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와 욕망, 억압과 공포, 그리고 사랑과 치유……
‘의자’라는 메타포를 통해 들여다본
인간의 본성과 삶, 사랑 그 자체에 대한 내밀한 탐구
월간 『현대문학』에 2012년 7월호부터 2013년 7월호에 이르기까지 1년간 절찬 연재되었던 최수철의 <사랑은 게으른 자를 경멸한다>가 단행본 『사랑은 게으름을 경멸한다』로 출간되었다.
『사랑은 게으름을 경멸한다』는 ‘의자’라는 메타포를 중심으로 인간의 광기와 욕망, 억압과 공포, 그리고 사랑과 치유를 그린 작품이다.
작가 최수철은 오래전부터 ‘의자’에 관심을 가져왔고, 연애소설을 쓰고 싶었다고 한다. 따라서 ‘의자’를 통해 얻은 관찰과 성찰을 토대로 한 사랑 이야기가 완성되었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강박적일 만큼 ‘의자’에 관한 트라우마를 지닌 이들이다. 이들이 서로 사랑하고 관계 맺는 과정을 통해 ‘의자’로 대변되는 각자의 억압을 떨쳐내고 치유받는 모습이 존재론적 사유와 미학적 상상력, 엄정한 문체로 치밀하게 그려져 있다.
의자는 이 작품의 시작이자 끝이라 할 만큼 사건들의 모든 국면에 개입하고, 갈등을 유발하고, 해결하는 결정적인 요소이다. 의자는 원래 인간의 앉는 행위를 위해 만들어진 물건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의자는 이런 특성과 관련해 파생될 수 있는 다양한 함의를 표현하는 단순한 메타포를 뛰어넘어, 작중인물들의 삶과 죽음, 만남과 이별 등 모든 서사를 이끌어나가는 주인공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의자에 예속된 존재다. 한평생 한 의자에서 다른 의자로 옮겨 앉으며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 잠시 머무를 뿐 속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지요. 의자처럼 말이에요. 우리는 의자에 잠시 앉았다 가는 것일 뿐, 의자에 속하는 건 아니잖아요.”
“의자야말로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는, 가득 차 있으면서 동시에 텅 비어 있는 우주 만상의 완벽한 표상이야. 어찌 보면 기꺼이 남을 섬기는 우리 본성과도 닮아 있지.”
작중인물들이나 서술자의 입을 통해 나타나듯, 이 작품 속에서 의자는 인간의 본성과 삶을 표상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 그 자체를 의미하고 있기도 하다. 즉, 작가는 의자를 “한 인간이 태어나서 늙어 죽을 때까지 거치는 역사”로, “인간의 삶을 재구성하는 장치”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한평생 한 의자에서 다른 의자로 옮겨 앉으며 살아야 하는 인간에게 의자란 부박한 삶의 표상이기도 하고, 벗어날 수 없는 욕망이기도 하며, 억압이자 종속이기도 하다. 작중인물들은 의자를 증오하거나 두려워하면서도 끊임없이 자신의 의자를 찾아 헤맨다. 욕망하고 갈등하고 방황하던 이들은 각자 ‘자신의 의자’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과정을 거치고, 그럼으로써 사랑을 회복하고 그 사랑으로 치유된다. 이런 과정들은 우리들이 세계를 받아들이는 과정이자, 우리들 각자가 지닌 ‘억압’에서 해소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의자’라는 특정한 메타포를 통해 비춰진, 다소 극단적일 수도 있는 인물들의 면면과 삶의 방식, 특별한 사랑 이야기 우리의 삶과 세계라는 보편성을 획득하는 지점이다.
