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기원과 역사, 그리고 예수님의 생애를 신약성서를 통해 새롭게 조명한 연구서. 종교학자이자 고고학자로, 예수의 가족 무덤과 생부 무덤 발굴 작업 등에 직접 참여한 저자는 발굴된 고고학적 자료에 대한 과학적 테스트를 거침으로써, 기독교의 기원과 역사, 그리고 예수님의 생애에 관한 신빙성 있는 해석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이제까지 여러 신약성서연구자가 기독교를 연구하며 간과해온 신약성서 자체의 문제를 지적한다. 복음서 간의 서로 일치하지 않는 기록을 집어내고, 고의적으로 숨겨지거나 지워져버린 예수의 메시아운동을 유대민족의 해방운동으로 추정하고, 예수가 죽을 때까지 가족과 함께 행동했다는 것을 확인하는 등 신약성서의 문제되는 구절을 역사적 사실과 비교 분석하고 있다.
지은이 제임스 D. 타보르 현재 샬로트 소재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의 종교학과 학과장으로 재직 중이다. 시카고 대학에서 성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사해문서와 기독교의 기원에 관한 전문가이다. 기독교 관련 저서를 여러 권 낸 바 있는 저자는 이런 주제에 대한 자문역으로 TV와 라디오 프로그램에 수없이 출연하였다. 옮긴이 김병화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를 졸업하였으며, 같은 대학원 철학과에서 석사, 박사 과정을 수료하였다. 현재 전문번역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기획/번역 네트워크 '사이에'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역서로는 [쇼스타코비치의 증언] [나의 기쁨과 슬픔 : 첼리스트 카잘스] [이 고기는 먹지 마라?] [수량화 혁명] [악마] [트리스탄 코드 : 바그너의 철학]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 [세기말 비엔나]등이 있다.
■ 책의 내용은 『예수 왕조』에서 제임스 타보르는 다음과 같이 몇 가지 파격적인 문제 제기로부터 예수의 기원을 파헤쳐 내려가고 있다. 첫 번째는, 저자는 무염수태설이 사실상 신약성서 속에서 부정되고 있음을 토대로, 예수의 생부였을 가능성이 있는 인물로, 독일의 바트 크로이츠나흐라는 마을에서 발견된 무덤의 주인공인 로마 병사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압데스 판테라'가 탈무드 등의 고대문헌 속에 언급되고 있는 예수의 아버지 판테라와 동일인일 확률이 매우 높다는 것을 들고 있다. 두 번째는, 예수의 사도들은 마가복음에 나와 있는 예수의 네 남동생과 두 누이동생을 마리아를 ‘성처녀'로 만들기 위해 성서에서 거의 누락시키거나 거의 그림자에 불과할 정도까지 격하시켰다는 점을 지적한다. 하지만 신약성서 여러 곳에서 읽어낼 수 있는 것처럼 예수는 메시아 운동을 시작하기 이전부터 죽을 때까지 가족들과 함께 행동했다는 것이다. 이는 공동체 생활을 영위하는 유대민족의 자연스러운 관습이자, 다윗 왕계를 잇는 가계의 중요한 결속이 되었다는 것이다. 세 번째, 세례 요한을 예수의 스승이자 메시아 운동의 창시자로 재평가 한다. 성서에서는 세례 요한을 예수를 소개한 뒤 곧바로 사라지는 보조적인 인물로 묘사했지만, 세례 요한은 예수의 6촌 외척으로 메시아 운동의 초안을 먼저 마련한 사실을 지적한다. 이들 두 메시아의 운동은, 구약의 예언자들이 말했듯이 지상에 신의 왕국이 세워지고 유대민족이 부활할 것을 기대하는 묵시록적 운동이었으나 현실적으론 로마에 대한 반란으로 인식되어, 결국 세례 요한이 참수당하는 사태를 초래했음을 든다. 네 번째, 저자는 예수는 메시아 운동을 시작하며 이스라엘의 12부족을 다스리기 위한 12인 위원회의 위원을 임명했는데, 그 12인 위원 가운데는 그의 형제 넷이 포함되어 있었음을 상기시킨다. 예수가 로마인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힌 뒤, ‘공정한 자'이자 ‘사랑받는 사도'인 예수의 동생 야고보가 지도권을 이어받고, 새로이 지도권을 이어받은 야고보 역시 요한, 예수와 마찬가지로 스스로를 독실한 유대교도로 생각했으며, 새로운 종교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는 점, 야고보 역시 메시아 운동을 펼치다 죽임을 당하고, 메시아 운동의 지도권은 동생 시몬, 그리고 유다에게로 이어지며 그 ‘왕조'가 이어졌다는 것이다. 다섯 번째, 예수의 본래 메시지를 변형시키고 현재의 기독교 세계를 구축한 대표적인 인물을 바울로 본다. 바울은 야고보 및 예루살렘에 있던 예수 추종자들과 단절을 겪으면서, 그 자신이 마치 메시아 운동의 지도자인 양 전면에 나서서 자신이 경험한 계시를 근거로 하는 메시지를 설파함으로써 탈 유대교적, 친 로마적, 이교도 중심으로 변형되어, 어떠한 비판이나 여과 없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기독교 교리 근간을 이루게 했다는 점을 시사한다. 