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를 졸업하고 1년 후, 대학원에 지원했다. 교수들은 학부 시절 반항을 일삼던 내가 의외라는 듯한 반응을 보였지만 별 이견 없이 합격시켜주었다. 적을 두기로 결심하고 나서도 차마 등록금을 현금으로 낼 수는 없어서 여기저기 자리를 얻어 근로장학생이 되었다. (……) 그러느라 선배들과의 세미나에 낄 수 없었고 소설을 쓸 시간조차 나지 않았다. 수업이 끝나고 구내 카페에서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는 대학원생들을 보면 위화감이 들었다. 선배들은 근로장학생은 학교의 히스패닉이라며, 그들이 없으면 대학원 사회는 움직이지 않는다고 위로와 놀림을 번갈아 입에 올렸다. 나는 살면서 가난이라는 것을 체감해본 적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순전히 대학원생이 되었다는 까닭만으로 가난해져야 했다.
이모처럼 독문과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어린 시절에는 내내, 내가 만약 장편소설을 쓴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클라우스에 관한 이야기일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는 입양된 한국계 독일인이었고 지금은 없어진 동독, DDR에서 유년과 청년 시절을 보내고
통일 후 대학에 임용되었으며 한국인 유학생 출신인 이모를 만나 결혼했다. 그리고 2년의 시간이 흐른 후 실종되었다. 그 인생 자체가 나에게는 드라마투르기로 느껴졌고, 또래들 중 이런 인생을 간접 경험한 사람은 아마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내가 만약 등단한 소설가가 아니었다면 최 교수의 신임을 받을 수 있었을까? 최 교수 자신이 한때 희곡을 습작하던 문청이 아니었다면 내게 관심이라도 가졌을까? 최 교수는 나를 연구자 제자로 인정한 게 아니라 자신이 과거에 저버린 문청의 환영으로 여기고 있는 건 아닐까?
나도 아내와 독일 유학 중 만났단다. 내 아내는 유학생이 아니었고, 노동자였지. 내가 가장 비참하던 시절에 만났다. 나는 오랫동안 내 아내가 노동자였다는 사실에 나의 진정성을 투사하려 애썼단다. 그러니까 가장 비참한 시절에 만난 가난한 여성 노동자를 사랑했다는 사실에. 그러나 살다 보니 한 사람을 영원히 사랑한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도 깨달았단다. 아직 헤어지지 않은 우리 부부는 그래. 그렇지만 경희는 그 사람을 하루도 빠짐없이 지금까지 영원히 사랑하고 있단다.
도서관에 앉아 있다 불쑥불쑥 지난 논문심사 현장이 생각났다. 장 교수의 말이 떠오르면 펜을 부러질 듯 쥐었고, 소설을 쓴다는 것이 마치 키를 쓰고 있는 오줌싸개로 보였으리라는 사실을 덤덤히 인정해야 했다. 왜 대다수의 사람들이 창작을 경멸하거나 창작을 궁정풍 사랑하듯 숭배하는 것일까, 란 새삼스러운 고민에 빠지기도 했고 최 교수와 이모에게 창작이란 뭐였을까, 궁금해지기도 했다.
내가 클라우스와 이모의 이야기를 비로소 완전히 그만두게 되었던 것은, 소설집 발간을 목전에 두었을 때였다. 오랫동안 써보고자 했던 클라우스의 이야기는 김도 쐬지 않은 단편소설들을 엮으면서 앞으로도 영영 그들의 이야기를 감히 소설로 쓸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나는 여러 버전의 클라우스 이야기를 외장하드에 저장해두었다. ‘세상이 모르는 소설들’이라는 제목을 달아서. 그런 행동이 겸연쩍어 나는 외장하드를 서랍 깊숙한 곳에 넣어두었고 다시 꺼내보지 않았다.
월간 『현대문학』이 펴내는 월간 <핀 소설>, 그 스물한 번째 책!
<현대문학 핀 시리즈>는 당대 한국 문학의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첨예한 작가들을 선정, 월간 『현대문학』 지면에 선보이고 이것을 다시 단행본 발간으로 이어가는 프로젝트이다. 여기에 선보이는 단행본들은 개별 작품임과 동시에 여섯 명이 ‘한 시리즈’로 큐레이션된 것이다. 현대문학은 이 시리즈의 진지함이 ‘핀’이라는 단어의 섬세한 경쾌함과 아이러니하게 결합되기를 바란다.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은 월간 현대문학이 매월 내놓는 월간 핀이기도 하다. 매월 25일 발간할 예정이 후속 편들은 내로라하는 국내 최고 작가들의 신작을 정해진 날짜에 만나볼 수 있게 기획되어 있다. 한국 출판 사상 최초로 도입되는 일종의 ‘샐러리북’ 개념이다.
001부터 006은 1971년에서 1973년 사이 출생하고, 1990년 후반부터 2000년 사이 등단한, 현재 한국 소설의 든든한 허리를 담당하고 있는 작가들의 작품으로 꾸렸고, 007부터 012는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반 출생하고, 2000년대 중후반 등단한, 현재 한국 소설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의 작품으로 만들어졌다.
013부터 018은 지금의 한국문학의 발전을 이끈 중추적인 역할을 한 1950년대 중후반부터 1960년대 사이 출생 작가, 1980년대에서 1990년대 중반까지 등단한 작가들의 작품으로 꾸려졌으며, 019부터 024까지는 새로운 한국문학의 역사를 써내려가고 있는 패기 있는 젊은 작가들의 작품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발간되었거나 발간 예정되어 있는 책들은 아래와 같다.
001 편혜영 『죽은 자로 하여금』(2018년 4월 25일 발간)
002 박형서 『당신의 노후』(2018년 5월 25일 발간)
003 김경욱 『거울 보는 남자』(2018년 6월 25일 발간)
004 윤성희 『첫 문장』(2018년 7월 25일 발간)
005 이기호 『목양면 방화 사건 전말기』(2018년 8월 25일 발간)
006 정이현 『알지 못하는 모든 신들에게』(2018년 9월 25일 발간)
007 정용준 『유령』(2018년 10월 25일 발간)
008 김금희 『나의 사랑, 매기』(2018년 11월 25일 발간)
009 김성중 『이슬라』(2018년 12월 25일 발간)
010 손보미 『우연의 신』(2019년 1월 25일 발간)
011 백수린 『친애하고, 친애하는』(2019년 2월 25일 발간)
012 최은미 『어제는 봄』(2019년 3월 25일 발간)
013 김인숙 『벚꽃의 우주』(2019년 4월 25일 발간)
014 이혜경 『기억의 습지』(2019년 5월 25일 발간)
015 임철우 『돌담에 속삭이는』(2019년 6월 25일 발간)
016 최 윤 『파랑대문』(2019년 7월 25일 발간)
017 이승우 『캉탕』(2019년 8월 25일 발간)
018 하성란 『크리스마스캐럴』(2019년 9월 25일 발간)
019 임 현 『당신과 다른 나』(2019년 10월 25일 발간)
020 정지돈 『야간 경비원의 일기』(2019년 11월 25일 발간)
021 박민정 『서독 이모』(2019년 12월 25일)
022 최정화(근간)
023 김엄지(근간)
024 김혜진(근간)
025 조 현(근간)
026 듀 나(근간)
027 이영도(근간)
028 백민석(근간)
029 김희선(근간)
030 최제훈(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