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알베르토 코르다 Alberto Korda(1928~2001) 본명은 알베르토 디아즈. 검은 베레모를 쓰고 예언자처럼 먼 곳을 응시하는 체 게바라의 실물 사진을 찍은 쿠바 사진작가. 전 세계 좌파운동가와 학생들에게 용기를 주는 상징물로 자리잡은 이 사진은 코르다가 혁명 정부의 기관지인 《혁명》지의 기자로 활동하던 1960년 3월 쿠바 아바나 광장에서 열린 혁명기념식에서 찍은 두 장의 사진 중 한 장이며, 체 게바라의 유일한 실물 사진이다. 이 사진은 1968년 세계적인 진보운동의 물결과 함께 각종 T-셔츠와 문화상품에 이용됐지만 코르다는 로열티를 요구하지 않았다. 하지만 2000년 러시아의 보드카 회사가 광고에 체 게바라의 사진을 이용하자 코르다는 ‘게바라의 품위를 떨어뜨린다'며 이 회사를 고소했고 재판에서 승소해 받은 5만 달러를 쿠바 의료복지 기구에 전액 기부했다. 2001년 자신의 사진 전시회가 열리고 있던 프랑스 파리를 방문했다가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 옮긴이 이재룡 1956년 강원도 화천에서 태어나 성균관대학교 불문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브장송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옮긴 책으로 『일 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장의사 강그리옹』 『해를 본 사람들』 『거대한 고독』 『사랑하기』 등이 있으며, 현재 숭실대 불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 이 책은…… 체 게바라를 세상에 알린 사진으로 유명한 쿠바의 사진작가 알베르토 코르다의 『코르다의 쿠바, 그리고 체』가 현대문학에서 출간되었다. 아름다운 여인들을 사랑했던 패션전문 사진가였던 그는 1959년 카스트로의 혁명이 성공한 후 새 정부의 기관지인 《혁명》지의 수석기자로 들어가게 된다. 그런 후 코르다는 쿠바의 영도자 피델의 개인 사진사가 되었고 이름 없던 체 게바라를 군중 속에서 포착해냄으로써, 그와의 운명적인 만남의 결정적 계기를 갖게 된다. 이때 코르다가 찍은 체 게바라, 그 한 장의 사진은 전 세계 좌파운동가의 상징으로 자리잡는다. 세계적인 진보운동의 물결과 함께 그 사진은 각종 티셔츠와 문화상품에 이용됐지만 코르다는 로열티를 요구하지 않았다. 단, 2000년 보드카 회사가 광고에 체 게바라의 사진을 사용했을 때 ‘체 게바라의 품위를 떨어뜨린다'며 이 회사를 고소했고, 재판에서 승소해 5만 달러를 받았으나 이를 쿠바 의료복지 재단에 전액 기부하는 유명한 일화를 남겼다. 체 게바라를 전 세계 혁명의 표상으로 만든 코르다의 감동적인 80여 편의 사진들이 담긴 이 사진집은 코르다가 사망하기 전에 기획된 것으로, 미발표 사진들이 다수 포함되었으며, 그가 유언장처럼 남긴 처음이자 마지막 사진집이 되었다. 안타깝게도 그는 2001년 5월 자신의 사진 전시회가 열리고 있던 프랑스 파리를 방문했다가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피사체와 함께 역사적인 순간들을 불꽃처럼 아름답게 살려놓은 『코르다의 쿠바, 그리고 체』에는 코르다가 《혁명》지의 기자로 일하면서 찍은 피델 카스트로, 사르트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남자”라고 칭송한 체 게바라와 그들에게 열광하는 민중들, 그리고 쿠바의 역사적 순간들이 생생히 기록되어 있다. 아름다운 산문과 함께 수염이 덥수룩한 게릴라 지도자 피델의 감성에 호소하는 연설 모습, 스키를 타고 골프를 치는 그의 유머 있는 일상적이고 평범한 모습들, 그리고 혁명의 완수를 위해 싸우며, 전 세계인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 휴머니스트 체 게바라의 삶의 모습 등이 담긴 사진들은 매우 감동적이다. 코르다는 체 게바라에 대해 “강철의 강인함과 장미의 부드러움을 겸비한 …… 늑대인간을 거부하고 새로운 인간을 기원했던 사람”(본문 158p)이라 평했고, 피델에 대해서는 “그에게 유머가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니!”(본문 146p)라는 말로 일축했다. 또한 본명 알베르토 디아즈에서 알베르토 코르다로 불리게 된 재미난 에피소드들이 흥미롭게 소개되어 있으며, 패션계를 장악했던 그의 감각적 에로티즘이 넘치는 광고사진들도 삽입되어 흥미를 끈다. 이 책은 코르다가 전 생애에 받쳐 추구했던 그의 미학세계와 쿠바 역사라는 거대한 운명의 수레바퀴를 읽을 수 있는 큰 수확이 아닐 수 없다. ■ 본문 중에서 감각적 에로티즘이 넘치는 아름답고 우아한 여자들이 의상과 향수, 혹은 비누를 광고하는 지면이었다. 코르다는 쿠바에서 패션사진과 광고사진의 선구자가 되었다. … 코르다는 갓 창간된 일간지 《혁명》의 일원으로 호출되었다. 그때가 1954년 초 무렵이었고 쿠바의 운명은 현기증날 정도로 뒤바뀌기 시작했다. … 1959년 4월 피델 카스트로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코르다는 취재단의 일원이 되어 그를 동행했다. 그는 매일 쿠바의 지도자를 따라다니며 이 기막힌 역사적 사건을 기록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9p 코르다는 적지 않은 사진 작품을 남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수년 뒤 전 세계에 알려지고 인정받은 것은 겨우 이 사진 한 장 덕분이었다. 