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경을 죽이러 갑니다.”
담담한 말투였지만 강한 살기가 느껴졌다. 어장은 평소 모든 면에서 자존심이 매우 강했다. 그런데 장소경의 함정에 빠져 팔까지 부러지자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 용파는 복수심에 불타는 어장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장소경은 당연히 성을 나가지 않았겠나? 그렇게 멍청할 리가 없잖아.”
“그자는 그렇게 멍청합니다. 그자가 정안사로 돌아가는 걸 봤습니다. 보고만 아니었다면 벌써 뒤쫓았을 겁니다.”
어장이 고집스럽게 대꾸했다.
“정안사로 갔다고? 제 발로 호랑이 굴에 들어갔단 말이야?”
용파가 의아해하며 되물었지만 어장도 장소경의 돌발 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용파가 정원 한편의 물시계를 힐끗 봤다. 해정이 조금 넘었다.
“괜히 쓸데없는 일에 힘 빼지 마. 곧 마지막 단계가 시작될 거야. 일단 우리 임무부터 확실히 처리해야 하니 장소경은 그냥 내버려 두게. 어차피 이제 위협적인 존재도 아니니까”
_하권, 본문 12~13쪽
힘들게 창고 안에 들어서자 사방에서 불꽃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창고 나무 기둥이 아직 버티고는 있지만 이미 많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금 가진 장비만으로는 통로를 만들기가 어려워 몇 번이나 앞으로 나가려다 뜨거운 열기에 뒷걸음질 쳤다. 대나무는 불에 약하기 때문에 그 조각들은 어쩌면 가장 먼저 재가 돼버렸을지 모른다. 목숨 걸고 들어가봤자 소용없을 수도 있다. 장소경이 헉헉거리며 조금씩 뒤로 물러서는데 갑자기 좌측 곁채에서 섬뜩한 파열음이 들려왔다.
“안 돼!”
_하권, 본문 27~28쪽
태자는 무소뿔 술잔을 쥐고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하지만 손목의 떨림이 멈추지 않아 찰랑찰랑하던 술이 계속 흘러내려 양탄자를 적셨다. 즐거워하는 주변 사람들과 달리 태자 얼굴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조금 전 수하로부터 보고받은 바에 따르면, 정안사 상황은 단기가 말한 것보다 훨씬 심각했다. 이필이 비부에게 납치됐고 우상이 혼란을 틈타 정안사를 장악해버렸다. 이 모든 사달의 원흉은 비부와 결탁한 장소경이라고 했다.
태자는 이필이 원망스러웠다. 그 사형수를 기용하겠다고 그렇게 고집을 부리더니 결국 이 사달이 벌어졌다. 태자는 윗자리를 힐끔 봤다. 만약 이 사실이 부황의 귀에 들어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_하권, 본문 46쪽
침묵의 괴물이 병사들 사이에 뛰어들자, 침묵은 곧 공포로 바뀌었다. 고함과 비명이 난무하는 가운데 칼질 한 번에 한 명씩 숨이 끊어졌다. 한두 병사가 겁 없이 장소경을 막아보려 했지만 전혀 상대가 되지 않았다. 장소경 손에 붙은 칼은 모양이 아주 특이했는데 무엇보다 아주 예리하고 단단했다. 많은 사람을 베고, 베고, 또 벴는데 전혀 무뎌지거나 휘어지지 않았다. 한 칼에 한 사람씩 죽어나가니, 순식간에 시체가 수북이 쌓였다. 나머지는 장소경 위세에 눌려 정원 밖으로 도망쳤다. 그는 잔인하고, 지독하고, 악랄하고, 고집스럽게, 끝장을 보는 것으로 온 장안에 이름을 떨친 오존염라였다. 그런데 오늘은 ‘미친 듯이’라는 한 가지가 더해져 육존염라가 됐다. 10여 개 등롱 불빛이 정원을 환히 밝히는 가운데, 바닥을 흥건히 적신 핏물에 잔혹하고 고독한 칼잡이의 그림자가 비쳤다.
_하권, 본문 79쪽
■ 작가, 옮긴이의 말
“광활하고 질서 정연하게 뻗은 위대한 장안에는 수많은 인종과 다양한 사람이 구름처럼 모여 살았다. 풍류와 멋을 아는 문인, 혁혁한 전공을 세운 무인들이 다양한 관계를 맺으며 화려하고 다채로운 문화와 인생을 꽃피웠다. 다양한 가능성을 품은 이 도시는 창작자가 무한한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매우 이상적인 무대이다. 시공의 한계를 뛰어넘는 매력적인 도시, 고전과 현대적 요소를 두루 갖춘 장안에서는 그 어떤 시도도 어색하지 않았다.”
