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떠올리다
<장난감 도시> 해설에서 문학비평가 김현이 지적한 대로 이동하의 소설은 많은 부분 ‘기억’에 의존하고 있다. 어른이 된 작가는 끊임없이 어린 시절, 젊은 시절의 자신을 기억하고 과거의 삶을 재구성한다. <<매운 눈꽃>>에 수록된 작품들 중 절반도 육이오전쟁과 가난했던 문학청년 시절에 대한 회상이다. 귀촌 생활과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을 다룬 나머지 작품들도 과거 사실에 대한 서술이 부분적으로 개입되며 현재의 삶을 바라보고 판단하는 기준점 역할을 한다.
작품들을 통해 작가가 기억해내려고 애쓰는 작가의 삶, 그리고 그 삶을 통해 재현하려는 시대를 재구성해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50년대는 전쟁의 상처를 안고 고향 시골 마을을 떠나 도시의 빈민으로 편입되었다가 60년대는 가난한 대학생으로 문학에 대한 열정을 꽃피우고 70년대에는 가난한 사회 초년병으로 생계를 위해 악전고투하고 80년대 들어 겨우 지방대학에 자리를 얻고 90년대에는 서울로 돌아와 어느 정도 안정된 생활을 하지만 생활에 얽매여 질식되는 창작열을 고통스럽게 바라보다가 21세기 들어 문막에 귀촌해 감나무를 심고 자신의 삶을 반추한다.
작가는 회상의 서술 방법을 통하여 자신의 뿌리를 확인하고 자아의 변화와 현재의 위상을 탐색한다. 과거에 대한 객관적 거리감의 확보를 통해 유년의 트라우마와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실수들을 기록하며 정신적 치유의 길을 모색한다. 그리고 자신의 삶이 어디서 출발하였는지 살피고 유년의 상처와 청춘의 방황과 중년의 허탈과 그 이후의 안정과 삶의 긍정이 드러나는 생의 축도를 보여준다. 이번 작품집에서 보이는 작가의 생의 축도는 굴곡 많은 현대사를 겪었던 같은 연배 사람들 중 누구도 피해갈 수 없었던 연대기를 집약해 놓은 것이기도 하다.
아름다운 환멸
작품집의 표제작인 <매운 눈꽃>은 대학 시절 잠시 마음을 나누었던 한 여성에 대한 추억을 다룬다. 뜨거운 가슴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글쓰기와 연애밖에는 없었던 결핍의 시대. 가슴은 뜨거웠지만 연애는 싱거웠다. 시대의 다름을 고려하더라도 두 사람의 교분은 방학 때 주고받은 여러 통의 편지 교환과 비에 젖은 도시 한 모퉁이를 함께 걸었던 것뿐이다. 하지만 화자의 소극적인 연정의 끈은 술자리에서 친구의 무심한 농담으로 덧없이 끊어지고 만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화자는 그 여성의 삶이 끝나게 되는 마지막 장소인 병실을 방문하고 젊은 시절 주고받았던 수줍은 연애편지를 돌려받는다.
