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와 환상문학의 경계에서 그리는 화성의 신화,
화성에서 바라보는 지구 연대기
『화성 연대기』는 화성 원주민과 화성 탐사에 나선 지구 원정대, 그리고 화성으로 이주하여 정착한 이들의 사연이 시간순으로 나열되는 일련의 단막극이다. 예술에 대한 검열과 인종차별, 핵전쟁의 위협이 도사리는 지구를 떠나서 기회와 개척의 땅인 화성으로 향한 이들의 여정에 현대 사회의 문제를 신랄하게 투영하는 이 작품은, 작가 특유의 애수 어린 필치와 유머를 통해 진지한 문학성과 현재성을 성취해 냈다.
브래드버리 이전에도 대중문화와 SF에서 화성을 다룬 이야기들은 있었으나, 브래드버리처럼 화성을 묘사한 작품은 전무후무하다. 브래드버리의 화성은 찬란한 고대 문명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황량한 파란 사막이 되기 전 와인 나무의 녹색 술이 가득 차 있었던 고대의 운하에서 화성인들은 이제 모래 위를 항해하는 함선을 타고 다니며, 글자를 쓸어내리면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책을 읽는다. 이처럼 신비롭고 낯선 문명을 간직한 화성의 원주민들은 그때까지의 SF에서와 달리 단순히 두려운 존재 내지 정복해야 할 대상에 머무르지 않는다. 브래드버리는 이 작품에서 지구인과 화성인 양측의 관점에서 서로를 바라보게 함으로써, 만약 인류가 외계 문명과 만난다면 그들에게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보이는가 하는 자기성찰을 바탕에 둔다. 우주 개척의 꿈이 부풀어 오르던 시대에 근대적인 계몽주의, 제국주의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그는 앞으로 인류가 나아갈 길, 그리고 인간 존재와 지구라는 행성의 사회를 새롭게 들여다보는 관점을 제시한다.
『화성 연대기』가 발표된 1950년은 양차 대전을 겪은 후 냉전에 돌입한 시기이자, 인류가 발전시킨 기술 문명이 자연환경을 황폐화시키는 것을 체감하기 시작한 때였다. 『화성 연대기』는 이질적인 두 문명이 만났을 때, 필연적인 파괴와 혼돈 뒤에 한쪽이 승리할지라도 결국 영원한 승자는 없었던 인류의 과거를 비추어 주는 거울 같은 텍스트이기도 하다. 핵무기를 보유한 지구 인류와, 타인의 생각을 읽고 조종하는 정신 감응력을 지닌 화성 원주민의 조우 이후, 최후에 오로지 광막한 시간만이 남은 행성이 안기는 고독과 공포를 통해서 『화성 연대기』는 인류가 지금 걸어가는 길이 어떠한 결과를 불러올지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던짐과 함께 경종을 울린다.
“세 살의 내 앞에 등장한 무덤에서 일어난 투탕카멘처럼, 여섯 살의 나를 사로잡은 북구 서사시처럼, 열 살의 내가 흠뻑 빠졌던 로마와 그리스의 신들처럼, 이 책은 순수한 신화다.”
_레이 브래드버리
장르문학과 순문학의 벽을 허문 모던클래식,
『화성 연대기』가 남긴 유산들
『화성 연대기』는 문학사적으로뿐 아니라 저자인 브래드버리에게도 뜻깊은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그에게 처음으로 높은 명성을 안겨 준 저작이자, 이전까지 몇 편의 호러, 환상소설을 출간했던 브래드버리의 문학 세계를 획기적으로 확장해 준 시발점이었다.
