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사회의 다양한 스펙트럼에서 만나는 새로운 역사!
『일요일의 역사가』는 그동안 전문 학술 분야뿐만 아니라 문화사와 인류사에 이르기까지 대중 교양 역사서 집필에도 힘을 쏟아온 주경철 교수(서울대 서양사학과)가 문학을 통해 읽은 역사, 역사를 통해 읽은 문학 이야기로서 총체적인 문화사이다. 생생한 역사적 장면들에 신화와 고전소설, 영화 등 풍부한 예술 텍스트들을 곁들여 읽고 보는 재미를 더한 이 책은, 문학 예술의 텍스트들과 역사학의 중요한 성과들을 연결하여 “히스토리history 역시 스토리story의 일종”이라는 명쾌한 해석을 다각도에서 살펴볼 수 있게 하는 이야기의 집대성이다.
에우리피데스부터 카사노바, 홀로코스트에 대한 비판적 성찰까지
『일요일의 역사가』는 총 열한 편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부터 제2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를 시대별로 배열하고, 역사와 문학을 교차해서 읽으며 인류와 문명에 대해 다양한 접근을 시도한다. 각 장에 등장하는 수십 편의 다양한 문학작품들과 예술 텍스트들은 저자가 들려주는 풍부한 역사적 맥락과 맞물리며 성찰의 메시지를 남긴다.
미시사적인 관점으로 인간의 어두운 심연의 밑바닥까지 훑어보는 저자의 꼼꼼한 시선을 따라가는 여정은 지나간 역사에서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한 철학적 반성이 동반된, 인간에 대한 진지한 탐구에 다름 아닐 것이다.
01 신의 무지amathia 인간의 체념諦念 : 에우리피데스의 『바카이』
고대 그리스의 비극 작가 에우리피데스의 마지막 작품 『바카이』는 세기를 넘어 오늘에까지도 깊은 교훈과 영감을 주는, 그 시대가 당면했던 불평등과 억압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02 이븐 바투타의 주유천하周遊天下 : 이슬람 초超문명권
14세기 모로코 왕궁 출신의 여행자 ‘이븐 바투타’가 남긴 광대무변한 여행기에서 거대한 이슬람권 세계가 성립하고 발전된 과정을 흥미롭게 살필 수 있다.
03 광기에 찬 차르 : 이반 뇌제의 러시아 만들기
잔혹한 통치자였던 러시아의 이반 뇌제를 다룬 영화 「폭군 이반」이 오랫동안 러시아에서 개봉되지 못한 연유는 무엇이었는지, 미스터리로 가득 찬 이반 뇌제의 행적과 그가 남긴 러시아의 역사적 그림자에 대해서 날카롭게 추적해본다.
04 신은 목마르다 : 아스테카 제의와 기독교의 만남
아스테카 문명의 인신 희생 제의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과달루페의 성모’로 대변되는 멕시코의 독특한 기독교 문화에 대한 설명은 우리와 다른 문명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준다.
05 치즈와 구더기 : 큰 세상을 작게 보기
중세의 베스트셀러들을 두루 섭렵한 이탈리아 산골 마을의 기인 메노키오를 통해 발견되는 작고 섬세한, 그러나 역사의 한 지점을 구성했던 현장을 돌아본다.
06 마녀에게 가하는 망치 : 악惡의 고전
15세기에 출판된 마녀에 대한 개념서 『말레우스 말레피카룸』이 악의 고전으로 자리 잡게 된 배경과 거기에 깔린 문명의 어둠을 파헤쳐본다.
07 바타비아 : 유럽 문명의 무덤
인간 심성의 밑바닥에 존재하는 공포와 야만을 확인하게 해주는 바타비아호 좌초 사건은 『로빈슨 크루소』 『파리대왕』과 교차해 읽히면서 세계로 팽창해가던 근대 유럽 문명의 야만적이고 사악했던 이면을 여실히 보여준다.
08 카사노바 : 계몽주의 시대의 사랑의 철학자
소설 속에 등장하는 희대의 바람둥이 돈 후안과, 한 시대를 몸으로 관통하는 행동가의 삶을 살면서 문필가로 생을 마친 계몽주의 시대의 자유인 카사노바, 그 둘의 이질적인 사랑의 철학을 대조했다.
09 고양이와 여인 : 근대 유럽의 저항 문화
16세기의 화가 피터르 브뤼헐의 그림 「악녀 그리트」를 통해 엿볼 수 있는 역사의 현장에서 질서의 전복을 나타내는 18세기 ‘고양이 대학살 사건’이 폭로하는 근대 사회의 억압적 문화와 저항 문화를 조명했다.
10 문명의 어두운 빛 : 아프리카와 서구의 조우
대서양에서 인도양까지 아프리카 대륙을 횡단한 최초의 유럽인 리빙스턴, 그리고 그를 추적한 기자 스탠리, 식민지 팽창에 힘을 쏟은 벨기에의 국왕 레오폴드와 콩고의 비극. 조셉 콘래드의 소설 『암흑의 핵심』에서 읽어내는 제국주의적 팽창이 내세운 인간 진보 계획 이면에 숨어 있던 탐욕과 악행을 들여다본다.
11 밤과 안개 : 홀로코스트 · 이미지 · 기억
현대사의 치부이자 살아남은 자들을 가장 고통스럽게 한 역사적 사건 중 하나인 홀로코스트를 다룬 세 영화 「쉰들러 리스트」와 「쇼아」 「밤과 안개」에 대한 분석은 우리에게‘역사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라는 쉽지 않은 물음과 함께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삶의 문제를 던진다.