일종의 전기 소설이라 할 수 있는 <아름다운 환멸>은 작가가 친우였던 시인의 삶을 연대기적으로 재구성한다. 대학에서 함께 문학을 공부했던 화자와 시인은 비슷한 시기에 등단하여 비슷한 시기에 직장도 잡고 가정을 꾸리게 된다. 생활인으로서 비슷한 궤도를 달리던 두 사람의 삶의 궤적은 시인이 생업을 버리고 전업 시인의 길로 들어서면서 달라지게 된다. 화자인 작가는 젊은 시절의 창작에 대한 열정을 불사르려는 시인의 ‘오연한 기개’를 보며 몹시 부러워한다. 시인의 창작에 대한 열정은 결국 시인 자신의 생명까지 연소시키고 문학과 삶의 어중간한 경계에 서 있던 작가는 시인의 투병과 종말을 바라보며 연민과 회한과 자책을 감추지 못한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사건을 회상하며 뒤늦은 자책과 회한의 깨달음이 온다는 데에 <매운 눈꽃>과 <아름다운 환멸>은 공통점이 있다. 작가는 ‘매운 눈꽃’을 일상의 삶에서 숨겨진 개인의 순정한 진실의 은유로 사용한다.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시도도 못해본 사랑은 상대방의 죽음 직전에 돌려받은 젊은 시절의 연애편지로 돌아오며 그 편지들은 황량했던 결핍의 시공간 속에서 가슴을 뜨겁게 했던 눈꽃으로 변환된다. 차가운 동토의 얼음 속에 가난 속에서도 뜨거운 가슴을 지키며 살 수 있게 해주었던 ‘눈꽃’은 사람들 마음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순정한 진실을 가리키는 것이다. <아름다운 환멸> 역시 뜨거운 가슴으로 예술을 불태웠던 ‘눈꽃’의 상징으로서의 어떤 시인이다. 창작과 예술이 뜨거운 가슴에서 창조되는 ‘아름다운 환멸’임을 온몸으로 웅변한 한 시인의 삶을 반추하며 화자는 예술과 생의 본질을 깨닫게 된다. 뜨겁게 살고 있지 않으면 사는 게 아니라는 화자의 회한과 자책은 하루하루 시간의 흐름 속에서 초조해하는 모든 사람들의 회한과 자책이기도 할 것이다.
감나무를 심다
‘밤산골 사람들’ 연작이라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 작품집 뒤에 배치된 다섯 편은 저자가 여주 지나 문막읍 밤산골로 귀촌하면서 그곳의 풍경과 사람들을 소재로 쓴 작품들이다. 그리고 저자가 ‘자전적 소설’이라 부제를 붙였고 밤산골 연작의 프롤로그로 읽힐 수 있는 <감나무가 있는 풍경>이 이 작품들의 바로 앞에 배치되어 있다. 한 편의 아름다운 수필처럼도 보이는 <감나무가 있는 풍경>은 육이오전쟁이 남긴 상흔으로 인해 감나무로 상징되는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화자가 50년이 훨씬 넘는 세월 동안 ‘길 위의 떠돌이 삶’을 마감하고 귀촌하게 된 배경을 담담하게 서술한다.
화자가 귀촌해서 처음으로 한 일은 여주 오일장에서 감나무 묘목 두 그루를 사다가 심은 것이다. 어렸을 적 파수대 역할을 해주던 백 년 넘은 감나무의 듬직한 둥치를 떠올리며 화자는 ‘동구 앞 들판과 해 저무는 읍내길을 내다보고 싶다’는 이룰 수 없는 소망을 품어본다. 하지만 자신이 심은 묘목이 결코 그 꿈을 이루어주지 않으리라는 사실, 다시는 그 나무에 올라가 설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은 화자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 ‘지난 삶이란 낯선 곳에서 한사코 고향 집을 찾으려는, 그러므로 결코 이룰 수 없는 여정’이었다는 걸 깨닫게 된 화자는 ‘막상 돌아갈, 돌아가고 싶은, 그 고향이 없어졌기 때문’에 연고도 없는 문막에 새로운 삶의 터전을 꾸린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원고지에 담아 나간다.
일가의 성씨가 모두 다른 평범하고도 특별한 어느 가족의 이야기 <가족>, 주워온 강아지에 의해 죽임을 당한 병아리들을 보며 결코 순치될 수 없는 야성과 본성을 사색하게 되는 <자망이 이야기>, 위악적인 말투와 거침없는 욕설이 난무하지만 속 깊은 정이 흐르는 두 노인의 이야기 <우는 개>, 자식들을 성가시켜 도시로 보내고 산골짜기 마을을 지키면서 양은냄비에 날된장과 산나물을 비벼 먹는 두 노인의 깜찍한 에피소드를 그린 <아름다운, 그러나 조금은 쓸쓸한> 등이 농촌의 상쾌한 풍경 속에서 인정의 훈기를 풍기며 펼쳐진다.
