가늘게 떠봐도 “회색과 녹색, 파란색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을 뿐”(183쪽)인 풍경이었다. 나는 결코, 결국 이렇게 뭉개져버릴 것들이었다고, 돌고 돌아 환상에서 벗어나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뿐이라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이제 그녀의 그림이 시작되었다고 믿는 쪽에 가깝다. 데이브와 헤어지던 날,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의 눈에 비친 뭉개짐은 한때 그녀가 ‘본질’이라고 여겼던 뭉개짐과도 다르고, 또 한때 그녀가 건져 올릴 수 있다고 믿었던 식별 가능한 투명함과도 무관할 것이다. 나는 이제 그녀가 외상적 주체에서 벗어나 다른 방식으로 삶을 꾸려가길 바란다.
-이소, 「작품해설」 중에서
본문 중에서
* “도대체 사랑한다는 말은 언제 할 거야? 이럴 거면 연애는 해도 사랑하지는 않을 거라고 미리 말을 했어야지.”
그 농담은 흡사 마법의 주문과도 같았다. 데이브와 유진은 팽팽하게 맞서 싸우다가도 유진이 그 말을 하고 나면 같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자연스레 유진이 원하는 다음 단계로 넘어가고는 했다. 그렇게 둘은 알맞은 시기에 서로의 손을 잡게 되었고, 서로를 여자 친구와 남자 친구로 부르게 되었고, 전화를 끊을 때마다 사랑한다고 말하게 되었다. 그렇게 하기 싫다고 미리 말하지 않았으므로.
-59쪽
* 데이브는 여전히 그런 생각을 할까? 매일같이 길을 잃어버린 느낌에 사로잡히고, 도무지 답을 찾을 수 없어서 괴로울까?
유진과 데이브는 연인이 된 후에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데이브가 먼저 이야기하지 않았으므로 유진도 묻지 않았다. 사실 데이브가 그렇다고 대답할까봐 두려워서 묻지 못했다. 유진과 함께 밥을 먹으면서, 섹스를 하면서, 같이 잠을 자면서, 사랑한다는 말을 나누면서도 지금 뭘 하는 건지 생각할까봐. 자신을 괴롭혔던 일을 그만두고, 태어나고 자란 나라를 떠나 바다를 건너왔는데도, 그런데도 여전히 같은 생각에 시달릴까봐.
-102쪽
* “생각해봐, 사람들이 결혼을 왜 해? 같이 살려고 하는 거잖아. 엄마 말대로 한국에서는 결혼 안 하고 같이 살면 욕먹으니까. 근데 결혼 안 하고 같이 살면서 욕 안 먹으면 안 하는 게 훨씬 이득 아냐? 결혼으로 얻을 거는 다 얻고 귀찮은 의식이나 복잡한 신고 같은 건 안 하는 거지. 결혼식 그거 다 허례허식이야.”
“그래도 그게 아냐.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몰라.”
엄마는 그 말을 반복했다.
그래도 그게 아니다. 한국에서는 그게 아니다. 너는 호주에 가도 한국 사람이다. 한국 사람한테는 그게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게 아니다. 그날 엄마의 말은 유진의 머릿속에서 오랫동안 반복되었다.
-142-143쪽
* 그때의 유진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아름다운 집에서 자신을 향해 부드럽게 웃어 보이는 남자와 살게 될 미래를 그리지 않았다. 그와 자신의 사이에 흐르는 익숙하고 안정적인 공기에 대해서도 상상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은 선물처럼 주어진 행운이었다. 분명히 그랬다. 그런데도, 그렇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하루를 보내고도 침대에 누워 잠든 데이브를 바라보면 울고 싶어지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왜 다시 그때처럼 삶이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것 같은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146쪽
월간 『현대문학』이 펴내는 월간 <핀 소설>, 그 마흔 번째 책!
<현대문학 핀 시리즈>는 당대 한국 문학의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첨예한 작가들을 선정, 월간 『현대문학』 지면에 선보이고 이것을 다시 단행본 발간으로 이어가는 프로젝트이다. 여기에 선보이는 단행본들은 개별 작품임과 동시에 여섯 명이 ‘한 시리즈’로 큐레이션된 것이다. 현대문학은 이 시리즈의 진지함이 ‘핀’이라는 단어의 섬세한 경쾌함과 아이러니하게 결합되기를 바란다.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은 월간 『현대문학』이 매월 내놓는 월간 핀이기도 하다. 매월 25일 발간할 예정인 후속 편들은 내로라하는 국내 최고 작가들의 신작을 정해진 날짜에 만나볼 수 있게 기획되어 있다. 한국 출판 사상 최초로 도입되는 일종의 ‘샐러리북’ 개념이다.
001부터 006은 1971년에서 1973년 사이 출생하고, 1990년 후반부터 2000년 사이 등단한, 현재 한국 소설의 든든한 허리를 담당하고 있는 작가들의 작품으로 꾸렸고, 007부터 012는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반 출생하고, 2000년대 중후반 등단한, 현재 한국 소설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의 작품으로 만들어졌다.