■ 본문에서
세상만사가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불교에서는 ‘인드라의 그물망’으로 표현한다. 인드라가 이 세상을 창조할 때 모든 만물이 서로 엮인 하나의 그물처럼 만들었는데, 그 그물의 매듭 하나하나마다 진주가 꿰여 있다. 그 진주는 현재 존재하거나 과거에 존재했던 모든 것,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개념들을 나타낸다. 모든 진주는 다른 모든 진주와 연결되어 있고, 또 모든 진주의 표면에 는 다른 모든 진주의 모습이 반영되어 있다. 그렇게 세상 만물은 다른 만물을 비추고 있다.
역사와 문학이 공들여 빚어서 제시하는 이야기도 그런 것이 아닐까. 머나먼 과거로부터 오늘 우리에게까지 존재 의 사슬이 이어져 있다. 과거의 어느 작은 사건 하나라도 우리와 무관치 않고, 오늘 우리의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지난 시대 인류의 정신과 통한다. 작은 구슬 하나에 인류의 지나온 삶의 흔적들이 아롱거리며 빛나고 있다. 말하자면 이런 마음으로 열한 개의 구슬을 모아보았다.
―pp. 8~9.
거시사는 이 세상의 큰 줄기를 과학적으로 파악하여 전체적인 세계상을 제시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을 설명하는 모델을 구축하는 것이다. 인간과 사회의 여러 측면들을 연구하고 그렇게 얻은 성과들을 재료로 삼아 하나의 큰 구조물을 만드는 방식이다. 거시사는 세계의 큰 흐름을 짚어주는 미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망원경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이 세상을 다 이해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인간의 삶은 통계분석과 거대서사 속에 편입될 정도로 기계적이지 않으며, 이 세상은 법칙으로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불확실하다. 우리 주변에서 자주 보듯, 세상에는 정신이 이상한 인간들, 폭력적인 인간들, 성질 고약한 인간들이 넘쳐난다.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선량하게 살아갔다면 이 세상은 벌써 지상천국이 되었을 테지만, 인간은 그런 존재가 아니다. 그러니 차라리 생각을 바꿔 우리가 바라보는 역사의 틀을 확 좁혀서 정밀하게 읽어보는 것도 한 방법이다. 누이의 수틀을 보듯 그렇게 앵글을 좁히고 보면 거기에 또 다른 종류의 미세한 우주가 나타난다. 이제 하나의 작은 사건, 괴팍한 한 인간, 조그마한 어느 마을처럼 복합적이고 다면적이고도 심층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대상이 떠오를 것이다.
―pp. 140~141.
1580년대에 유행한 마녀 및 마술에 관한 총서들을 보면 대개 제1권의 자리는 『말레우스 말레피카룸』이 차지하고 있다. 이 책은 마녀에 관해서는 누구든지 준거로 삼아야 하는 고전이 된 것이다. 누구든 마녀재판에 관한 저서를 쓸 때면 이 책을 주요 전거로 내세웠다. 예컨대 피코 델라 미란돌라도 마녀에 관해 논할 때 이 책을 길게 인용하면서, 저자를 아우구스티누스 및 그레고리우스와 동렬의 인물로 거론했다. 16세기 후반이 되면 작가들은 더 이상 마술이 무엇이냐에 대해 고민할 필요 없이 이 책 내용을 전제로 했다. 마녀의 존재에 대한 반대론을 펼치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이 책 내용을 공격했고, 이에 대해 재반론하는 사람도 이 책 내용을 옹호하는 논지를 펼쳤다. 이렇게 이 책은 마녀 문제에 관한 한 가장 영향력 있는 악의 고전으로 자리 잡았다.
―p. 165.
『로빈슨 크루소』나 『파리대왕』과 같은 문학적 허구가 아니라 실제 무인도에 사람들이 남겨졌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바타비아호 사건은 그런 질문에 답을 제공할 실마리를 준다.
‘바타비아호의 무덤’에서 인간은 결코 조화로운 사회를 건설하지 못했다. 디포가 예상한 것과 달리 유럽의 우수한 문명 요소들이 낯선 환경, 위기의 순간에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하지는 못했다. 인간의 이성, 혹은 좁게 보면 유럽의 이성은 만능의 열쇠가 아니다. 유럽 대륙 본거지에서는 여러 단점에도 불구하고 관성에 따라 자기 기능을 발휘할지 모르지만 다른 대륙 혹은 낯선 자연 상태에서는 그들의 이성이 결코 행복한 삶을 보장하지 못한다. 그들의 신앙 역시 그리 단단하지 못한 것으로 밝혀졌다. 적도를 넘어서는 순간 십계명은 눈 녹듯 사라지는 모양이다. (……)
바타비아호 사건은 세계로 팽창해가는 근대 유럽 문명의 다이내믹한 힘의 이면에 얼마나 사악한 힘이 도사리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먼 이국의 섬은 이성과 신앙에 의해 에덴동산으로 변화된 게 아니라 오히려 유럽 문명의 무덤이 되었다.
―pp. 192~194.
기억은 끊임없이 다시 창조된다. 기억을 놓아버려서도 안 되며, 기억을 독점해서도 안 된다. 기억은 우리 존재의 핵심 구성요소이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가 껴안고 있는 가장 고통스러운 문제 중 하나인 홀로코스트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이런 문제를 환기시킨다. 홀로코스트라는 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사건에 대해 영화는 여러 방식으로 접근했다. 극영화, 다큐멘터리, 혹은 인터뷰 등 각각은 나름의 장단점을 가지고 있다. 홀로코스트 문제만이 아니라 더 일반적으로 영화는 과거 역사 사실에 대해 증거를 모으고 해석하고 서술하는 데 얼마나 기여할 수 있을까?
―p. 3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