대학 시절 은사와 어느 날 갑자기 농사는 팽개치고 헛간방에 칩거한 소띠 노인을 두보의 시를 매개로 대비시킨 <시인과 농부>는 새로운 터전에서의 삶을 저자가 강력하게 긍정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모종도 살 겸 읍내장에 가노라고, 서너 걸음 뒤처져서 따라오던 궁촌댁이 말했다. 올해에는 고추 말고도 토마토며 참외, 수박 따위를 골고루 챙겨 심을 작정이란 말도 했다. 아무렴! 나는 깊이 공감했다. 생의 끝자락에서 맞닥뜨린 저 도저한 허무 앞에 우리는 어떻게 맞설 것인가? 시인은 인간의 근원적 비극을 노래함으로써, 농부는 잡초 무성한 땅에 씨를 뿌리고 가꿈으로써 그것을 극복한다. 농부에게 파종은 미래의 기약이면서 강력한 자기 존재 증명인 것이다. 읍내 버스 정류소로 가고 있는 주 노인 일가를 보면서 나는 그런 생각에 젖었다.’
‘길 위의 삶’을 떠돌다 어느덧 인생의 끝자락에 서서 맞닥뜨린 ‘저 도저한 허무’. 한 사람의 시인(작가)으로서 창작과 예술을 통해 그것을 극복하려 했던 작가는 땅에 씨를 뿌리고 그것을 가꾸는 농부의 삶 역시 삶의 허무를 극복하는 인간의 존재 증명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지만 미래에 대한 멈추지 않는 기약을 통해 무한함에 참여한다는 깨달음은 거의 종교적인 깨달음과도 맞먹는다.
■ 작가의 말에서
‘그간에 퇴직하고 시골로 이사를 했다. 문막의 산골마을로 옮겨 앉은 게 지난 2009년 9월의 일이다. 내가 살던 분당에서 찰 한 시간 반 남짓한 거리다. 공기 맑고 조용한 곳으로, 특별한 연고는 없다. 돌아보면 초등학교 4학년 때 도시로 이주한 이래 거의 60년 만의 귀촌이다. 새 환경에 적응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또, 건강상의 문제도 있어 지난해 9월부터 상당 기간 병원 신세를 졌다. 내 나이 어언 일흔 고개였다. 지금은 웬만큼 건강을 회복한 것만 감사할 따름이다. 인명은 재천이라 했으니 마음 다스릴 일만 남은 셈이다.
그래서일까. 이번 수록 작품 열 편을 들여다본즉 위의 영향이 짙다. 소설은 허구의 세계지만 그 본질은 일상적 삶의 성찰이라는 평소 생각을 고수한 결과다. 더 정직하게 말하자면 ‘의도적 고수’라기보다 그런 묵은 생각에 여전히 ‘발목 잡혀 있는 꼴’이다. 상전벽해의 세태에도 불구하고 몽니 부리 듯하는 자신의 모습이 딱하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그게 바로 나라는 생각도 없지 않다.’
■ 본문에서
우리는 이웃해 살면서도 서로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저마다 제 몫의 인생을 살아내기에 급급했던, 어찌 보면 더없이 삭막한 시기였던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어느새 불혹의 나이로 슬금슬금 다가가고 있었다. 흰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단정히 매고 아침마다 창황히 집을 나섰다가 늦은 시간 귀갓길에서 축 처진 어깨를 하고 흐느적거리는, 갈데없는 월급쟁이의 모습을 이따금씩 서로에게 들키곤 했다.
<아름다운 환멸> 82p
그는 아버지의 거동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그랬다. 아버지는 조수석에 올라앉기 전 마지막으로 등 뒤를 힐끗 돌아보았다. 그의 시선도 따라갔다. 거기, 여러 해 동안 그의 가족이 몸담고 살았던 집이 텅 빈 채로 서 있었다. 흡사 벗어던진 두루마기처럼 초라하고 허전한 모습이었다. 짧은 일별이었지만 마음속에 돋을새김으로 남는 풍경이었다. 마침내 아버지는 조수석에 올랐고, 지체 없이 차는 출발했다. <감나무가 있는 풍경> 122p
집 밖으로 한 발만 나서면 온갖 차들이 뻔질나게 오갔고, 뒤쪽 창을 열면 악취 나는 폐수가 바로 코밑에서 흘러가고 있는 게 보였다. 그는 한동안 잠을 설쳤다. 방에 누웠어도 길바닥에 드러누워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차가 끔찍한 소리를 내면서 급정거하는 소리에 놀라 잠이 깰 때마다 그는 고향집 마당을 떠올리곤 했다. 황토로 잘 다져진 그 마당에 멍석을 깔고 누워 별이 총총한 하늘을 올려다보곤 여름밤들을 회상했다.
