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중에서
* “란아.”
“어떡해?”
“찾아야지.”
“석이를?”
“응, 석이를.”
불가능할 것 같은 일에 매달리는 것. 출구 없는 불행에 몸을 던지고 보이지 않는 희망에 마음을 내맡기는 것. 그것이 내가 가장 잘하는 일이었다.
-12-13쪽
* 그때까지도 우린 전혀 몰랐다. 온종일 배가 침몰하는 과정을 생중계로 보며 처음 경험해보는 끔찍한 무력감을 느끼게 될 줄은. 나아가 배가 끝끝내 믿기지도 않게 침몰한 뒤 수많은 학생들이 다 신 돌아오지 못하게 될 거라고는. 그 한 주 동안 우 리는 간간이 설마, 사실일까, 아닐 거야를 각자 중얼거렸다.
-33쪽
* “얘들아, 누구를 섬긴다는 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얘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싶어 내가 잠시 고민하는 사이 혜란은 한국에 있는 애인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종이 주인을 섬기는 거지.”
“그래? 그것 말고 다른 건 없을까?”
나는 고민 끝에 조금 다른 대답을 내놓았다.
“뭔가를 단단히 받치고 있는 두 손이 떠올라.”
“두 손?”
“그러니까, 너희들이 신을 섬기듯이 말이야.”
-45쪽
* 우리는 함께 차를 마시는 자리에서 참 세상일이라는 게 신기하다고, 전혀 신을 믿지 않을 것만 같던 사람이 신을 믿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러자 석이가 건조하게 대답했다. 믿지 않고는 살 수 없었다고. 죽은 사람이 좋은 곳에 간다고 믿어야만 산 사람이 살 수 있는 거라고. 나는 그 말이 두고두고 가슴에 남았다
-93쪽
* 그 당시 우리는 상실을 다루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에 누구와도 그런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다. 다만, 그냥 서로에게 미안한 마음만을 꼭 쥔 채로 부디 그 사람의 마음이 크게 다치지 않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러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절실한 만큼 쉬쉬하기에 바빴다. 훗날의 관계를 위해서는 우리가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됐음을 그때는 몰랐다.
-110쪽
* 왜 산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의 흔적을 필사적으로 지우려고 할까. 또 어떤 죽음은 거룩하게 포장되고 어떤 죽음은 조용히 잊힌다. 그것이 과연 단순한 우연에 불과한 걸까? 나는 다시 한 번 내가 경험했던 그 거대한 상실을 떠올렸다. 엄마의 죽음. 나는 엄마의 죽음을 통해 갈라지고 쪼개지고 으깨지고 녹아내렸다.
상실은 극복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수많은 상실을 겪은 채 슬퍼하는 사람으로 평생을 살아가게 될 거고 그것은 나와 관계 맺은 이들에게까지 이어질 것이다
-112-113쪽
월간 『현대문학』이 펴내는 <핀 소설>, 그 쉰네 번째 책!
<현대문학 핀 시리즈>는 당대 한국 문학의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첨예한 작가들을 선정, 월간 『현대문학』 지면에 선보이고 이것을 다시 단행본 출간으로 이어가는 프로젝트이다. 여기에 선보이는 단행본들은 개별 작품임과 동시에 ‘한 시리즈’로 큐레이션된 것이다. 현대문학은 이 시리즈의 진지함이 ‘핀’이라는 단어의 섬세한 경쾌함과 아이러니하게 결합되기를 바란다.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은 월간 『현대문학』이 분기별 출간하는 것으로, 내로라하는 국내 최고 작가들의 신작을 정해진 날짜에 만나볼 수 있게 기획되어 있다.
출간되었거나 출간 예정되어 있는 책들은 아래와 같다.