013부터 018은 지금의 한국 문학의 발전을 이끈 중추적인 역할을 한 1950년대 중후반부터 1960년대 사이 출생 작가, 1980년대에서 1990년대 중반까지 등단한 작가들의 작품으로 꾸려졌으며, 019부터 024까지는 새로운 한국 문학의 역사를 써내려가고 있는 패기 있는 젊은 작가들의 작품으로 진행되었다.
세대별로 진행되던 핀 소설은 025~030에 들어서서는 장르소설이라는 특징 아래 묶여 출간되었고, 031~036은 절정의 문학을 꽃피우고 있는 1970년대 중후반 출생 작가들의 작품으로 꾸려졌다.
발간되었거나 발간 예정되어 있는 책들은 아래와 같다.
001 편혜영 『죽은 자로 하여금』(2018년 4월 25일 발간)
002 박형서 『당신의 노후』(2018년 5월 25일 발간)
003 김경욱 『거울 보는 남자』(2018년 6월 25일 발간)
004 윤성희 『첫 문장』(2018년 7월 25일 발간)
005 이기호 『목양면 방화 사건 전말기』(2018년 8월 25일 발간)
006 정이현 『알지 못하는 모든 신들에게』(2018년 9월 25일 발간)
007 정용준 『유령』(2018년 10월 25일 발간)
008 김금희 『나의 사랑, 매기』(2018년 11월 25일 발간)
009 김성중 『이슬라』(2018년 12월 25일 발간)
010 손보미 『우연의 신』(2019년 1월 25일 발간)
011 백수린 『친애하고, 친애하는』(2019년 2월 25일 발간)
012 최은미 『어제는 봄』(2019년 3월 25일 발간)
013 김인숙 『벚꽃의 우주』(2019년 4월 25일 발간)
014 이혜경 『기억의 습지』(2019년 5월 25일 발간)
015 임철우 『돌담에 속삭이는』(2019년 6월 25일 발간)
016 최 윤 『파랑대문』(2019년 7월 25일 발간)
017 이승우 『캉탕』(2019년 8월 25일 발간)
018 하성란 『크리스마스캐럴』(2019년 9월 25일 발간)
019 임 현 『당신과 다른 나』(2019년 10월 25일 발간)
020 정지돈 『야간 경비원의 일기』(2019년 11월 25일 발간)
021 박민정 『서독 이모』(2019년 12월 25일)
022 최정화 『메모리 익스체인지』(2020년 1월 25일)
023 김엄지 『폭죽무덤』(2020년 2월 25일)
024 김혜진 『불과 나의 자서전』(2020년 3월 25일)
025 이영도 『마트 이야기―시하와 칸타의 장』(2020년 4월 25일)
026 듀 나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었다』(2020년 5월 25일)
027 조 현 『나, 이페머러의 수호자』(2020년 6월 25일)
028 백민석 『플라스틱맨』(2020년 7월 25일)
029 김희선 『죽음이 너희를 갈라놓을 때까지』(2020년 8월 25일)
030 최제훈 『단지 살인마』(2020년 9월 25일)
031 정소현 『가해자들』 (2020년 10월 25일)
032 서유미 『우리가 잃어버린 것』 (2020년 12월 25일)
033 최진영 『내가 되는 꿈』 (2021년 2월 25일)
034 구병모 『바늘과 가죽의 시詩』 (2021년 4월 25일)
035 김미월 『일주일의 세계』 (2021년 6월 25일)
036 윤고은 『도서관 런웨이』 (2021년 8월 25일)
037 우다영 『북해에서』 (2021년 10월 25일)
038 김초엽 『므레모사』(2021년 12월 25일)
039 오한기 『산책하기 좋은 날』(2022년 2월 25일)
040 서수진 『유진과 데이브』(2022년 4월 25일)
041 한정현 근간
042 이주란 근간
043 천선란 근간
현대문학 × 아티스트 이동기
<현대문학 핀 시리즈>는 아티스트의 영혼이 깃든 표지 작업과 함께 하나의 특별한 예술작품으로 재구성된 독창적인 소설선, 즉 예술 선집이 되었다. 각 소설이 그 작품마다의 독특한 향기와 그윽한 예술적 매혹을 갖게 된 것은 바로 소설과 예술, 이 두 세계의 만남이 이루어낸 영혼의 조화로움 때문일 것이다.
이동기
한국 현대 미술에 만화 이미지를 본격적으로 도입했으며, 1993년에 창조한 캐릭터 ‘아토마우스’가 등장하는 일련의 현대 미술 작품들로 알려진 작가이다. 2000년대 세계 미술의 ‘네오 팝neo-pop’적 흐름을 예견한 그의 작품들은 현대 사회의 다양한 요소들을 다루고 있는데, 만화, 광고, 인터넷부터 고전 회화와 추상 미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각적, 문화적 요소 들을 통해 실재와 허구, 무거움과 가벼움, 물질과 정신, 동양과 서양 등 이질적 영역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암시하고 있다.
베를린의 마이클슐츠갤러리, 암스테르담의 윌렘커스 붐갤러리, 서울의 일민미술관 등에서 30여 회의 개인전을 가졌으며, 2011년 베니스비엔날레 부대전시 ‘퓨처 패스Future Pass’, 2005년 후쿠오카아시아미술관의 ‘애니메이트Animate’등의 전시에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