『화성 연대기』는 주류 문단이 최초로 진지하게 비평하면서 인정한 작품으로, 향후 SF 문학의 입지를 끌어올리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한편으로, 당시의 SF계 일각에서는 『화성 연대기』에서 내보이는 기계에 대한 관심은 상징적이고 미학적인 측면으로 제한된다면서 SF가 아니라고 혹평하였지만, 시간이 지나자 브래드버리의 세계는 SF 문학사에서 어느 누구와도 닮지 않은 독자적인 계보를 구축했다고 평가받았다. 더불어 오래도록 베스트셀러로 군림하면서 장르문학과 순문학으로 철저히 구별되어 있던 두 영역을 융합한 덕분에, 20세기 후반 커트 보니것에서부터 J. G. 밸러드, 스티븐 킹에 이르는 장르 초월 작가들의 작품이 두루 인정받는 데 공헌을 했다.
『화성 연대기』가 품고 있는 짙은 향수와 자연을 향한 그리움, 고딕풍 공포는 기술의 진보가 무한하고 유익하다는 낙관적인 환상 뒤에 드리운 인간 소외와 환경 파괴라는 그림자를 드러낸다. 과학만능주의와 물질문명에 대한 비판 정신 때문인지 『화성 연대기』는 당시 서방세계 문학 작품의 유입이 어려웠던 소련 등 공산권에서까지 널리 읽히게 됐다.
◆『화성 연대기』 2020년 한국어판의 특징
『화성 연대기』 2020년 한국어판에는 총 28개의 에피소드가 실려 있으며, 이는 지금까지 ‘화성 연대기’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모든 에피소드를 망라한 것이다.
일생 300여 편의 단편소설을 남기면서 ‘단편의 제왕’이라고 불린 브래드버리는 유사한 흐름을 공유하는 단편들을 엮어 하나의 이야기로 만드는 이른바 ‘픽스업Fix-up’ 소설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는데, 『화성 연대기』 역시 바로 그의 픽스업 소설의 하나였다. 수많은 단편들 가운데서 선택과 개작을 거쳐 탄생한 이 작품은, 1950년 미국 더블데이 초판에는 26개의 에피소드가 수록되어 있었지만, 70년의 시간을 견디며 전해지는 동안 기획 의도에 따라서 새로운 단편이 추가되거나 삭제되는 등 자연스럽게 여러 판본이 생겨났다. 또한 1997년에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작중의 배경 연도를 31년씩 뒤로 미룬 개정판이 에이번 출판사에서 출간되기도 했지만, 현재 영미권에서는 배경 연도가 1999년부터 시작되는 초판본과 2030년부터 시작되는 개정판이 모두 유통되고 있다. 2020 한국어판에서는 1999년 1월부터 2026년 10월까지의 배경 연도를 택했다.
한편, 우리나라에서 『화성 연대기』는 1980년 일어 중역본으로 처음 소개됐고, 이후 1987년, 1990년에 재발행되었는데 당시에는 10편의 에피소드만이 실렸다. 2010년에 샘터 출판사에서 원서 초판본을 따라서 26편이 실린 『화성 연대기』를 발행하였고, 10년 만에 현대문학에서 새로운 번역과 구성으로 단장한 완전판 『화성 연대기』를 국내 독자들에게 선보인다.
◆ 레이 브래드버리 탄생 100주년 기념 이벤트들
브래드버리는 “도서관이 나를 키웠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도서관에 애정과 존경을 바친 작가였다. 그에 응답하듯이, 올해 미국 전역의 도서관들에서는 브래드버리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다채로운 행사들을 마련했다. 온라인 라이브로 작가와 독자들이 함께 브래드버리의 작품을 다시 읽었고, 사우스패서디나 도서관은 그 작품들의 주요 장면을 묘사한 스테인드글라스를 만들어 도서관 내부에 장식했다. 작가의 고향인 일리노이주 워키건은 도서관에 그의 기념상을 세우고, 브래드버리 체험 박물관을 개장했다. 올해 샌디에이코 코믹콘의 기념품 책 주인공도 레이 브래드버리였다.
