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소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지만 어느 곳에든 존재하는 곳 『그곳이 어디든』의 공간적 배경은 한반도 서쪽 끝에 위치한 ‘서리'라는 곳이다. 흩날리는 먼지와 개 짖는 소리뿐인 황량한 곳. 이 낯선 마을, 신기루 같은 공간에 주인공 유가 근무지 발령을 받으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서리'는 이방인에게 늪과 같은 곳이다. 한 번 발을 들여놓으면 빠져나오기 어렵고, 벗어나려고 발버둥칠수록 더욱 빠져드는 곳이다. 인수인계를 해줄 전임자를 만나지 못하고 떠돌이 신세로 전락해버린 유는 서리에서 서서히 감각을 잃어간다. 사건이 전개되는 내내 독자들은 마치 신기루 같은 ‘서리'의 이미지에 갇혀 주인공과 함께 혼돈에 휩싸인다. 살아 있는 모든 감각이 서서히 죽어가는, 그렇게 죽어감으로써 오히려 삶의 진실한 이면과 마주서는 곳. 『그곳이 어디든』이라는 제목이 말해주듯, 서리라는 공간은 소설 속에 축조된 가상의 공간이지만, 동시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의 공간을 오버랩한다. 삶의 본질을 향해 던지는 언어의 투망 주인공이 서리에서 부딪히는 일들은 논리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기이한 사건들뿐이다. 여관방 창밖으로 보이는 산봉우리에 갑자기 붉은 빛이 감도는 기이한 자연현상을 목격하기도 하고, 외지인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무관심, 폭력배들의 얄팍한 꼬임에 두 눈을 멀쩡히 뜨고서 어이없이 당하기도 한다. 이해할 수 없는 이 사건들은 마치 미스터리 영화의 한 장면처럼 다가온다. 그렇게 유는 한동안 서리에서 좌충우돌을 거듭한다. 작가는 정교한 논리와 역설로 사건을 합리화함으로써 독자들을 압도한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진정한 자신의 모습과 삶의 본질을 응시할 수 있게 된다. 그제서야 수수께끼처럼 의문투성이였던 마을의 베일이 벗겨지고, 이제 유는 타의가 아닌, 자의에 의해 서리에 머물게 된다. 그곳이 어디든, 우리는 행복한가 서리에서의 사건들로 만신창이가 된 유는 붉은 빛을 내뿜는 서산봉의 동굴 안에서 다시 한 번 새로운 세상을 만난다. 현실의 끈을 모두 놓아버린 그에게 서산봉 동굴 속의 돌집은 죽음처럼 편안하다. ‘자살'이라는 최악의 방법으로 서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여자, 폭력배들의 감시와 강요 속에서 기록을 통해 서리에서의 삶을 버텨가는 노아의 딸, 영원한 피안의 세계를 준비하는 노아의 돌집, 그리고 죽음을 앞둔 전 남편과 함께 서리를 찾아온 유의 아내……. 서리의 모든 것들이 실체를 드러내는 순간, 그렇게 삶의 본질과 맞닿으려는 순간, 결국 삶은 허무한 신기루처럼 또다시 사려져버린다. 『그곳이 어디든』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모순과 역설,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잠언의 문장들로 빈틈없이 채워져 있다. 현실인 듯 아닌 듯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곳,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지만 어디에든 존재하는 곳 서리에서 작가는 끊임없이 묻는다. 그곳이 어디든 우리는 행복한가, 라고.
■ 줄거리
강산종합리조트에 근무하는 주인공 유는 서쪽의 조그만 읍소재지 마을 서리로 발령을 받는다. 죽음처럼 고요하고 황량한 풍경이 전부인 곳 서리. 지사를 찾기 위해 저녁까지 마을을 방황하던 유는 여관에서 하룻밤을 묵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불 꺼진 방에서 얼굴도 모르는 한 여자와 하룻밤을 보낸다. 여자가 떠난 다음 날, 유는 자신의 지갑이 없어진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다. 이제 유일한 희망은 전임자인 박과장을 만나는 일. 하지만 그와는 여전히 전화 연결조차 되지 않고, 어렵사리 찾아간 지사의 사무실 문은 며칠째 굳게 닫혀져 있다. 기름이 바닥난 자동차는 멈춰 섰고, 유의 주머니에는 돈이 한 푼도 남아 있지 않다. 이제 서리를 떠날래야 떠날 수도 없는 상황. 그렇게 서리를 떠돌던 중 유는 폭력배들의 꾐에 넘어가 결국 그들에게 은행의 계좌번호와 비밀번호를 알려주고 만다. 폭력배들에게 맞아 만신창이가 된 유는 정신이 깨어날 때까지 며칠 동안 술집 ‘왕국'에서 지내고, 그가 깨어나자 술집 여주인은 어차피 이곳에 남아 있을 거라면 ‘노아'라는 노인을 찾아갈 것을 권한다. 노아를 만나기 위해 서산봉의 동굴을 찾아간 유는 그곳에서 진기한 장관을 목격한다. 노아가 방주를 만들듯 수많은 돌집을 짓고 있는 노인. 돌집의 풍경은 마치 공동묘지를 연상시킨다. 유는 이상한 기운에 휩싸인 채 돌집 안에서 오랜만에 아늑하고 편안한 잠을 이룬다. 노아로부터 ‘영원히 살 집'을 짓는다는 말을 듣고 마을로 내려온 유는 폐교에서 살고 있는 노아의 딸을 알게 되고, 그녀로부터 ‘서리' 마을의 역사와 노아가 돌집을 짓고 있는 연유를 듣게 된다…….