<감나무가 있는 풍경> 123p
그가 만년에 엉뚱한 고장에 짐을 푼 것도 서울에서 멀어지는 것을 겁내서라기보다, 막상 돌아갈, 돌아가고 싶은, 그 고향이 없어졌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만년의 삶이란, 귀향 의지를 포기한 삶일 수밖에. 더러 까닭 없이 마음이 썰렁해지곤 하는 것도 어쩌면 그 탓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감나무가 있는 풍경> 126p
낡고 몽롱한 회상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실루엣 하나를 나는 간신히 건져 올렸다. 그리고 자문했다. 저 모습이 젊은 날의 나였던가? 충혈된 눈과 꺼벙한 어깨, 지척대는 걸음걸이... 욕망의 충동과 잦은 허기와 깊은 갈증에 대책 없이 내몰리기만 했던 순간들이 낡은 영상처럼 자욱하니 피어올랐다. 그러면서 느닷없이 귓불이 확 붉어졌다. 지나온 삶을 뭉뚱그려 보면 너무 서툴렀고 너무 아둔했었다고, 대중없이 나는 자책했다. 크고 작은 상처들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그 시절 나를 스쳐 지나간 얼굴들이 떠올랐고, 그러자 도무지 감당하기 어려운 자괴감이 나를 사로잡았다. 지나온 삶의 태반이 참으로 졸렬했었다는 의식이 나를 한정 없는 부끄러움 속으로 밀어넣었다.
<자망이 이야기> 140p
모종도 살 겸 읍내장에 가노라고, 서너 걸음 뒤처져서 따라오던 궁촌댁이 말했다. 올해에는 고추 말고도 토마토며 참외, 수박 따위를 골고루 챙겨 심을 작정이란 말도 했다. 아무렴! 나는 깊이 공감했다. 생의 끝자락에서 맞닥뜨린 저 도저한 허무 앞에 우리는 어떻게 맞설 것인가? 시인은 인간의 근원적 비극을 노래함으로써, 농부는 잡초 무성한 땅에 씨를 뿌리고 가꿈으로써 그것을 극복한다. 농부에게 파종은 미래의 기약이면서 강력한 자기 존재 증명인 것이다. 읍내 버스 정류소로 가고 있는 주 노인 일가를 보면서 나는 그런 생각에 젖었다.
<시인과 농부> 196p
그녀가 어머니 집에 닿은 것은 점심때가 한참 지나서였다. 봄볕이 따스하게 들이치는 툇마루 위에 두 노인네가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오랜 세월을 이웃으로 살아온 때문이리라. 흡사 피를 나눈 자매 같았다. 고사리, 두릅, 취나물 등 산나물에 혹해 끼니를 놓쳤다며 때늦은 점심식사를 하던 중이었다. 둘 사이에는 양은냄비 하나만 달랑 놓여 있고 그 안에 날된장으로 버무린 산나물 비빔밥이 푸짐하게 담겨 있어 입맛을 당기게 했다. 양산댁이 제 집인 양 부엌으로 가더니 숟가락을 챙겨다주었다. 마침 시장하던 판이기도 했다. 딸은 두 노인네 사이로 얼굴을 들이밀고 아귀아귀 퍼먹었다. 산나물과 날된장과 참기름이 찬밥과 어우러져 입안 한가득 씹히는 이 맛! 어쩐지 오래고 아련한 그리움 같은 것에 옴팍 젖게 만들었다.
식후에는 함께 커피를 마셨다. 한 봉만으로는 싱겁다면서 두 노인은 한 잔에 커피 믹스 두 봉을 넣었다. 큰 잔에 물도 넉넉히 부었다. 커피를 숭늉 마시듯 하는 모습이 그렇게 편안하고 행복해 보일 수가 없었다.
<아름다운, 그러나 조금은 쓸쓸한> 238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