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설 중에서
소설이란 이러저러한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생각하는 또는 생각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박성원에게 소설은 단정지을 수 없는 그 무엇,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숭고한 그 어떤 것이다. (……) 박성원의 경우에는 아무리 채워도 텅 비어 있는 구멍이나 공동空洞을 마주한 숭고, 발 없이 떠도는 유령의 텅 빈 몸과 마주한 숭고라 할 수 있을 터. 죽었지만 다시 돌아온 아내처럼, 박성원에게 소설은 씌어졌지만 여전히 씌어지지 않은 상태에 있다. 그의 소설에서 아포리아가 반복적으로 출현하는 것은, 지금 씌어지고 있는 소설과 함께 여전히 또는 아직도 씌어지지 않은 소설이 텍스트 안과 바깥에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박성원에게 소설은 지금 씌어지고 있는 소설과 아직 씌어지지 않은 소설의 사이의 문턱에 자리하고 있다고.
―김동식(문학평론가 ? 인하대 교수)
▲ 줄거리 요약
* 「고백」
주인공 ‘나’는 친구인 ‘젖 나오는 남자’와 ‘여자와 자기’라는 단 한 가지 목적을 가지고 여행을 다니나 그런 기회는 2, 3년 중 딱 한 번뿐이다. 돌아갈 차비도 없는 상태에서 그와 헤어진 ‘나’는 경마 연구에 매진하나 실패하고 다시 ‘젖 나오는 남자’와 만나 그의 권유대로 소설을 쓰기 시작해 등단한다. 술자리에서 소설가 박성원을 만나 어울리게 된 ‘나’는 며칠 전 서점에서 우연히 만난 여자 J에게 소설가 박성원과 친하다는 거짓말을 늘어놓은 일이 떠오르고, ‘젖 나오는 남자’와 J, 소설가 박성원에게 음악 카페에서의 만남을 제의한다.
* 「더러운 네 인생」
‘나’는 치매에 걸려 아홉 살 어린아이로 돌아간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한 달에 한두 번 요양원을 방문한다. 의사는 아버지가 좋아할 만한 것을 가지고 방문하라고 하지만 아버지는 ‘나’를 알아보지도 못하는 상태이다. ‘나’는 소설가 박성원과 동석한 여자 K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어 K를 방에 들이지만 만남을 이어가지 못한다. 소설을 읽던 ‘나’는 J 생각이 나 그녀에게 전화를 걸지만 “이제는 괜찮냐”고 묻는 J의 질문에 대답을 못하고 전화를 끊고 만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요양원으로 아버지를 만나러 간 ‘나’는 흥미를 보이던 장난감도 잡으려 하지 않는 아버지와 마주하고 눈물을 흘린 뒤 집으로 돌아가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 「몸」
죽은 지 279일이 된 아내가 유령이 되어 돌아온다. 학원에서 수학강사로 일하다 해고를 당한 주인공은 유령이 된 아내를 발견하고 당황스러움을 느낀다. 그와 재혼을 앞둔 J가 그의 어린 아들 S와 함께 돌아오자 그는 유령이 된 아내의 몸을 쓰레기봉투에 숨긴 채 밤을 보낸다. 다음 날 마지막 수업을 하기 위해 학원으로 출근한 그는 짐을 챙겨 나오는 것도 잊은 채 J와의 재혼을 위해 결혼식을 올릴 성당을 방문하지만 죽은 아내의 유령에 대한 생각을 떨쳐내지 못하고 허우적거린다.
* 「심해어」
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났지만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가는 남매의 이야기. 여자는 죽은 어머니로부터 햇볕을 쬐면 피부가 벗겨지는 유전병을 물려받아 커튼을 내린 집에 갇혀 지낸다. 정상인인 남동생은 그가 가져오는 약에 의지해 살아가는 여자를 “괴물”이라고 부르며 괴롭힌다. 처음으로 밤 외출을 나선 여자는 쓰러진 취객의 이마에서 흐르는 피를 맛보고 몸속을 뜨겁게 돌고 있는 건강하고 깨끗한 피를 강렬하게 희구하게 되지만 남동생은 햇볕 아래에서 여자를 화형시키려 한다. 급기야 그를 피해 도망치던 여자는 십자가를 들어 남동생의 머리를 내려찍는다.