_마보융
중국 역사상 최고의 황금기, 당나라 때의 장안은 인구가 1백만 명에 이르는, 세계 최대 규모의 국제 도시였다. 당태종 이세민, 측천무후, 현종과 양귀비, 이백, 두보, 백거이, 안녹산 등 우리에게도 친숙한 수많은 역사적 인물들이 등장한 무대이기도 하다. 작가 마보융은 역사와 허구의 경계에서 미묘한 균형을 유지하면서 뛰어난 글 솜씨로 장안의 숨은 역사를 꺼내놓는다. ‘문학 귀재’라는 별명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_옮긴이 양성희
미스터리, SF, 판타지 등 역사를 기반으로 한 다양한 문학 장르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전방위적 엔터테인먼트 작가, ‘문학 귀재’ 마보융의 『장안 24시』가 현대문학에서 출간되었다. 소설은 ‘서양에 로마가 있다면 동양에는 장안이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찬란했던 인구 100만의 대도시 장안에서 일어난 하루를 다룬다. ‘천보 3재 원소절, 장안에 큰불이 있었다’는 역사서 속 짧은 기록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고대 국제도시를 배경으로 한 대(對)테러전으로 재탄생한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뛰어난 필력으로 두각을 나타내며 데뷔한 마보융은 다년간의 유학생활을 거쳐 외국계 기업에서 근무한, 만주족 출신의 젊은 작가이다. 기존의 중국소설과 차별화된 세련미와 간결함, 흡인력 넘치는 문장과 유머 감각으로 독자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그는 철저한 조사와 고증을 바탕으로 한, 오늘날의 현실을 반영한 작품들로 ‘5·4 혁명 이후 중국 역사소설의 계보를 잇는 대표적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중국의 히가시노 게이고’로 불릴 정도로 스타성을 인정받는 마보융은 발표한 전 작품을 출간과 동시에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려놓았다. 문학성과 대중성을 겸비한 그의 다음 행보를 세계가 주목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한 사람의 목숨으로 많은 사람의 목숨을 살릴 수 있다면, 어찌하겠는가?”
백만 장안 백성의 목숨을 건 위험한 게임, 그 장중한 결말
마보융은 역사서에서 단순하고 평면적으로 기록된 사건을 입체적으로 재현하고, 허구의 인물과 실재했던 역사 속 인물들을 함께 등장시켜 개연성 뛰어난 한 편의 팩션(Fact+Fiction)을 완성해낸다. 작가는 모든 규칙과 권위적인 것을 거부하는, 혁신적인 가상의 인물 장소경을 주인공으로 설정한다. 그리고 훗날 명재상으로 혁혁한 공을 이룬 이필, 구밀복검(口蜜腹劍)의 유래인 간신 이임보, ‘안사의 난’으로 당나라를 뒤흔든 안녹산, 나라를 기울게 한 현종과 양귀비 등 역사의 실존 인물들과 자연스럽게 엮어 이야기의 리얼리티를 한껏 살려냈다.
『장안 24시』를 이끌어가는 두 개의 큰 축, 장소경과 이필은 ‘한 사람을 희생시켜서라도 많은 사람을 구하는 것’에 뜻을 같이하지만, 당 황제의 목숨까지 위협하는 상황이 되자 서로 대립하게 된다. 천자(天子) 중심의 세계관과 인간의 귀천을 나누는 사고를 벗어나지 못하는 등장인물들 사이에서 오직 백성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다해 고군분투하는 장소경의 모습은 깊은 울림을 준다. 『장안 24시』는 역사상 가장 화려한 전성기를 이루고도 결국 간신들의 권력 다툼을 막지 못한 당 왕조 몰락의 서막을 장식하고, 오늘날까지 반복되는 실패의 역사를 이 ‘결정적 하루’를 통해 극명하게 보여준다. 작가는 역사의 악인뿐만 아니라 조정에 대한 충성심과 자신만의 정의감에 사로잡힌 사람 역시 백성의 목숨을 담보로 한 ‘정치 놀음’을 하고 있을 뿐이라고 냉소적인 시선을 던진다.
화려한 볼거리, 생동감 넘치는 묘사 그리고 치밀한 고증
인구 백만의 8세기 장안을 완벽하게 재현한 역사 엔터테인먼트 소설
●『장안 24시』가 완성되기까지
작가 마보융은 주요 인물, 주요 사건 중심의 역사 기록에 더해, 8세기 장안 백성들의 생활양식, 복색, 풍습, 당의 제도와 저잣거리 물가, 장안 하수도 설계까지 당시 평범한 사람들의 생활상을 공들여 구현했다. 최대의 축제인 원소절을 즐기기 위해 장안 108방의 모든 길을 가득 채울 정도로 쏟아져 나오는 100만의 사람들, 형형색색 불을 밝힌 수천수만의 등롱과 예인들의 화려한 공연 등 생동감 넘치는 묘사로 눈앞에 장안성을 그대로 펼쳐놓는다.
『장안 24시』에는 “문학은 인터넷 사유에 기반해야 한다”고 밝힌 마보융의 철학이 잘 반영되어 있다. 먼저 ‘웨이보(微博)’ 연재를 통해 선보인 작품은, 전문적인 고증부터 작은 의문점까지 독자와 자유롭게 토론하고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렴해 그 완성도를 높였다. 이른바 작가와 독자가 함께 완성한 ‘쌍방향 작품’은 현대적 이미지를 곳곳에 차용하고 있으며, 다양한 콘텐츠의 장점을 담고 있다. 작가 마보융은 하늘에서 내려다본 광활한 장안 108방을 네모반듯한 바둑판으로 재현하고, 등장인물들을 고유의 색을 지닌 바둑돌로 활용하며 장안 곳곳을 채워나간다.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사건들을 정교하게 중첩시키는 기법을 통해 이야기는 깊이를 더하고, 치열한 수 싸움 끝에 드러나는 최종 국면은 독자에게 강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마보융의 소설은 완벽한 시대 묘사와 화려한 볼거리로 인해 영상화에 대한 기대가 높다. 특히 『장안 24시』를 원작으로 한 드라마 <장안십이시진>은 8세기 장안성을 완벽히 재현해낸 1만 4000평 규모의 세트장, 총 제작비 6억 위안(약 1천억 원)을 뛰어넘는 최대 규모로 제작되어 방영 전부터 큰 화제를 모으고 있다. 현대문학에서는 『장안 24시』를 시작으로, 『용과 지하철』, 『초원동물원』을 비롯한 마보융의 다양한 작품을 한국 독자에게 소개할 예정이다.