타보르는 초기 기독교가 남긴 여러 자료들을 통해 유대인들의 영적, 사회적, 정치적 구원을 추구하는 운동, 예수와 형제들에 의해 주도된 메시아 운동의 당시 의미와 기독교 기원에 대해, 저자가 말하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중요했던 ‘한 순간'(예수의 나이 30세에서 33세까지)에 대한 예리한 통찰로 성서 연구의 장을 넓히고 있다. 또한 그는 고고학과 인문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최대한 객관적인 증거들을 제시함으로써 기독교 역사 연구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 해외 서평 많은 학자들이 예수 및 그가 남긴 유산을 연구해왔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예수 왕조』처럼 대담하고 도발적인 주제를 감히 다룰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학문적 역사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폭 넓은 시야와 상상력 풍부한 재구성이라는 점에서, 이 저작은 틀림없이 이제까지 대중이 본 적 없는 책이 될 것이다. ―바트 에어만Bart D. Ehrman(노스캐롤라이나 대학 종교학과 과장) 제임스 타보르는 그와 동년배의 성서 연구자들 가운데서도 1세기의 문헌 증거의 전 영역을 철저하게 파악하고 있으며, 고고학적 발굴 경험이 풍부하고 상상력과 독창성이 뛰어난 점에서 두드러지는 인물이다. 타보르는 오랜 세월을 거쳐 살아남기는 했지만 사방에 흩어져버린 단편적인 증거들을 끼워 맞춰 결정적으로 중요한 종교 운동의 윤곽을 파악해내는 놀라운 재능을 지녔다. 예수의 경력을 진지하게 다루려는 사람이라면 타보르의 대담하고 참신한 종합을 반드시 고려해야 할 것이다. ―유진 V. 갤러허Eugene V. Gallagher(코네티컷 칼리지, 로즈메리 파크 종교학 연구 교수) ■ 본문 중에서 ‘축복받은 성처녀 마리아'가 일체의 성경험이 없는 ‘영원히 처녀'였다고 주장한다면 예수의 동생과 누이들은 어떻게 해서 생겨난 존재인지가 해명되어야 한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마리아를 ‘영원한 처녀'로 보는 사람들을 무시하기 때문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언제, 어떻게, 그리고 왜 이런 견해가 발전되었는지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훌륭한 역사가 독실한 믿음의 적이 될 필요는 절대로 없다. 갈등이 생기는 것은 후대의 금욕적 경건성과 ‘성스러움'의 가정이 교리적이거나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문화에 강요되기 때문이다. 사라져버린 것은 그 당시에 유대인 기혼 여성인 마리아가 정말로 어떤 사람이었는가 하는 역사적 진실이다. ―본문 111p 중에서 기독교도라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예수의 산상수훈의 메시지에는 그것이 요한과 예수 모두가 공유하고 가르쳤던 메시지의 일부라는 증거가 있다. 예수와 요한은 자신들이 함께 부름받았다고 믿었던 과업의 완전한 동반자가 되었다. 하지만 일단 기독교 신학의 베일을 걷어내고 나면 요한에 대한 예수의 존경심을 우리는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예수에 따르면 요한은 “예언자 이상의 존재”였고, “여자에게서 태어난 사람으로 그보다 더 위대한 인물은 없으”며, 그는 “토라와 예언자들이 말해온 바로 그 사람”으로서 “세계를 구원”하러 왔다. 그 다음해인 서기 27년이 우리 기록에서 대체로 공백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 해는 두 메시아의 합동작업이 이루어진 해였으며, 지금은 기독교의 역사와 기억에서 사라진 해이기 때문이다. ―본문 194p 중에서 역사적 사실들은 간단명료하다. 예수는 세례 요한의 운동에 가담했고, 요한에게서 “죄를 지은 데 대한 회개의 세례”를 받았다. 그런 다음 그는 요한과 손을 잡고 단번에 전국에 퍼지기 위한 전략적 움직임을 벌였다. 예수는 세례, 즉 요한의 것과 동일한 세례를 하고 설교하고 실천했다. 그들은 동지였고, 그들의 메시지나 작업 방식이 달랐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다. 예수의 어머니, 형제들, 누이들이나, 베드로나 안드레아, 어부인 야고보와 요한, 빌립, 나다니엘 그 외에 사도로서 그와 함께 활동한 모든 사람들도 요한의 세례에 응답했다. 