코르다는 정열적으로 살았고 일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린 사람이었다. 그는 미학자이자 쾌락주의자로서의 소명의식을 가졌고 항상 자기 마음에 드는 일만을 하고 살았다. 그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마음대로 살 수 있었지만 조국을 택했고 자기의 일을 제대로 해냈음을 의식하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평화로움이 깃든 바닷가의 작은 아파트에서 자신의 방식대로 사랑했던 친구들과 아름답고 젊은 여인들 사이에서 살았다. -11p “나는 이 사진의 제목을 <다윗와 골리앗>이라고 붙였다. 이 사진을 피델에게 준 뒤부터 그는 신문사를 통하지 않고 내게 직접 연락을 취했다. 그러나 나는 그의 공식 사진기자가 되지 않았다. 아니다. 나는 그의 개인적 사진사였다. 나는 어떤 직함도 없었고 월급도 받은 적 없다.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그때부터 피델은 명령을 내리는 지도자, 사진을 찍기 위해 졸졸 따라다녀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모든 것에 시시콜콜 관심을 갖는 아주 인간적이고 다가가기 쉬운 한 인간이 되었다.” -76p “이것이 그 다음날 《혁명》지 1면에 실린 사진 중 하나다. 피델이 한 손에 수류탄을 치켜들고 연설하면서 ‘조국이 아니면 죽음, 우리는 승리하리라!'라는 선동적 명령을 외치는 장면이다. 그런데 내가 찍은 체의 사진은 신문에 실리지 않았다. 그 사진은 일 년 후인 1961년 4월 게바라 대장의 텔레비전 출연을 예고하는 기사에 쓰였다.” -84p “이듬해 다시 소련을 찾은 피델은 니키타와 함께 난생처음 스키를 신어봤다. 그는 금세 제법 스키를 탔다. 어느 날 그는 얼어붙은 강 위에서 스키를 타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는 그들을 부르더니 자기도 한번 해보고 싶다고 했다. 처음에는 제법 타는 것 같더니 그만 넘어져 완전히 눈사람이 되었다! 그는 호탕하게 웃었다. 그는 내게 이 사진을 공개하지 말라고 한 적이 없다. 그런데도 그가 유머가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니!” -146p “체는 프랑스 기술자와 함께 개발한 신형 사탕수수 수확기인 알자도라를 시험운전하고 있었다. 내가 찾아갔을 때 당시 복용하고 있던 코디손 때문에 조금 부은 얼굴은 기름때와 흙먼지로 새까맸다. 그는 냉소 섞인 놀란 표정을 지으며 나를 쳐다보더니 ‘아, 코르다, 자네 왔군. 어디에서 오는 길인가? 시골인가, 도시인가?' ‘나요? 아바나에서 오는 길입니다, 대장.' ‘사탕수수를 추수해본 적 있나?' ‘아뇨.' 그러나 그는 곁에 있던 군인에게 말했다. ‘알프레도, 이 기자 동무에게 추수용 칼을 구해주게.' 그러고 다시 나를 돌아보며 ‘사진촬영은 다음 주에나 합시다'라고 했다.” -156p 십자군 용차처럼 그는 그가 꿈꾸던 새로운 인간상을 체현하려고 했던 것이다. “우습게 들리겠지만 이 말은 꼭 해야겠습니다. 진정한 혁명용사는 커다란 사랑의 감정으로 움직입니다. 이것이 아마 정치 지도자들의 가장 큰 비극 중 하나일 것입니다. 열정의 가슴에 차가운 지성을 겸비해야 하고 눈 한번 깜빡거리지 않고 고통스런 결정을 내려야만 합니다. (……) 이런 상황에서 독단주의에 빠지지 않고 차가운 박식주의에 빠지지 않고 대중과 유리되지 않으려면 무한한 인류애, 정의와 진리에 대한 뛰어난 감각을 가져야만 합니다.” … “때가 되면 나는 남미의 다른 나라의 혁명을 위해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고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다…….” 1965년 3월 그는 사라졌다. -158p 안락한 삶이 보장되었던 변호사와 의사가 총을 들었다. 카스트로와 게바라가 열대밀림에서 고난의 행군을 할 때 그 뒤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던 제3의 남자가 있었다. 그의 손에는 총 대신 카메라가 들려 있었다. 그가 찰나에 포착했던 체 게바라의 얼굴에는 분노와 연민, 좌절과 투지, 두려움과 희망이 한꺼번에 녹아 있다. 필경 인간의 얼굴이 지을 수 있는 가장 복잡한 것일 법한 그의 표정은 모나리자의 수수께끼와 견줄 만하다. 이 사진은 전 세계로 퍼져 학생 방의 포스터, 노동현장의 걸개그림, 락 스타의 티셔츠, 심지어 보드카의 상표로 거듭나면서 사진의 역사상 가장 많이 복제된 20세기의 아이콘으로 기록되었다. 원래 예쁜 여자가 너무 좋아서 그 아름다움을 간직하고자 잡았던 카메라가 왜 굳이 피사체를 혁명으로 바꿨는지 모르겠다. 하긴 알베르토 코르다는 부질없고 헛된 것만을 골라서 찍었던가 보다. 카메라 뒤에 숨어 있던 코르다도 작품집이 나오기 바로 전 해에 파리에서 죽었다. 이제 여자와 혁명, 그리고 이 둘을 사랑했던 사람마저 사라지고 사진만 남았다. 사랑과 혁명이 지난밤 꿈처럼 사라진 시대, 그의 묘비명에 “꿈을 찍었던 남자”라고 새겨두면 좋을 듯싶다. ―옮긴이 이재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