세계 3대 도서전 가운데 과달라하라국제도서전은 4월 23일 책의 날에 기발한 이벤트를 열기도 했는데, 바로 올해 탄생 100주년을 함께 맞이한 SF의 거장 아이작 아시모프의 『파운데이션』과 브래드버리의 『화성 연대기』 중 하나를 택하는 공개 투표를 진행해, 더 많은 득표수를 얻은 책을 책의 날에 공개 낭독하기로 한 것. 총 36,202명이 참여한 투표의 승자는, 『화성 연대기』였다(『화성 연대기』는 18,514표(51.14%), 『파운데이션』은 17,688표(48.86%)를 얻었다).
■ 『화성 연대기』에 대한 찬사
이 책을 덮으면서 나는 자문해 본다. 이 일리노이 출신의 남자는 대체 무슨 일을 저지른 것인가? 어떻게 다른 행성의 정복을 그리는 일련의 단막극으로 내 마음을 공포와 고독으로 가득 채울 수 있단 말인가? 이런 환상의 산물이 어떻게 내 감정의 가장 내밀한 곳을 건드릴 수 있을까?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서문」에서
『화성 연대기』는 언어가 진정으로 이룩할 수 있는 경지를 내게 보여 주었다. 마법을 선사한 셈이다. -존 스칼지, 「서문」에서
나는 10대 시절에 레이 브래드버리를 읽고 그 이야기들에 흠뻑 빠져들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나를 사로잡은 것은 『화성 연대기』 속 「화성인」을 비롯한 에피소드들과 『화씨 451』이었다. 어떤 작가들은 우리가 흔히 ‘심오한 메타포deep metaphor’라 부를 수 있는 신화적인 수준으로 곧장 뛰어올라 글을 쓰는데, 바로 이 이야기들이 그렇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브래드버리 작품은? 아마도 『화성 연대기』일 것이다. -마거릿 애트우드
정석적인 과학소설 주제와 인간의 내밀한 감성을 결합한 극소수의 과학소설이 있다. 그중 하나는 『화성 연대기』다. -칼 세이건(과학자)
브래드버리의 글은 시적이고 그저 아름다울 따름이다. 『화성 연대기』 초판은 1950년에 출간됐지만, 내 생각엔 오늘에 읽기 완벽한 책이다. -제임스 반 펠트(소설가)
브래드버리는 나의 유년 시절에서 경이로운 일부였다. 나는 셀 수 없는 시간을 『화성 연대기』를 읽고 또 읽는 데 보내곤 했다. -플리(레드핫칠리페퍼스 베이시스트)
브래드버리의 이야기는 공포스럽고 혼란스럽고 지적이며 서정적인, 하나의 미美이다. 『화성 연대기』는 바로 그 정상에 있는 작품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보르헤스가 「서문」에서 썼듯이, 브래드버리는 『화성 연대기』에서 자신의 길고 공허한 일요일을, 미국의 권태를, 고독을 드러내 보인다. -마리아나 엔리케스(소설가)
레이 브래드버리의 『화성 연대기』는 단연코 최고의 작품이자 진정한 모던클래식이다.
-《워싱턴 포스트》
『화성 연대기』의 통렬한 역설은 냉혹하고도 충격적이다. -《가디언》
출간된 지 반세기가 지났어도 『화성 연대기』는 탁월한 감각과 풍부한 감정을 전한다. 숨 막히는 듯한 섬세한 언어 감각과 새로운 희망을 느낄 수 있다. -《멤피스 커머셜 어필》
시적이고 아름다운 판타지의 진수. -《포틀랜드 오레고니언》
수많은 책과 영화에서 화성을 향한 여행을 다루었지만, 『화성 연대기』는 그 가운데서도 최고의 작품이다. -《오마하 월드헤럴드》
브래드버리의 작품 중에서도 『화성 연대기』는 단연 최고다. 정교하게 쓰여진 이 작품을 읽고 나면, 실제로 화성의 제1식민지에 착륙한 듯한 기분에 휩싸일 것이다. -《앵커리지 데일리 뉴스》
■ 책 속으로
대장은 고개를 저었다. “이곳에 증오는 없네.” 그는 바람에 귀를 기울이며 말을 이었다. “저들의 도시를 보면 우아하고, 아름답고, 사색적인 종족이 분명하지 않나. 자신들에게 닥친 운명을 받아들였을 걸세. 좌절에 빠져 전쟁을 일으켜서 자기네 도시를 난장판으로 만드는 일 없이 종족의 사멸을 받아들였다는 정도는 우리도 알고 있지 않은가. 지금껏 우리가 살펴본 모든 도시는 흠집 하나 없이 온전했으니 말일세.