예수의 제자나 사도 가운데 누구도 일단 ‘기독교도'가 된 뒤 세례를 다시 받았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 ―본문 211p 중에서 후대의 기독교 전승은 예수가 제자들과 가진 최후의 만찬을 목요일 저녁이라고 보고, 십자가에 매달린 것이 금요일이라고 본다. 이제 우리는 그것이 하루 틀렸음을 알고 있다. 예수의 최후의 만찬은 수요일 저녁이었고, 그가 십자가에 매달린 것은 목요일, 히브리 달력으로 니산 달의 열네 번째 날이었다. 유월절 만찬 자체는 목요일 저녁, 해가 질 때, 니산 달의 열다섯 번째 날이 시작될 때 먹는다. 예수는 유월절 만찬을 끝내 먹지 못했다. 그는 목요일 오후 3시에 죽었다. ―본문 278p 중에서 유월절 휴일 때문에 예수의 시체가 임시 무덤에 서둘러 안치되었으므로 가족들은 아마 예수의 최종 장례식을 최대한 빨리 완결 지으려 했을 것이다. 유대 전통에 따르면 시체는 가능한 한 죽은 지 스물네 시간 안에 매장되어야 한다. 사랑하는 이의 맨몸을 씻고 향유를 바르는 것은 헌신의 친밀한 행위이다. 그들은 토요일 저녁 황혼녘에 그를 옮기고, 예루살렘의 모처에 있는 영구적 무덤으로 그를 데려가서, 유대식 관습에 따라 매장하기 위해 시체를 손질했을 것이다. 무덤은 어두우므로 내부에 기름등잔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그들은 토요일 해가 진 뒤에도 일을 쉽게 진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요한의 설명을 믿는다면, 무슨 이유 때문인지 마리아 막달라는 여기에 참석하지 못했고, 일요일 아침 일찍 아직 어두울 때 혼자 왔다가 무덤이 빈 것을 알았을 것이다. ―본문 326~327p 중에서 베드로가 12사도 그룹에서 두드러진 존재로 격상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기독교 운동에서 예수의 계승자이자 만장일치의 지도자가 된 것은 예수의 동생인 야고보였다. 다윗 후손인 지배자 예수는 그들에게서 사라졌다. 야고보는 다윗 혈통에서 그 다음 차례의 왕족이었다. 예수의 죽음은 정치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그 운동의 종말이 아니었다. 예수 왕조는 그가 죽은 뒤에도 일백 년 이상 계속된다. 하지만 만약 사실이 그렇다면 예수 왕조의 상속자인 야고보가 어쩌면 이토록 거의 철저하게 기독교 기원에 관한 이야기에서 누락될 수 있었을까? 그리고 더 중요한 물음이지만, 왜 그랬을까? 야고보는 기독교 미술과 성상화聖像畵에도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마치 그의 존재 자체가 완전히 잊혀진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시야에서 숨겨진 역사에는 그가 등장한다. ―본문 341p 중에서 20세기의 위대한 유대인 철학자인 마르틴 부버Martin Buber의 말처럼, “나는 예수를 믿지 않지만 그와 함께 믿는다. 나는 유대인 공동체가 되살아나는 과정에서 예수를 종교적 역사 속에서의 하나의 위대한 인물로서만이 아니라 수천 년 동안 이어져왔으며, 이스라엘과 세계의 구원을 최종 목적으로 하는 메시아 발전의 유기적 맥락에서도 인정하게 될 것으로 굳게 믿는다.” 유대인들이 거부한 것은 예수라기보다는 예수를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로 보고, 토라를 무효화했으며, 유대 민족과 계명을 축출한 기독교 신학 체계였다. 유대인들은 세계가 본질적으로 구원되지 않았음을 예민하게 느끼고 있다. 예수가 결코 유대인을 위한 유일한 메시아일 수는 없다 하더라도, 다윗 왕가의 후손으로서 완성되지 못한 메시아 프로그램을 시작한 그는 역사적 척도로 볼 때 틀림없는 메시아 가운데 한 명이다. 이것이 바로 부버의 위대한 통찰이다. 예수가 죽은 뒤에도 희망을 계속 품고 메시아에 의한 구원을 위해 노력했으며, 히브리 예언서를 근거로 하는 성서의 윤리를 신봉한 야고보 및 그 밖의 예수의 원래 추종자들의 시각이 복원된다면 이제까지 간과되어온 유대인과 기독교도 사이의 통합과 이해의 지점이 마련된다. ―본문 436p 중에서 이제까지 접한 책 가운데 예수에 관련된 성서의 여러 어긋난 내용들을 이 책만큼 명쾌하게 해명하고 바로잡은 책이 없는 것 같다. 또 성서에 나오는 불분명한 호칭과 시간 개념 등을 분석하는 작업, 예수의 생부로 추정되는 인물을 추적하는 과정, 복음서 저자들이 저마다 은폐하고자 했으나 미처 은폐하지 못한 사실적 힌트를 추적하는 과정, 이런 것들이 마치 유능한 탐정의 수사를 곁에서 지켜보는 듯한 재미를 준다. 저자가 문헌비평만이 아니라 역사적, 고고학적 자료를 동시에 활용하기 때문에 그만큼 상상력의 범위가 더 넓어질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우리가 저마다 기독교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든 간에, 각자의 입장을 한번쯤 비판적인 눈으로 돌아보기 위해 반드시 읽어볼 필요가 있는 책이 아닌가 생각된다. ―‘옮긴이의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