* 「여름이 가기 전에 해야 할 일 세 가지」
주인공 남자는 화가이다. 한 차례 전시회를 가졌지만 일반 관객은 한 사람도 찾아오지 않는다. 남자는 다음 전시회의 테마로 다빈치, 고흐, 달리 등이 그린 명화의 부분들을 끌어모으는 콜라주를 구상한다. 예술의 정수를 모독하고 훼손함으로써 자신의 예술적 명성을 높이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첫 번째 전시회 이후 자신감 잃은 남자는 좀처럼 작업을 진전시키지 못하고 동거하던 여자마저 그를 떠난다. 여름이 끝날 무렵 남자는 공장에서 일을 해야 하는 처지가 되고 기계로 가득한 공장에 미술이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공장의 기계들 앞에서 남자가 마주한 것은 그가 사용하고자 했던 미술의 온갖 기법들이다.
* 「침수」
노부부는 유학까지 다녀온 아들의 기타 연주회에 가기 위해 남해로 길을 나서다가 교통사고에 연루된다. 거대한 트럭과 부딪힌 오토바이 운전자는 부부의 차 보닛 위로 떨어지고 정신을 차려보니 트럭은 꿈처럼 사라지고 없다. 경찰서에 간 남편은 꼼짝없이 오토바이 운전자가 사망한 교통사고의 피의자가 되어 죄를 인정하면 집행유예로 풀려나고, 진실을 말하면 금고형을 살 처지가 된다. 부부는 귀가조치를 받아 지친 몸으로 가까운 여관에 짐을 풀지만 휴대전화 문자 알람에 눈을 뜬 그녀가 발견한 것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남편이다.
* 「어느 날 낯선 곳」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주인공 ‘나’는 시내버스만을 이용해 전국을 떠돌아다니는 여행을 떠난다. ‘나’는 수재인 형이 두고 간 소설들을 열심히 읽다가 최인호의 『고래사냥』 속에서 일종의 인식론적 충격을 받아 방황한다. 여행 중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며 많은 길을 다니다 어느 마을에 도달해 ‘기찻길’이라는 카페에 든다. 카페 여주인이 들려준 음악, 리 오스카의 「My road」. 그녀는 사진기를 사고 싶어 했고, 소년인 ‘나’는 소설가가 되어 첫 책을 내면 사진기를 선물하겠노라 말하지만 그녀를 다시 만나지는 못한다.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잠든 ‘나’는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하모니카 소리에 눈을 뜬다. 이제 막 아침이 시작되고 「My road」가 흐르는 가운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 「닭똥과 요산」
병적으로 소독약을 퍼붓는 엄마로부터 도망쳐 나온 여자와 가짜 수의사 행세를 하다가 도망 다니는 남자가 기차역 대합실에서 만나게 되는 이야기. 스스로를 수의사로 여기는 남자는 사기꾼에 가깝고, 스스로를 발레리나라고 말하는 여자는 허언증 증상을 보인다. 남자는 닭똥에서 요산을 추출하여 향정신성 의약품을 만들려고 하는데 그 과정에 여자를 이용할 수 있어서 만족스럽다. 여자는 엄마의 억압에서 벗어나 발레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남자와 함께한다. 두 사람을 묶어주는 것은 병든 세상을 치유할 치료제를 만든다는 공동의 과대망상뿐이다.
* 「보너스 이야기」
하나. ‘나’는 20대의 마지막 시절 자취방에서 ‘신세밀랴’라는 화초를 키운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12월, 친구들은 한 벌뿐인 ‘나’의 한 벌뿐인 겨울 외투를 말도 없이 입고서 스키장에 놀러 가고 수중에 돈마저 없던 ‘나’는 자취방에서 크리스마스 특선 영화를 보다가 문득 눈물을 흘린다. 그때까지 울어본 기억이 없었던 ‘나’는 난생처음으로 통곡을 하며 라면을 먹는다. 다음 날 스키장에서 돌아온 친구들이 라면 한 박스를 사 오자 ‘나’는 다시 그들과 라면에 소주를 먹고 함께 잔다. 아침 일찍 잠에서 깬 ‘나’는 죽은 ‘신세밀랴’를 땅에 묻는다.