■ 본문 중에서
그의 시선이 아래쪽으로 쭉 내려갔다. 그건 좀 이상한 일이었다. 이미 말한 대로 서리가 아주 낯선 지명이라면 그의 눈길은 지도 위에서 우왕좌왕해야 했다. 그런데 마치 미리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푸른 힘줄처럼 뻗은 고속도로를 따라 눈길이 스르르 미끄러져 내려갔고, 그 푸른 힘줄의 끝자락에서 몇 번 왔다 갔다 한 후에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작은 글씨의 서리를 발견해내었던 것이다. 그 사실은 그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순간이지만, 그는 혹시 그곳에 대해 무언가 알고 있거나 경험한 것이 있는지를 짚어보았다. 그러나 그런 건 떠오르지 않았다. 소 뒷발에 쥐가 밟히듯 엉겁결에 일어난 일이라고 결론을 내렸지만 그러나 푸른 힘줄 위를 미끄러지던 눈길의 움직임이 뜻밖에 자연스러웠다는 느낌이 꽤 강렬했으므로 그는 그것을 일종의 징조로 해석하고자 하는 욕망에 붙들렸다. 예컨대 그는 그것을 서리행이 불운이나 낙오, 혹은 일종의 전락의 과정으로 해석될 이유가 없다는 보증으로 받아들이고자 했다. 그의 초조한 마음이 그런 보증을 필요로 했든 안 했든, 그것이 망설임을 걷어내는 데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었다. 불가피하다는 판단이 앞서고, 뒤이어 의외로 전화위복의 기회일지 모른다는 기대가 따라왔다. 물론 그런 판단과 기대는 모두 그의 내부에서 생산된 것이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자기를 긍정하려는 의지는 꿈틀거린다, 그것이 인간이다, 하고 유는 생각했다. 때때로 희망은 급조되기도 하는 법이다. 그렇게 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는 깨달음이 받아들이기 힘든 회사의 처사를 받아들이게 했다. - 본문 중에서(8~9쪽)
“떠날 줄 알았거든요. 아니, 그러길 바랐다는 게 아마 더 정확한 표현일 것 같네요. 왜냐하면, 어떤 일을 겪게 될지 아니까요. 서리는 늪과 같은 땅이에요. 자기 힘으로 헤쳐 나가 보려고 하지만 몸이 계속 안으로 빨려 들어갈 뿐이지요. 여기선 아무도 행복할 수 없어요. 되도록 빨리, 그러니까 늪에 몸이 조금만 빠졌을 때, 다리를 들어 올려 제 힘으로 빠져나갈 수 있을 때 달아나야 해요. 그게 최선이에요. 물론 이곳으로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와요. 선택한 것이 아니라 보내진 거지요. 그런 점에서 불가항력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옛날에도 그랬는데 요즘도 그래요. 서리가 귀양지로 유명하다는 건 알지요? 쉽게 빠져나갈 수 없는 이곳의 독특한 지형 때문이에요. 그때나 지금이나 어쩔 수 없는 사람들이 여기로 와요. 사람들은 들어오는 것이 불가항력이었기 때문에 나가는 것 역시 그러하다고 지레 단정해버리는 경향이 있어요. 이건 아닌데, 아닌데, 하면서도, 벗어나 보려는 시도를 하지 않아요. 어어, 하다 보면 이미 몸이 늪에 깊이 잠겨 있고, 뒤늦게 허우적거려 보지만 어쩔 수 없고…….” - 본문 중에서(161쪽)
감각이 날뛰는 한 누구도 평화로울 수 없는 법이다. 날카롭게 벼려질수록 성가신 것이 감각이다. 죽은 자가 왜 평화로운지 말할 수 있다면 세상살이가 왜 성가신지도 대답할 수 있다. 감각은 살아 있다는 징표이면서 모든 불화들의 근거이다. 평화로운 자는 감각을 잃거나 버린 자이다. 살아 있는 채로 감각을 잃거나 버리는 일이 가능한가? 하고 질문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 아니다. 그러나 그 질문에 답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기 쉽다. 왜냐하면 어느 쪽으로 답하든 그 내포하는 바는 같기 때문이다. 감각 없이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냐는 질문에 대해 불가능하다고 답하는 것은 감각의 부재와 죽음을 동일시한 결과이다. 반대로 그것이 가능하다고 답하려면 죽음을 사는 삶을 전제해야 한다. ‘죽음을 사는 삶'은 죽었기 때문에 삶이 아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기 때문에 죽음이 아니다. 구리거울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아서 선명하지는 않지만, 유는 그런 상태, 삶도 아니고 죽음도 아닌, 감각의 유무로 삶과 죽음이 결정되지 않는, 차원이 다른 삶을 어렴풋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해한다기보다 그런 상태를 감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는 돌집에 누운 여자의 지극히 평화로운 얼굴을 바라보면서 그 얼굴의 평화가 감각을 잃어버린 데서 비롯한 평화인지 감각을 버린 데서 말미암은 평화인지 궁금해 했다. 어느 한쪽을 지지하거나 기대했다는 건 아니다. 감각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여자의 표정이 그만큼 인상적이었다는 뜻이다. - 본문 중에서(235쪽)
『그곳이 어디든』은 의젓한 허무주의와 근본적 회의주의로 무장하고 있다. 만만치 않다. 생에 대한 가장 근원적 지점까지 질문을 밀어붙이는 치열성은 독자를 얼얼하게 만들 정도이다. 이승우의 문장은 구체적이면서도 근원적이지만 추상적 주관성에 매몰되지 않는다. 신과 배반, 비겁과 도피가 아무렇지 않게 한 문장 안에서 얽히고 대치한다. 어느 하나 쉽게 놓칠 수 없는 이 문장들은 스스로 “사소하고 시시한 이야기”이기를 거부한다. 이것은 소설로 구체화된 삶이며 소설보다 더 오래된 영원의 잠언으로 격상된다. - <작품해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