■ 지은이 _ 최수철
1958년 춘천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불문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1981년 『조선일보』로 등단했다. 소설집으로 『공중누각』 『화두, 기록, 화석』 『내 정신의 그믐』 『몽타주』 『갓길에서의 짧은 잠』 등이 있으며, 장편소설 『고래 뱃속에서』 『어느 무정부주의자의 사랑』 『벽화 그리는 남자』 『불멸과 소멸』 『매미』 『페스트』 『침대』 등이 있다. <이상문학상> <윤동주문학상> <김유정문학상> <김준성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 본문 중에서
번역 작업은 그의 적성에 잘 맞는다. 번역을 통해 이미 남들이 한 번 산 삶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다시 산다. 자기 방의 의자에 앉아 사람들과 만나고 각지를 여행하고 천재들과 괴짜들의 내면을 탐사하고 역사와 장소의 비밀을 관통하면서 그 경험을 자신의 언어로 옮겨놓는다. 게다가 거기에 자기 이름을 덧붙인다. 한때 실제로 존재했던 누군가의 삶을 흉내 내는 유령처럼. 그러나 유령으로 살아가려면 조심해야 할 게 있다. 자칫 타성에 젖게 되면 자기가 마치 투명인간이라도 된 듯 착각하게 된다. 그러다가 남들과 부딪히거나 발에 걸려 넘어지게 되면 자기가 사람들 눈에 보인다는 사실에 어리둥절해지기 마련이다. 그런가 하면 방랑하는 네덜란드인이나 영원히 유랑하는 유대인처럼 자포자기적으로 만성피로에 몸을 맡기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_1장 <의자 위의 연인들> 중에서
할아버지는 그 의자가 예전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일 뿐만 아니라 그 위에 앉아 있는 사람도 전혀 다른 인물로 보이는 것을 발견하고서 무척 놀랐다. 의자의 등받이가 유난히 높아 보였는데, 미간을 약간 찌푸린 늙은 혁명가의 단호한 표정만큼이나 그 의자도 무척 권위적인 인상을 풍겼다. 높고 각진 의자는 일종의 후광처럼 그를 감싸고서 조금도 타협할 줄 모르는 그의 고집스런 성격을 강조해주고 있었다. 그는 그 의자에 앉아서 사람들을 맞이하고 중요한 정책을 심의하고 자신의 결정을 하달하고 있었으며, 사람들은 그 혁명가만큼이나 그 의자에 대해서도 두려움과 경외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의자는 권위와 영광으로 만해 있었고, 그가 곧 그 의자였다.
_2장 <의자의 영광과 비참> 중에서
부민은 일찍부터 찰흙이나 종이 혹은 나무나 철사 따위를 가지고 뭔가를 만드는 것을 유난히 좋아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교실 안에서 늘 자기 자리를 지키는 비교적 평범한 학생이었다. 2학년 겨울방학이 끝나갈 무렵의 어느 날 저녁에 그는 뭔가 이상한 기운이 자기 속에서 꿈틀거리는 것을 느끼며 거기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순간, 온몸의 살갗이 오그라들면서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가 차분히가라앉아 있을 때 주변 사람들이 느낀다는 그 섬뜩함을 그 자신이 자기 속에서 느낀 것이었다. 그는 공포에 찬 표정으로 무시무시한 외침을 토하며 미친 듯이 방에서 뛰쳐나갔고, 며칠 후 가출했다.
_3장 <웃는 의자> 중에서
계속해서 사람들이 그녀 위에 앉았다가 떠났다. 어쩌면 그녀가 의자로 보이거나 실제로 의자로 변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무거운 사람, 가벼운 사람, 몸 전체를 기대는 사람, 엉덩이만 살짝 걸치는 사람, 털썩 주저앉는 사람, 맵시 있게 엉덩이를 내려놓는 사람, 모두가 무척이나 다양했다. 그중에는 몸이 지나치게 뜨겁거나 체취가 심해서 역겨움이 느껴지는 사람들도 있었고, 몸가짐이 정갈해서 일어설 때 아쉬움을 느끼게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지팡이를 짚은 노인이 앉았다가 떠난 후, 문득 한나는 이제 더 이상 사람들을 자기 위에 앉힐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느새 그녀의 몸이 낡고 오래된 의자가 되어, 한 사람이라도 더 앉으면 부서져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저쪽에서 누군가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때 꿈에서 깨어났다.
_5장 <의자 위에 앉은 악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