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0월호부터 2014년 6월호에 이르기까지 『현대문학』에 총 9회에 걸쳐 절찬 연재되었던 방현희의 『세상에서 가장 사소한 복수』가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2001년 등단해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방현희의 이번 소설은 온갖 기만과 위선으로 가득 차 있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젊은 현대인들이 느끼는 분노와 좌절, 그리고 사회생활의 현실적인 문제들을 극복, 타개하여 그것을 반전시킬 복수라는 감정이입의 모순적 양태들을 여러 관계망 속에서 경쾌한 언어로 다각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쿨’함이 세상의 미덕처럼 여겨지게 된 지금의 사회에서 현대인들이 느끼는 강박신경증, 그 감정의 문제에 천착한 이번 소설은 사회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하면서 연인까지 잃게 된 한 남자가 자신만 몰랐을 뿐 이미 있어왔던 자기 안의 상실의 근저를 되짚어가는 과정을 통해, 상실은 그 자체가 반복되는 것이며, 자신의 열정이나 욕망과 무관하게 스스로 욕망하는 그들 안에 자신이 부재하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으로 끝이 난다. 결국 자기에게 ‘부재’한 모든 것이 절실한 ‘부채’로 다가오는 현실을 받아들이며, 자신이 욕망하는 타인에게 거부되는 삶의 가장 낮은 지점에서 비로소 비루한 자기 존재를 발견하게 된다.
결국은 상대를 향한 복수가 아닌 자신을 향한 복수로, 어떤 칼부림도 총싸움도 없이 그저 자신의 감정을 허망하게 낭비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이 책은 그러니까 감정 경제학에 사로잡힌 한 남성의 감정적 파산과 체념할 줄 모르는 애정에 기인했던 순정한 복수를 꿈꾼 그에 따른 복수를 그린 이야기이다.
▲ 줄거리는
“오빠는 오빠에게 영혼이 있다고 생각해?
그럼, 우리 모두에게 당연히 영혼이 있다고 가정하고, 우리가 믿고 있던 영혼이
어쩌면 내가 가장 싫어하는 나의 한 부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해봤어?”
케이블 방송국 피디인 석진은 동료 피디이자 사내커플인 현지와의 관계 속에서 시시때때로 급변하는 그녀의 태도에 불안해한다. 초반에 선배 피디로서 그녀를 보호하고 도움을 주던 조력자로서의 역할이 어느 순간 뒤집어지면서, 이제 현지가 석진을 통해 자기 이득을 취하기도 하고 적극적으로 남녀 관계에서의 주도권을 행사한다. 뿐만 아니라 현지는 더 이상 석진의 도움 없이도 회사 내에서 그 능력을 인정받게 되고 그런 현지를 더 이상 그 옆에 붙잡아둘 수 없음을 석진은 예감하게 된다.
그것을 만회시킬 역작으로 만든 새 프로에 자기 아버지를 출연시키게 된 석진은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처음의 이기적인 의도와는 다르게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해결되지 못한 자기 가족이 해체되기까지의 아픈 구석을 처음으로 응시하게 된다. 긴 유학생활을 끝내고 한국에 돌아오지 않은 채 뉴욕에 눌러 사는 큰형, 돌아오기는 했지만 왕래가 없는 작은형에 대한 원망과 함께 그들에 대한 집착과 연민을 놓지 못하는 아버지에 대한 처절한 안타까움이 치솟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아버지는 암을 얻게 되고 두 형 없이 쓸쓸하게 아버지의 마지막을 지키는 석진의 곁을 현지마저 떠난다.