(…) 여기 이 모든 것들을 둘러보면, 누구나 우리가 그리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는 점을 깨닫게 되는 거라네. 우리는 정신없이 뛰노는 애들일 뿐이야. 장난감 로켓과 원자탄을 손에 들고 큰 소리로 떠들며 활기차게 돌아다니는 거지. 그러나 언젠가 지구도 오늘날의 화성처럼 변할 걸세. 이 풍경을 보면 정신이 들 테니까. 문명의 형태로 실례가 눈앞에 펼쳐져 있으니까. 우리도 화성을 보고 배우게 될 걸세.” _124쪽, 「2001년 6월, 달이 변함없이 밝게 비출지라도」에서
로켓의 불길이 황량한 초원을 달구었다. 바위는 용암이 되고, 목재는 숯이 되고, 물은 증기로 변하고, 모래와 규사는 녹색 유리로 굳어 사방에서 벌어지는 침공의 장면을 깨진 거울처럼 비추었다. 수많은 로켓이 밤하늘에 울리는 북소리처럼 정적을 부수며 날아들었다. 수많은 로켓이 메뚜기처럼 떼 지어 장밋빛 폭연을 가득 내뿜으며 내려앉았다. 수많은 로켓에서 손에 망치를 든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 이 기묘한 세계에 깃든 모든 기묘함을 두들겨 부수고 자기네 눈에 익은 모습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 6개월이 지나자 이 벌거벗은 행성에는 지글거리는 네온관과 노란 전구로 가득한 열두 개의 작은 도시가 생겨났다. 전부 합쳐 9만여 명의 사람들이 화성에 찾아왔다. 그리고 지구에서는 더 많은 사람이 가방을 꾸리고 있었다…… _167∼168쪽, 「2002년 2월, 메뚜기 떼」에서
“너 몸이 투명하잖아!” 토마스가 말했다.
“네 몸도 투명한데!” 화성인이 한 발짝 물러서며 말했다.
토마스는 자신의 몸을 더듬거리며 온기를 느끼고는 안심했다. 자신은 현실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화성인은 자신의 코와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나는 육신이 있어. 살아 있다고.” 그리고 반쯤 소리 내어 이렇게 말했다.
토마스는 낯선 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내가 현실이라면, 너는 죽은 사람이 분명하지.”
“아냐, 그건 너지!”
“유령이잖아!”
“환영이면서!”
둘은 단검과 고드름과 반딧불처럼 별빛에 타오르는 사지를 휘두르며 서로에게 손가락질을 하다가, 문득 다시 자신의 사지를 더듬으며 그 존재를 확인했다.
(…) 둘은 그렇게 고대의 고속도로 위에 서 있었다. 양쪽 모두 움직임을 멈춘 채로. _176쪽, 「한밤의 만남」에서
톰은 눈을 감은 채로 누워 있었다. 잠들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노인은 그를 계속 바라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우리만큼이나 사랑을 갈구하는 이 아이는 대체 어떤 존재일까? 그 정체는 무엇이며, 무슨 이유에서 외로움에 사로잡혀 외계인의 거처로 다가오는 것일까? 어째서 우리 기억 속의 목소리와 얼굴로 자신을 치장하고, 우리와 함께 거닐면서 받아들여지고 행복해지려 애쓰는 것일까? 지구에서 로켓이 도착했을 때, 이 행성의 주민들은 어디에 있었을까? 어느 산속에, 어느 동굴에, 얼마나 많은 최후의 생존자들이 살아남아 있던 것일까?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알 길이 없었다. 이 아이는 어딜 봐도 톰이었으니까. _302쪽, 「2005년 9월, 화성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