001 편혜영 『죽은 자로 하여금』(2018년 4월 25일 출간)
002 박형서 『당신의 노후』(2018년 5월 25일 출간)
003 김경욱 『거울 보는 남자』(2018년 6월 25일 출간)
004 윤성희 『첫 문장』(2018년 7월 25일 출간)
005 이기호 『목양면 방화 사건 전말기』(2018년 8월 25일 출간)
006 정이현 『알지 못하는 모든 신들에게』(2018년 9월 25일 출간)
007 정용준 『유령』(2018년 10월 25일 출간)
008 김금희 『나의 사랑, 매기』(2018년 11월 25일 출간)
009 김성중 『이슬라』(2018년 12월 25일 출간)
010 손보미 『우연의 신』(2019년 1월 25일 출간)
011 백수린 『친애하고, 친애하는』(2019년 2월 25일 출간)
012 최은미 『어제는 봄』(2019년 3월 25일 출간)
013 김인숙 『벚꽃의 우주』(2019년 4월 25일 출간)
014 이혜경 『기억의 습지』(2019년 5월 25일 출간)
015 임철우 『돌담에 속삭이는』(2019년 6월 25일 출간)
016 최 윤 『파랑대문』(2019년 7월 25일 출간)
017 이승우 『캉탕』(2019년 8월 25일 출간)
018 하성란 『크리스마스캐럴』(2019년 9월 25일 출간)
019 임 현 『당신과 다른 나』(2019년 10월 25일 출간)
020 정지돈 『야간 경비원의 일기』(2019년 11월 25일 출간)
021 박민정 『서독 이모』(2019년 12월 25일)
022 최정화 『메모리 익스체인지』(2020년 1월 25일)
023 김엄지 『폭죽무덤』(2020년 2월 25일)
024 김혜진 『불과 나의 자서전』(2020년 3월 25일)
025 이영도 『마트 이야기―시하와 칸타의 장』(2020년 4월 25일)
026 듀 나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었다』(2020년 5월 25일)
027 조 현 『나, 이페머러의 수호자』(2020년 6월 25일)
028 백민석 『플라스틱맨』(2020년 7월 25일)
029 김희선 『죽음이 너희를 갈라놓을 때까지』(2020년 8월 25일)
030 최제훈 『단지 살인마』(2020년 9월 25일)
031 정소현 『가해자들』 (2020년 10월 25일)
032 서유미 『우리가 잃어버린 것』 (2020년 12월 25일)
033 최진영 『내가 되는 꿈』 (2021년 2월 25일)
034 구병모 『바늘과 가죽의 시詩』 (2021년 4월 25일)
035 김미월 『일주일의 세계』 (2021년 6월 25일)
036 윤고은 『도서관 런웨이』 (2021년 8월 25일)
037 우다영 『북해에서』 (2021년 10월 25일)
038 김초엽 『므레모사』(2021년 12월 25일)
039 오한기 『산책하기 좋은 날』(2022년 2월 25일)
040 서수진 『유진과 데이브』(2022년 4월 25일)
041 한정현 『마고麻姑―미군정기 윤박 교수 살해 사건에 얽힌 세 명의 여성 용의자』(2022년 6월 25일)
042 이주란 『어느 날의 나』(2022년 8월 25일)
043 천선란 『랑과 나의 사막』(2022년 10월 25일)
044 이서수 『몸과 여자들』(2022년 12월 25일)
045 천희란 『K의 장례』(2023년 2월 25일)
046 문진영 『딩』(2023년 4월 25일)
047 임솔아 『짐승처럼』(2023년 6월 25일)
048 강화길 『풀업』(2023년 8월 25일)
049 김지연 『태초의 냄새』(2023년 10월 25일)
050 이장욱 『뜨거운 유월의 바다와 중독자들』(2024년 1월 25일)
051 김 솔 『행간을 걷다』(2024년 4월 25일)
052 김멜라 『환희의 책』(2024년 7월 25일)
053 안보윤 『세상 모든 곳의 전수미』(2024년 10월 25일)
054 예소연 『영원에 빚을 져서』(2025년 1월 25일)
055 박지영(근간)
056 위수정(근간)
현대문학 × 아티스트 윤석남
<현대문학 핀 시리즈>는 아티스트의 영혼이 깃든 표지 작업과 함께 하나의 특별한 예술작품으로 재구성된 독창적인 소설선, 즉 예술 선집이 되었다. 각 소설이 그 작품마다의 독특한 향기와 그윽한 예술적 매혹을 갖게 된 것은 바로 소설과 예술, 이 두 세계의 만남이 이루어낸 영혼의 조화로움 때문일 것이다.
윤석남
1939년 만주에서 태어나 성균관대 영문과를 중퇴하고, 프랫 인스티튜트 1년 과정과 아트 스튜던트 리그 오브 뉴욕을 수료했다. 한국 여성주의 미술을 개척했으며, 회화, 설치, 조각에 이르기까지 자신만의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이루었다. 서울, 베니스, 뉴욕, 토리노, 시드니, 상하이 등에서 다수의 개인전과 그룹전을 가졌으며, 영국 테이트갤러리, 서울 88올림픽공원,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호주 퀸즈랜드 아트 갤러리, 일본 후쿠오카미술관 등 국내외 주요 미술 기관에서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이중섭미술상〉 〈국무총리상〉 〈김세중 조각상〉 〈이인성 미술상〉 등을 수상했으며, 〈국민훈장모란장〉을 수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