둘. 주인공 ‘나’는 “모든 사물은 서로 연관되어 있으며, 우연이 아닌 필연이 세상을 지배한다”고 믿는 인물로 ‘나’와 ‘녀석’이 무슨 필연의 끈으로 묶여 있는지 알 수가 없다고 말한다. 어느 날 ‘나’는 쥐에게 코를 물리는 꿈을 꾼다. 그러자 ‘녀석’이 정말로 쥐에게 코를 물리는 일이 벌어진다. 다른 날에는 예전에 짝사랑하던 여자가 꿈에 나타났는데 ‘녀석’이 찍은 사진 속에 그녀의 모습이 또렷이 포착되어 있다. 꿈은 계속되고, 다음 날이면 여지없이 ‘녀석’의 현실로 나타난다. 우연일까, 우연을 가장한 필연일까. 혼란스러운 ‘나’는 이번에는 인공위성의 추락으로 인해 온몸에 파편이 박힌 채 물속 깊이 빠져들며 죽는 꿈을 꾸게 되는데…….
▲ 본문 중에서
문단이라는 게 생각보단 복잡하더군. 내겐 마치 하나의 암호처럼 보였어. 거대하고도 복잡한 암호 말이야. 한 평론가가 술자리에서 나에게 묻더군.
—자네는 어떤 경우인가.
—무슨 말씀이신지.
—‘이것은 내가 보는 것이다’라고 말하겠나 아니면 ‘이것이 과연 내가 보는 것인가’라고 말하겠나.
—글쎄요, 저는 눈이 나빠서…….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몰라서 횡설수설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나를 도와주더군.
—이 친구는 말입니다, 과연 ‘내가 보긴 볼 수 있는 걸까’를 묻는 친구입니다.
― p. 28,「고백」
나는 서점에 들러 이런저런 책들을 구경하고 나왔어. 여름의 공기치고는 지나치게 가벼웠고 상쾌했어. 서점 앞에 있는 분수대에서 한 여자가 책을 읽고 있더군. 그것도 소설책을 말이야. 짧은 치마가 너무 매력적이었어. 난 다가가서 말을 꺼냈지.
— 박성원의 소설을 읽고 계시는군요.
여자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어.
— 제가 그 소설가를 아주 잘 알거든요. 그래서 반가워서.
— 그래요?
— 그럼요. 저도 소설을 쓰거든요. 막 등단해서 아직 책이 없긴 하지만.
여자의 눈이 반짝였어. 아, 상쾌한 여름날이라니.
— 박성원, 그 소설가 얼마나 재미난 사람인지 알아요?
― p. 29,「고백」
한가운데 구멍이 휑하니 뚫린 태양이란 있을 수 없다. 꽉 찬 밀도와 들끓는 밀도. 그러나 그의 삶은 도넛과도 같았다. 음식을 채워 넣고 술과 담배 연기를 욱여넣어도 텅 비어 있는 도넛의 구멍. 그리고 그 구멍에선 늘 환청이 떠다녔다. 내 탓이 아니야. 누군가 태어나고 누군가는 죽는다. 누군가는 복권에 당첨되고 누군가는 태풍에 휩쓸려 죽는다. 마트에 물건이 넘쳐나고 아프리카 어디에서는 아이들이 쓰레기장을 뒤진다. 견고한 시멘트 덩어리도 철거될 것이고, 최신 기술을 자랑하는 소형 전자제품도 언젠가는 지구의 흙더미에 묻힐 것이다. 그리고 그 언젠가 지구도 먼지가 되어 우주의 티끌로 사라질 것이다. 이게 어디 내 탓인가?
― pp. 82-83,「몸」
나는 창문을 닫고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아니 소설을 쓰고 싶다는 강렬한 끌림에 달라붙어 나는 흰 종이에 글을 써 내려갔다. 글을 쓰면서, 이것이야말로 아주 긴 여행이 될 지도 몰라, 라고 중얼거렸다. 아침의 부산스러움이 창밖에서 어른거렸고 그날 한밤중이 될 때까지 나는 쓰고, 쓰고 또 썼다. 지구는 그날도 자전하고 있었고, 그 자전에 몸을 맡긴 채 길 위에 서 있는 내가 보였다.
― p. 204,「어느 날 낯선 곳」
너의 상상이 나의 현실이고, 나의 상상이 너의 현실이며, 나의 현실이 너에겐 한낱 꿈이며, 너의 꿈이 나에겐 지울 수 없는 현실이라는 걸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도대체 그 누가 그런 말을 믿어준단 말인가.
나는 땀을 닦으며 녀석에게 말했다.
—오늘…… 넌 죽을지도 몰라. 하지만 괜찮아. 나에겐 꿈일 뿐이니까. 그저…… 꿈일 뿐이야. 그래, 그저 꿈이란다. 모든 게 소설일 뿐이야.
― p. 259, 「보너스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