▲ 본문 중에서
그의 얼굴은 애초에 없는 것에 대해 어떤 감정도 없어 보였다. 어떤 사람은 잃어버린 것에 대해서는 기억조차 깡그리 없애버리는 경우도 있으니까. 하지만 있던 자리는 텅 비어 있을 것이고, 그건 돌아오지 않는 가족처럼 언제까지나 텅 빈 채 남아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버지는 자주 그 텅 빈 공간에 머무는 것 같기도 했다. 우두커니, 아니다. 어쩌면 그 공간은 이미 찌그러졌는지도 모른다. -p. 96
어쩌면 퍼즐 조각이 나타나지 않기를 바라며 찾는 수고를 유보하고 또 유보하는 게 아들일 것이다. 그래서 평생 아버지를 이해할 듯 말 듯, 무언가 부채의식 같기도 하고 원망 같기도 한 것들을 남긴 o 눈을 감는 게 남자들이다. 한국의 가정에서 아들이란 아버지를 도와주는 존재가 아니다. 그냥 덮어두는 존재일 뿐이다. -p. 181
나는 이처럼 나 자신을 고독한 상태에 놓이게 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나를 향한 복수인지, 다른 누구를 향한 복수인지는 모른다. 나는 타인들에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는 편을 택한다. 별 볼 일 없는 인간이 안간힘 끝에 내리꽂는 복수는 이런 형태로 귀결되는 것이 바람직해 보였다. -p. 284
왜 하필 나에게 이빨이 다 빠져나가던 때의 상실의 아픔이 전이된 것인지는 모른다. 아버지는 왜, 애정을 별로 주지도 않은 나에게 통증을 물려주었는지 알 도리가 없다. 우리는 그저 관계망 안에서 약자라는 공통점밖에 아무것도 없는데. -p. 155
오빠는 오빠에게 영혼이 있다고 생각해? 그럼, 우리 모두에게 당연히 영혼이 있다고 가정하고, 우리가 믿고 있던 영혼이 어쩌면 내가 가장 싫어하는 나의 한 부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해봤어? -292p
▲ 작가의 말 중에서
사랑과 일에서 냉소적이려고 애쓰지만 결국 그건 실패를 가볍게 포장하려는 것에 불과한, 씁쓸하고도 서글픈 젊은이들. 인생에서 가장 확신에 넘쳐야 할 시기, 그 시기에 사랑과 일에서 확신을 갖지 못하는 젊은이란 무엇일까. 그런 젊은이에게 영혼이란 태어나기도 전에 죽은 무엇일까. 있긴 있으되 존재감조차 희미해서 자기 자신도 알아볼 수 없는 무엇일까.
가족 관계에서의 약자가 사회적 관계에서도 약자의 위치에 놓이게 되며 심지어 연인 사이에서도 약자의 입장에 놓이게 되는데 이런 젊은이들이 느끼는 일상적 분노와 뿌리 깊은 분노를 생각했다. 약자는 강자에게 상처를 주지 못한다. 강자에게 약자의 분노는 전혀 치명적이지 않다. 약자는 사력을 다해 몸부림치지만 실제로는 누구에게도 영행을 미치지 못하는 발길질을 하는 것뿐이다. 그것을 바라보는, 바라봐야 하는 무능한 영혼의 아픔을 그리고 싶었다.
▲ 작품해설 중에서
‘쿨Cool’함이 세상의 미덕처럼 여겨지게 된 이후 온갖 종류의 관계 사이에 이 쿨함이 횡행한다. 누구나가 그래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지질이’가 될 혐의 속에 살아가는 지금의 사회는 분명 인간관계에 대한 강박신경증을 유행시키고 있다. 문제는 이것이 무엇이 쿨함이고 무엇이 지질함인지의 이분법조차 분불명해지는 신경증적인 감정의 문제라는 데 있다. ‘지질함’이 분명 자기가 받을 상처 때문에 차라리 관계를 파탄시키는 자기 방어적 심리의 소산이라면, 쿨함은 지질함의 반대 감정이 아니라 더 정확하게는 지질함으로 나가기 한발 직전에 스스로를 통제하는 멈춤의 형식인 탓이다. 쿨함은 결국 감정의 소비와 그에 따른 이윤을 생각하는, 자기 감정에 대한 객관적 태도이다. 이와 같은 감정의 실리적 사용을 감정 자본이라 부를 수 있다면, 지금 우리 시대 모든 관계의 역학이란 감정 경제학으로 유지되는 아슬아슬한 균형의 세계다. 쿨함이 감정 절약의 경제적 태도라면, 지질함은 감정의 낭비나 누수, 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파산의 한 양태이므로 이 감정 자본의 세계로부터 자유롭다고 단언할 수 있는 자는 아마 많지 않을 것이다.
거칠게나마 이런 요약이 가능하다면, 방현희의 장편소설 『세상에서 가장 사소한 복수』(이하 『사소한 복수』)는 바로 이러한 감정 경제학에 사로잡힌 한 남성의 감정적 파산과 그에 따른 복수를 그린 이야기라 할 수 있다. -박인성(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